소설리스트

환생자들의 세계 (244)화 (244/274)

길을 비켜라

레이가 대화를 피하는 대신 관심을 보이는 듯하자, 오스틴은 조금 밝아진 안색으로 간단한 브리핑을 해주었다.

비록 알바트로스가 구체적으로 어디를 노릴지는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인력을 배치할 곳은 두 군데로 정해졌다고.

“첫 번째는 대규모 전통 퍼레이드가 있을 국회의사당 주변 일대입니다. 매년 구경을 위해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니까요.”

“다른 한 곳은 어디입니까?”

“전쟁기념관 앞 광장입니다. 총리의 짧은 축사가 있은 후 그곳에서 건국기념일 콘서트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인파가 몰릴 만한 곳은 그 두 곳뿐입니까?”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그날 하루만큼은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에 휩싸이기 때문에, 어디를 가든 사람이 많다고 봐야 하겠죠.”

“그렇군요···.”

레이는 침음을 삼키며 대화중에 나온 주요 키워드를 곱씹어 보았다.

‘국회의사당, 전쟁기념관, 건국기념일··· 그러고 보면 예전 핑크 다이아몬드 사건도 신년행사를 노린 것이었었지.’

만약 알바트로스가 독단으로 이런 테러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배후에는 룩스 제국의 위상을 철저히 깎아내리고자 하는 세력이 있는 것이 확실해 보였다.

‘사실 그렇게 따지면 테러를 행하는 알바트로스보다, 그 테러를 사주하는 위험 분자들을 먼저 정치적으로 색출해 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은데···.’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레이는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 뻔했으나, 이내 그만두었다.

오스틴 역시 굳이 구분하자면 행동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즉, 지금 그에게 이런 견해를 내비쳐보았자 당장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라는 뜻.

게다가 지금은 급한 불을 끄는 것이 먼저이니, 괜한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으리라.

‘무엇보다, 정치판에서 구르고 구른 인간들이 그걸 몰라서 여태 가만히 있었던 건 아니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떨떠름해지는 가정이었다.

그래도 룩스 제국은 썩을 대로 썩은 슈네스펠트 왕국보다는 조금 낫지 않을까 했는데, 이렇게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았다.

“일단, 저희를 믿고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석하게도 당장은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다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면 바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모쪼록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오스틴을 돌려보낸 레이는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자신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당분간 알바트로스를 지켜보기만 하겠다는 기존의 계획을 전부 뒤집어엎어야 했으므로.

* * *

룩스 제국 건국기념일 저녁.

노을이 지는 세레누스의 하늘 아래, 수많은 가로등과 건물의 불빛들이 차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퍼레이드의 화려한 불빛들이 축제 분위기로 들뜬 거리를 수놓았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서혜리와 스벤, 그리고 멜리사는 각자의 오퍼레이터 룸 화면을 통해 면밀하게 관찰하는 중이었다.

[저희 그거 같지 않나요? 도시를 지키는 비밀 수호대!]

서혜리가 여느 때처럼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고, 곧이어 냉랭한 멜리사의 답변이 들려왔다.

[도토리, 임무 관련 아닌 일에 대한 발언은 지양해 주었으면 하는데.]

[에이, 이 정도 잡담은 긴장도 풀리고 좋잖아요.]

[정신 사나워.]

[······.]

삑.

[사장님, 제 후임들은 왜 하나같이 저 모양이죠?]

레이에게만 들리도록 채널을 조정한 서혜리가 불퉁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어디서 저렇게 싹퉁바가지인 사람들만 골라왔느냐고.

이에 월야로 분한 채 전쟁기념관 근처 지하도에서 대기 중이던 레이는 자신의 장비를 점검하며 가볍게 대답했다.

“혜리 씨 마음에는 안 차시겠지만, 둘 다 나름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마음 넓은 혜리 씨가 봐주세요.”

[물론 제 마음이 하해와 같이 넓은 건 사실이지만요! 그래도 까마득한 선배님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는 있어야 되는 것 아니냐고요!]

