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3화
눈이 감기고 점점 졸려온다.
이래도 눈꺼풀이 덮인다면, 한 순간이라도 결계를 유지하는 걸 잊게 된다면 격류 속에 휘말리게 될까? 영원히 자신조차 잊게 될까?
‘결계가 급속도로…… 부식되고 있어.’
그렇다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일까? 이 얄팍한 결계로 망각의 파도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유라는 이젠 파도처럼 밀려오는 망각의 강물에 신유성조차 흐려져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안도할 점은 아직 결계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하지만 자신만 잘 해낸다면 이대로 버티기만 한다면 공략은 클리어 될 수 있었다.
모두 살아서 돌아갈 수 있었다.
끄그그극-!
하지만 벽에서 철 긁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손가락이 튀어나오자 유라의 얼굴은 절망으로 물들었다.
“망할…….”
물론 일말의 가능성도 염두에 두지 않은 건 아니었다. 유라도 자신과 신유성이 처리한 게 완전하지 않은 상태의 모티스라는 건 알았다.
- [───.]
그녀는 죽음과 저주를 관장하는 악신 그 자체니까. 어떤 형태로 다시 태어나더라도 이상할 건 없었다. 이건 유라가 본 모티스의 신화에서도 나온 이야기였다.
모티스는 본래의 세계에서 인간들의 악의가 쌓이면 그 사념 속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다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빠를지는 몰랐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패배가 분했던 것인지 모티스는 차원을 찢으며 다시금 이 공간을 찾아왔다.
- 선배. 결계를 풀어주세요.
무전기를 통해 신유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라는 벽을 묵묵히 보았다. 지금은 손가락만 빠져나왔지만 모티스는 착실히 구멍을 넓히고 있었다. 언제 그 구멍에 머리를 집어넣고 뛰쳐나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결계를 풀면 어쩌게?”
유라는 주먹을 쥐었다. 신유성이 무슨 말을 할지는 이미 알았다.
- 결계를 풀어주신다면 지금 먼저 공격하겠습니다.
그래. 역시 이렇게 나오는 구나.
신유성은 유라가 생각한 그대로 말했다. 신유성은 자신이 희생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강물에 닿는 정도는 잠깐의 기절로 끝나겠지만…… 아예 휩쓸려 버리면 모든 걸 잊어.”
- 목숨은 살릴 수 있어요.
겨우 이제 막 2학년이 될 학생 주제에 어찌 이리도 든든할까?
신유성은 유라가 본 헌터 중에서 가장 헌터다운 헌터였다. 하지만 유라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건 자신이 절대 허락 할 수 없었다.
“……숨만 붙어 있다고 사는 게 아니야. 기억을 잊는다면 그건 죽음과 마찬가지야. 지금의 너라는 존재는 영원히 죽는 거야.”
유라는 숨을 골랐다. 여기선 선배인 자신이 결단을 내려야했다.
“5초. 딱 5초 정도의 시간은 내가…… 만들 수 있어.”
유라가 신유성과 함께한 건 이번 공략이 처음이지만 그래도 알 수 있었다. 신유성은 절대 동료를 두고 도망갈 헌터가 아니었다.
아마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이 정도겠지.
“챙겨두길 잘했네. 정말 먹게 될 줄은 몰랐지만…….”
유라는 포켓에서 손톱만 한 수정파편을 꺼냈다. 그 정체는 마왕의 마정석으로 잠깐이나마 몇 배의 마나를 끌어올리게 해주는 위험한 물건이었다.
상황이 좋으면 폭주.
상황이 나쁘면 마나 역류로 사망.
어떤 결과가 나오든 최악이었지만 유라는 입에 마정석을 털어 넣었다. 결심 같은 건 필요 없었다.
그럴 용기도 없었다면 처음부터 이런 마정석 따위 준비해두지도 않았다.
콰직-!
유라가 어금니로 수정 파편을 물자 입안에서 마정석의 마나가 퍼져나갔다. 인간은 태생부터 감히 넘볼 수 없는 마족의 마나였다.
윙-! 위잉! 위잉!
유라는 결계로 황금잔을 가두고 응축시켰다. 폭포처럼 흘러나오던 강물 때문에 결계가 부서지면 그 위에 다른 몇 겹을 더 겹쳤다.
