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김은아는 시계를 보았다.
오후 10시.
방학 동안 아카데미에서 보낸 하루는 참 짧았는데 오늘은 유독 길었다. 할아버지가 소개해준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들을 따라 승계에 필요한 교육을 받으며 하루를 꼬박 보냈다.
[저희 기업 제품이 얼마나 실전성이 뛰어난지 단번에 알아주시다니! 지금까지는 자문을 끼고 대화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김은아가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 김은아에게 호의적이었다.
‘뭐, 당연한가.’
참, 얼마나 명확한 관계인가?
서로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었고 오직 이익만을 계산하면 된다. 말을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돈이다.
서로 알아야 하는 건 계약의 내용이고 맞춰야 하는 건 돈의 숫자다. 그 과정은 지독하리만큼 간단 명료했다.
그룹을 이끌 엘리트로서 어릴 때부터 배워온 것들이니까, 참 익숙했다.
‘다들, 뭐하고 있으려나? 벨벳은 이 시간이면…… 자겠지? 아델라는 일어나 있으려나?’
아델라는 요즘 이탈리아에서 찾아오는 사람들 때문에 바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탈리아의 가장 주목받는 루키가 이탈리아에 없는 건 말이 안 된다며 비앙카 아카데미로 돌아와 달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들은 바로는 모두 거절.
아델라는 여전히 가온에 남았다.
‘스미레는 엄청 바쁠 테고.’
F반을 도와 여기저기 던전에 참여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열등생이었던 스미레는 어느새 본드래곤을 소환하는 사령술사가 되어 아카데미의 주역으로 주목받고 있었다.
그 외에도 파티원들은 점점 각자의 이유로 바빠지고 있었다. 사쿠라와 이시우는 같이 도장을 부흥시킨다며 언제나 함께했고, 유명인인 에이미는 스케줄에 온갖 방송이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보니 김은아는 거의 하루 온종일 부실에서 함께했던 시간이 한 순간의 꿈만 같이 느껴졌다.
눈을 뜨면 동료들과 함께하고 탑을 오르고 던전을 공략하던 게 어제 같건만 지금 김은아는 전혀 다른 세상에 오고야 말았다.
“은아야, 늦었는데 이제 돌아가야지? 1시간 전부터 비서님도 기다리고 계셔.”
결국 사무실까지 찾아온 김준혁의 말에 김은아는 시계를 봤다. 얼마나 일에 집중했는지 돌아갈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
“응……. 이거만 확인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김은아는 서류를 확인했다. 서류에는 10개도 넘는 기업이 모두 김은아가 원하던 제안에 맞춰 응답했다. 헌터 일은 뭐 하나 원하는 대로 된 게 없었건만, 이건 뭐가 이리 쉬울까?
어쩌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은 헌터 송충이보단 기업가 송충이인 게 아닐까?
아델라한테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고, 신유성처럼 강하지도 않았고, 2위였던 주제에 스미레의 성장세에 밀려버렸으니까.
그에 반해 김은아가 신성그룹에 온지 하루 만에 이룬 업적은 하나하나가 재계에 파란을 일으킬 굵직한 일들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열심히 하는 건 좋지만 그러다간 몸 상해.”
“괜찮아. 광산 건은 오늘까지 처리해주려고 그래.”
“파격적이긴 했어, 어머니가 자유롭게 일을 맡기자마자 처음 찾아간 곳이 호주의 광산이라니.”
김은아는 김준혁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서류를 확인했다. 자문위원이 1차적으로 확인한 계약서지만 그래도 자신이 허락해야 하는 건이니 꼼꼼히 확인했다.
“……새해에는 항상 마력석 납품 기간이 있잖아? 이번에는 수출 물량이 엄청 적었거든. 왜 그런지 생각해봤는데 헌터 바이온이 만든 신제품이 문제였어.”
“이번 마력석 건이 헌터 바이온이랑 관계가 있어?”