“그래도 오늘 같은 날 동원할 인력이 많은 건 다행이지 않습니까?”

[에잇, 알았어요! 하지만 오늘 이 대선배님의 위엄을 단단히 보여줘야겠어요. 그러니까 우리 다람쥐 팀도 다들 힘내줘야 돼요, 알았죠?]

파이팅을 외치는 서혜리의 목소리에 피식 웃은 레이는 자신이 속한 ‘다람쥐 팀’을 슬쩍 바라보았다.

자신과 리암, 제이슨, 그리고 슈베린에서의 작전 이후 오랜만에 손발을 맞추는 제이콥까지, 총 4명의 인원이었다.

반면 스벤이 맡은 흰담비 팀에는 류양과 그의 패밀리 일원들이, 마지막으로 멜리사가 이끄는 등대 팀에는 원래부터 한 팀이었던 3인방이 그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두 팀에는 선택받은 자들 중 불 초능력자가 한 명씩 추가로 편성되었다. 각각 스벤이 개발한 특제 화염방사기를 등에 메고서.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나머지 선택받은 자들의 단원들은 현재 인파 속에 적절히 섞여 있었고, 페니는 홀로 저 상공 어딘가에 유유자적 떠있는 상태였다.

‘처음에 월야로서 임무를 뛰었을 때는 나와 혜리 씨 단둘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하나 둘 늘어나던 동료가, 이제는 제법 많은 수가 되었다.

늘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에 따라붙는 리암부터, 가장 최근에 합류한 초능력자들까지. 레이는 이들의 존재가 꽤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그가 내심 뿌듯해 하고 있는데, 돌연 제이슨이 옆에서 산통을 깨는 소리를 했다.

“허 참, 이 멤버 그대로 테러를 일으키면 룩스 제국 역사에 아주 길이길이 남을 사건이 되겠는데.”

“···테러를 막자고 온 건데 왜 갑자기 초를 치시는 겁니까?”

레이가 작게 불만을 표출했으나, 제이슨은 흔들리지 않는 얼굴로 대답했다.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온갖 굵직한 사건에 휘말리며 레이가 어떤 식으로 활약하는지 곁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는 그이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이었다.

“그게 걱정이라는 거야. 막는답시고 움직이다가 괜히 더 큰일 내지 않게 조심하자고, 수장님.”

이에 레이가 뭐라 대꾸하려는 데, 때마침 귓가에서 스벤의 음성이 들려왔다.

[메이카 로드 사거리에서 거리 통제를 시작했습니다.]

[등대 팀, 지금부터 이동을 시작한다.]

[다람쥐 팀 이동 대기! 1분 후 시청역 방향 열차가 지나가고 이동 시작합니다!]

기나긴 밤이 될지도 모르는 임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 * *

“보고드립니다. 현재 메이카 로드에 이어서 반대 방향인 케이지 스트리트 역시 거리 통제를 시작했습니다.”

“퍼레이드 이동 차량과 주변 기기들의 수색을 문제없이 마쳤다고 합니다.”

“대장님, 현재 전쟁기념관 쪽에서···.”

현재까지 이렇다 할 문제가 없다는 보고가 지속적으로 올라오고 있었으나, 정작 보고를 듣는 오스틴의 낯빛은 그리 좋지 못했다.

‘오히려 어디에서 작은 일이라도 터졌으면 이리 불안하지는 않을 텐데.’

현재 지상 위에서는 물 샐 틈 없이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길 위로 날아다니는 드론들은 허가를 받은 소수의 기기로 제한되었고, 높은 건물들 위에서 대기 중인 단원들에 의해 주요 거리는 사각 없는 감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거기다 사람들의 퍼레이드 참여율이 기존에 예상한 수치에 훨씬 못 미치고 있다는 점도 원활한 통제에 한몫했다.

사실 오스틴은 알지 못했지만, 이 또한 레이 일행의 작품이었다.