이동시키거나 흘려보내는 건 공간에 한계가 있으니 아예 결계로 황금 잔을 가둬버린 것이다.
인간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 할 발상이지만 마족의 마나가 있다면 가능했다.
‘팔이…….’
하지만 부작용은 있었다. 유라는 몸 안의 통로 속에서 성질이 다른 마나가 폭주하는 게 느껴졌다.
마족은 마나마저 흉포해서 원래 있던 통로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으며 끔찍한 통증을 주었다.
덕분에 보라색 실핏줄이 도드라지고 혈관이 끊어지는 고통이 엄습했지만 유라는 웃어보였다.
“말했지? 5초라고? 이제 3초 남았어!”
유라는 힘껏 외쳤지만 마음속에서 부정의 감정이 피어났다. 겨우 3초. 기껏해야 몇 걸음 뗄 시간만으로 모티스를 처리 할 수 있을까?
‘제발.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부정적인 감정은 떨쳐야 해.’
본래의 유라라면 충분히 감정을 컨트롤 했겠지만 마정석의 여파 때문인지 쉽지 않았다.
‘지금은 신유성을…… 믿어야 해.’
* * *
[5초. 딱 5초 정도의 시간은 내가…… 만들 수 있어.]
그 말과 함께 신유성은 유라에게서 인간이 아닌, 전혀 다른 존재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는 게 느껴졌다. 그건 마치 국가대항전에서 본 류진과 결이 같았다.
‘이건, 분명…… 마정석이야.’
유라를 탓할 수는 없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지금은 이게 최선이라는 걸 신유성도 알고 있었다.
“말했지? 5초라고? 이제 3초 남았어!”
유라가 절규하듯 외쳤다.
유라가 황금 잔에 결계를 친 지금 이 순간이 신유성에게 유일한 기회였다.
‘어떻게든 한 번으로 끝내야 해.’
아티팩트인 황금 잔은 단순한 물리력으로는 부술 수 없다. 하지만 본체인 모티스를 처리한다면 작동을 멈출 수 있었다.
하지만 신유성에게 남아 있는 건 겨우 3초 남짓한 시간이었고, 모티스는 이미 상체 중 절반이 벽을 뚫고 나와 있었다.
탕-!
신유성은 땅을 박차고 탄환처럼 모티스를 향해 쏘아졌다. 공중에 몸이 떠오른 순간. 신유성은 신중하게 공격을 골랐다.
‘기회는 한 번이다.’
모티스를 일격에 처리하기 위해선 정확도보다는 가장 파괴력이 높은 기술로 정해야했다. 그렇다면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집중력 강화]
신유성이 집중력을 끌어올리자 특성의 힘이 발휘했다. 신유성의 사고가 가속되며 시간이 느려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감각은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몸 안의 마나 입자 하나하나가 통로를 이동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파괴력을 올리기 위해 여기서 한 번 비튼다.’
대부분의 헌터는 직선으로 마나를 뿜어내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신유성은 끌어올린 마나를 통로 속에서 회전시켰다.
단순한 발차기도 회전력이 더해지면 그 파괴력이 증대하는 것처럼 투신류의 무투기도 비슷한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화악-!
마나를 비틀어 회전시키고, 회전력이 더해진 마나가 손바닥 가까이 다가왔을 때 신유성은 문을 열어준다는 감각으로 방출했다.
투신류 흑룡암쇄장(黑龍巖碎掌)
손바닥에서 휘감기는 마나의 파동이 느껴진다. 신유성의 손바닥에서 뿜어진 파동은 자연의 마나와 격류하며 폭풍을 일으켰다.
화아악!
분명 흑룡암쇄장이라면 모티스를 갈기갈기 찢어 놓을 수 있었다. 일단 통하기만 한다면 실체화조차 덜 된 모티스를 찢어발기기엔 한 치의 모자람도 없었다.
그러나 신유성의 손바닥은 허공을 갈랐다. 마치 실체가 없는 유령처럼 모티스를 통과했다.
부웅-
“이건…….”
모티스는 악신이었다.
이 공간에서 공격이 통했던 건 어디까지나, 신유성과 유라가 승리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진 덕분이었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순간 이야기는 달랐다.
“아…….”
유라는 탄식을 뱉었다.