“응. 근데 정확히는 마력석 전체가 아니라 하급 마력석만, 지금까진 추출 과정이 너무 비효율적이었거든. 마나석 가격과 추출 비용을 빼면 이윤은 5%였어. 하급 마나석 가격은 당연히 쌌지. 기업 입장에선 처치 곤란일 정로 넘쳤고.”
“이번 제품은 추출 효율이 20% 정도 향상 된다고 했으니…….”
“겨우 5%였던 이윤이 25%로 오르겠지. 물론 그럼 당연히 마력석 가격도 덩달아 오르겠지?”
김은아는 김준혁의 앞에 홀로그램을 한 장 띄웠다. 거기엔 최근 하급 마력석의 판매량과 마력량에 따른 가격 변화가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그 증거로 시중에 수출되는 물량은 적었지만 판매량 자체는 올랐어.”
“하지만 어떻게? 물량이 줄어든 순간부턴 이미 매물을 확보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
“아니, 최근에 물량을 받아 왔다고, 최근에 거래를 했다는 말은 아니야. 계약 재배라는 말 알아?”
계약 재배는 주로 채소류나 만드라고라 같은 영물에 자주 쓰이는 계약 형태로 가격이 생산량에 비해 더 크게 변동하는 경우, 가격과 수량. 그리고 생산 방법과 결제 방법을 미리 합의해 예정된 시간에 상품과 대금을 교환하는 거래방식을 말했다.
“……누군 진 몰라도 헌터 바이온이 제품을 발표하기 전에 이미 대량으로 마력석을 계약해둔 거구나?”
“그렇지. 사실 상대가 누군지 의도가 뭔지는 알 필요 없어. 사람의 마음을 읽는 건 어려워도 돈은 솔직하거든.”
인간의 마음은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자금의 흐름은 시장의 논리를 토대로 이루어졌다.
그건 재계의 제왕으로서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김은아를 위한 무대였다.
“물론 그래서 광산 자체를 사들인 거야. 매물의 확보는 돈이 있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유리하거든.”
“꽤 무리하게 가격을 올려준 이유가 있었구나?”
김준혁은 김은아가 최근 소식까지 꿰차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뭐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러나 정확히 김은아의 능력은 방대한 지식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전문가인 자문위원들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보고 받은 결과를 통해 사업의 앞날을 추론하는데 능했다.
“광산을 비싸게 사도 괜찮고, 마력석을 비싸게 사도 괜찮아. 절대적인 수요가 정해져 있다면 어차피 그만큼 오르게 될 테니까.”
김은아는 김준혁보다 훨씬 미래를 내다보고 있었다. 겨우 학생이 이 정도 통찰을 가지고 있다니 이건 악마적인 ‘재능’이었다.
“내가 생각한 이윤은 15%. 그 이하로는 타협할 생각 없어.”
자신의 선택을 믿고 흔들리지 않는 단호한 김은아의 모습에서 김준혁은 김석한 회장이 겹쳐 보였다.
김석한은 평범한 중견 기업이었던 신성그룹을 가히 재계의 정점에 서게 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 재능을 가장 많이 물려받은 건, 아버지도 자신도 아닌 김은아였다.
김석한이 그토록 김은아의 말이라면 껌뻑 죽는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김은아는 신성그룹 귀여운 손녀이기도 했지만 진정한 의미로서 김석한의 후계자기도 했다.
‘아카데미에서 막 복귀했는데도 실무자들과 견줄 정도야. 심지어 이 나이에 이 정도의 큰 그림을 그리다니…….’
다만 한 가지, 오빠로서 걱정되는 게 있다면 신유성과 있을 땐 그렇게 웃음이 많았으면서, 무슨 옷을 입는 지로 하루종일 이수현과 떠들었으면서 사무실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김은아는 어쩐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김준혁은 그 간극을 잘 알고 있기에 더 슬펐다.
‘결국엔 신성그룹으로 돌아온 것도 신유성의 힘이 되고 싶어서겠지만…… 역시 이것조차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김준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자신의 소중한 여동생이 일을 처리하는 동안 외롭지 않게 의자에 앉아 기다려주었다.
10분. 20분.
또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 일을 마친 김은아는 푹- 테이블에 엎어졌다.