우선 페니가 힘을 써서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듯한 하늘을 만들어 냈고, 서혜리는 ‘오늘의 별별 운세’ 앱을 통해서 ‘오늘은 집에 있는 편이 신상에 이로울 것’이라는 메시지를 뿌려버린 것.

이러한 노력들은 시민들 중 상당수가 자택에서 TV를 통해 편히 관람하기로 마음먹는 것에 일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평범한 지휘관이라면 조금 마음을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러집단이 수십 년 된 지하 통로를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니 일이 수월하게 풀리고 있는데도 오히려 불안을 느끼고 있는 오스틴은 감이 꽤 좋다고 볼 수 있었다.

어찌 되었든, 지상에서 오스틴이 이끄는 인력이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가운데, 지하에서도 바쁘게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

[등대 팀 2명 구속 완료.]

[흰담비 팀 1명 더 실려갔습니다!]

바로 전쟁기념관 광장과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지하도에서 알바트로스 조직원들의 뒤를 잡아내는 일이었다.

거미줄처럼 뻗어 나가는 지하 통로를 이용해 소형 폭탄을 나르거나, 지상의 감시를 피해 총기류를 소지한 채 퍼레이드에 섞여 들려던 이들은 차례로 레이 일행에게 추적당하고 있었던 것.

‘총리가 연설하고 있는 단상 아래를 폭파시킬 가능성도 있지.’

단상 아래의 땅이 무너지는 것만으로 총리가 죽을 확률은 높지 않겠지만, 그 밑에 빈 공간에서 대기하던 자들이 그를 해치고 도주하는 것은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얘기였다.

‘다만 걸리는 건, 이 한 번의 테러로 자기들의 은밀한 이동 수단이자 도주 루트인 지하도의 일부를 공개하게 된다는 건데···.’

이번 테러가 과연 그럴 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명확하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한편, 레이가 모든 추측을 오스틴에게 말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내부에 내통자가 있을 확률이 높아.’

이만한 일을 벌이는데 스파이가 없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 그들의 패를 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은 변수를 늘릴 뿐이라서 곤란했다.

설사 레이 일행이 알아낸 지하도에 관해서 오스틴에게 알려준다고 해도, 그건 오늘 이후여야 했다.

‘직접 전달하는 대신 아예 언론매체를 통해 공개해버려도 좋고··· 아, 있다.’

파지직!

“꺽!”

일행이 외마디 비명과 함께 기절한 괴한을 포박한 뒤 그가 타고 있던 바이크마저 처리하고 다시 출발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방금 다람쥐 팀이 잡은 사람까지 총 15명이 잡혔어요. 이쯤이면 저쪽에서 의심하기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연락책이 끊긴 곳이 꽤 될 테니까요.]

“자, 그럼 이제 하나하나씩 잡을 시간은 부족하니, 작전 2단계 들어갑시다.”

[전달합니다! 작전 2단계 들어갑니다! 모두 방독면 착용해 주세요!]

“제이슨 씨 준비되셨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제 이런 일에 참여하기에는 내가 너무 나이가 든 것 같단 말이야. 벌써부터 힘에 부치는 게, 쉽지가 않아.”

“되도 않는 약한 소리는 그쯤 하시고, 시원하게 지르세요.”

“에휴.”

화륵···!

가차없는 레이의 말에, 제이슨은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힘을 개방했다.

잠시 후, 제이슨이 일으킨 푸른 불이 통로를 타고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화륵, 화르르륵···!

현재 다른 두 팀에서도 불 초능력자들이 화염 방사기의 도움을 받아 비슷한 일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자, 갑시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전진하는 푸른 화염을 만족스레 지켜본 레이가 외쳤다. 곧 바이크에 올라탄 일행은 앞서가며 길을 뚫는 불꽃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지하 속에 숨어 있는 이들을 일단 한꺼번에 바깥으로 밀어내고 보겠다는, 과격하면서도 효과적인 레이 특단의 조치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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