유라의 얼굴엔 자신의 의심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는 사실에 절망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나, 때문이야…….”
이젠 모든 게 끝이다.
그걸 직감한 유라는 절망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만약 인원수가 많고 그 다수가 확신을 가진다면 모티스를 저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 있는 건 겨우 2명이다.
2명 모두 승리를 확신해야 모티스에게 데미지를 줄 가능성이 있었다. 1명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다면 인원의 절반이 모티스에게 힘을 실어주는 셈이었다.
‘더는 방법이…….’
절체절명의 순간 신유성은 유라를 보았다. 이미 유라는 실패의 죄책감으로 물들어 있었다.
주어진 게 너무 짧은 시간이라 차마 유라를 신경 쓰지 못했다.
공격을 하기 전에 한 번 더 유라를 바라보았다면 조금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면 결과는 달랐을까?
- ■■───.
모티스는 기쁜 듯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무슨 언어인지 모르지만 아이를 품어주는 어머니처럼 양손을 뻗으며 신유성과 유라를 환대했다.
‘정말로…….’
이런 형태의 끝인가?
신유성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기에 패배의 무서움을 몰랐다. 스스로를 과신하진 않았지만 신뢰했다. 그 믿음이 신유성의 힘이었다.
어떻게 행동했다면 더 나은 결과로 도달했을까?
쨍그랑-!
신유성의 뒤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신유성은 힘이 다한 유라의 결계가 깨진 것이라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텅-
황금 잔이 바닥에 떨어졌다.
진실은 유라의 힘이 다해서 결계가 부서진 게 아니었다. 누군가가 던진 얇고 평범한 단도가 결계는 물론이고 깨질 일 없는 황금 잔까지 반으로 갈라놓았다.
쇄액-!
그다음 던져진 단도는 모티스의 머리로 향했다.
퍽!
겨우 손바닥보다 작은 단도가 머리에 박히자 신유성의 흑룡암쇄장조차 통하지 않았던 모티스의 머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사태는 싱겁게 끝나버렸다.
도대체 누가 던진 단도일까? 류진의 [가속]조차 감지했었던 신유성의 동체시력도 단도를 좇지 못했다.
“이런, 이런…… 늦지 않아 다행이구만. 늙으면 이게 문제야. 발걸음이 느려진단 말이지.”
하지만 단도를 던진 상대가 누구인지 알게 되자 그건 당연하게 느껴졌다. 암막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강유찬이었다.
“겨우 둘이서 7급 보스를 이렇게 몰아세우다니…….”
신유성은 강유찬에게 묻고 싶었다. 어떻게 모티스가 격리한 공간을 찾아왔는지, 방금 그 단도는 어떻게 모티스를 꿰뚫었는지 의문이 산더미였다.
그러나 8급 헌터는 원래 그런 존재였다. 인류의 한계를 초월하고 탑의 정점을 본 헌터들의 진정한 왕이었다.
“……권왕의 젊은 시절보다 10년은 앞서나갔어. 이 정도면 청출어람이라 봐야겠구나. 유성아.”
그런 자에게 17살의 나이로 칭찬을 받았으면 만족해야 할까, 아니면 공략에 실패한 스스로를 자책해야할까?
“……아닙니다. 협회장님의 도움이 없었다면 분명 공략에 실패했을 겁니다.”
신유성은 그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하하! 뭐 그런 이야기는 차차 하도록 하고…….”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인자하게 웃던 강유찬은 유라를 보았다.
“학, 흐윽, 큭……. 끅!”
마정석의 마나가 역류하며 유라가 발작을 일으키자. 강유찬은 얇게 눈을 떴다.
“6급 헌터가 마정석이라……. 어지간히 수세에 몰렸나보구나.”
퍽!
강유찬은 가볍게 유라의 목을 때렸다. 유라는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몸이 무너져 내렸다.
“늦기 전에 도착한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겠군. ……그럼, 또 보자꾸나. 유성아.”
강유찬은 유라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반면 신유성에겐 인자하게 웃어 보인 뒤 등을 돌렸다.
“협회장님! 3층과 4층! 모두 구조수색이 끝났습니다.”
“잘했네. 쓰러진 헌터는 메트로 시티의 병원으로 보내도록 해.”
지금까지 무패를 이어온 신유성으로선 참담할 정도로 벽을 느낀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