“끝났다…….”
김은아는 얼마나 피곤했는지 일어나지도 않고 계속 고개를 서류에 파묻고 있었다.
스윽-
지쳐 보이는 얼굴로 김은아는 김준혁을 돌아보았다.
“……오빠는 그 많은 직업 중에서 왜 헌터가 되고 싶었어?”
김준혁은 갑작스런 김은아의 질문에 당황했지만 소중한 동생의 질문이니 최대한 솔직하게 성의를 담아 답해주었다.
“……음, 동경했어. 시민들을 구하고 세계를 위험에서 지켜내는 헌터들이 멋있다고 생각했거든.”
“그럼…… 동료도 있었어?”
얼마나 졸린지 스르륵- 스르륵- 김은아의 눈이 감겼다가 떠지기를 반복했다. 김준혁은 저러다 김은아가 책상에서 잠이라도 들까 걱정이었다.
“응.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멋진 헌터였어. 진지한데다, 정의롭고, 엄청 강했지. 지금은 6급 헌터가 됐다더라. 솔직히…… 엄청 자랑스러웠어.”
김은아는 동료를 회상하는 김준혁의 모습에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김준혁과 동료의 관계는 현재 진행형이 아니었다.
멀어진 마음만큼 몸도 멀어졌기 때문일까?
“말투 보니까 일어난 이후 만난 적 없지? 진짜, 정 없게…….”
“그냥, 나는, 멀리서…… 지켜보는 걸로 족해.”
그러나 김준혁이 대답 했을 때 김은아는 이미 스르륵- 눈이 감겨 있었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하루종일 온 나라를 돌아다니며 얼마나 피곤했을지를 생각하니 김준혁은 괜히 가슴이 아팠다.
‘……사실 거짓말이야 은아야.’
김준혁은 혹시 김은아가 춥지 않도록 자신이 입고 있던 겉옷을 덮어주었다. 깨어 있을 때 하면 분명 부끄러워 할 테니 몰래 어릴 때처럼 머리도 쓰다듬어주었다.
‘내가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건…… 괜찮아서가 아니라. 그냥, 두려워서야.’
김준혁은 2년의 시간 동안 멈춰 있었지만 동료는 현실을 살았다. 얼마나 변해 있을지, 이제 외부인이 된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그냥 좋은 추억으로 남기고 싶었다. 자신에게 헌터는 과분한 꿈이었으니까.
‘그래도 솔직히…….’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김준혁에게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그건 동료를 만나는 것이었다.
“보고 싶어. 유라야…….”
그러나 김준혁은 누구에게도 닿지 않을 말을 그저 홀로 읊조릴 뿐이었다.
* * *
유라는 자신을 위해 준비된 14계단을 신유성과 함께 올랐다.
“……저 불빛, 보여?”
어둑한 시야 사이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촛농들이 보였다.
불이 꺼져 있던 촛농들도 마치 유라의 방문을 기뻐하는 듯 아무런 도구도 없이 스스로 불이 붙고 있었다.
“네. 선배님을 반겨주네요.”
“제발 무서운 소리하지 마.”
그래도 혼자가 아닌게 어디일까?
제법 친해진 둘은 농담까지 주고받으며 5층을 향해 걸었다.
“이 공간도 마찬가지네요. 아무런 마나도 느껴지지 않아요.”
“3층만 하더라도 밴시들이 울부짖는 통에 귀가 찢어지는 줄 알았는데…….”
어쩌면 당연했다.
여긴 델타 타워의 5층이 아니었다. 악신이 직접 초대한 전혀 다른 차원이었다.
“어쩌면 여기에 선배님이 생각한 ‘상대’가 있다는 증거겠죠.”
발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조용한 저택임에도 신유성은 긴장을 풀지 않고 길을 걸었다.
계단을 올라 도달한 직선의 통로 끝에서 반겨주는 건 거대한 그림.
“잠깐. 멈춰.”
그림에 그려진 익숙한 얼굴에 유라가 신유성을 불러 세웠다.
“……여기가 통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