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깔끔한 정장에 괴수의 보라색 피가 묻은 언밸런스한 차림으로 칼잡이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T-23 공략 끝냈습니다.”
로쟈는 그런 칼잡이를 한쪽 손을 흔들어 반갑게 맞이했다. 그녀는 재활을 위해 거대한 마나석을 죽부인처럼 끌어안고 있었다.
“오~ 벌써 끝냈어? 내가 어중간 하게 다쳐서 네가 고생이 많다. 그 단검에 첫빠로 찔렸으면 바로 은퇴였는데.”
“아쉬운 것처럼 말하시는 군요. 분석 결과 단검에 처음 찔렸다면 마나를 빼앗기는 게 아니라, 완전히 소멸했을 거라고 하던데요.”
“그건 안 되겠다. 벌어둔 돈이 얼만데 펑펑 쓰면서 놀고 가야지.”
하지만 칼잡이는 로쟈의 말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걸 알았다. 로쟈보다 헌터다운 헌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게 칼잡이가 수많은 스카웃을 받았음에도 녹음의 숲에 남은 이유였다.
“유라가 있는 팬텀 댄스 쪽은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없어. 건물 자체가 크니까. 좀 더 걸리겠지. 왜 많이 걱정돼?”
“조금.”
로쟈는 칼잡이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녀석 신입한테는 일부러 까칠하게 구니까 말이지. 선배로서 엄하게 굴고 있겠지.”
“신입이 또 그만두면 일이 늘어날 테니 그만두진 않았으면 좋겠는데. 걱정되는군요.”
로쟈는 칼잡이의 걱정에 동참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길드마스터인 자신이 마나석을 끌어안고 재활 중인 지금 굴러들어온 신입을 쫓아내는 건 곤란했다.
“그러게. 성질부리지 말고 살살해야 할 텐데.”
로쟈는 부디 둘 사이에 트러블이 생기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다시 마나석을 끌어안았다.
* * *
신유성과 유라가 걸린 매혹은 강도로 따지자면 1단계 [인식의 변화]였다. 아무런 감정이 없던 상대라면 이성으로서 매력이 느껴지는 정도 였고,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강한 호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즉, 정확한 효과는 ‘감정의 증폭’.
‘……진정하자. 어차피 방금 걸린 건 하급 매혹일 뿐이야.’
유라는 후읍- 후- 하고 심호흡을 했다. 아까보다 거칠어진 숨을 고르며 볼까지 붉어진 유라는 묘하게 억울한 감정이 들었다.
‘그런데 저 녀석은 왜 조금도 동요하는 기색이 없어?’
자신은 숭고한 던전 공략 중에 불경한 감정이 들어 스스로를 억제하느라 고생하고 있건만 정작 아이디어를 낸 신유성은 너무 멀쩡해 보였다.
‘원래부터 날 이성으로 보기는커녕 그냥 길에 널린 돌 보듯 했다 이거지?’
물론 신유성은 학생이었고 자신은 현역 헌터였다. 그런 사이가 될 여지는 하나도 없었다.
사실 지금까지 내색한 적 없지만 유라는 자신의 미모에 꽤 자부심이 있었다.
미모의 6급 헌터가 등장했니 어쩌니 미디어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탓에 귀찮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취급을 받고 있으니 자존심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탁- 타닥-
유라는 앞장서 계단을 밟으며 올라갔다. 하지만 매혹 때문에 신유성을 신경 쓰느라 집중력이 떨어진 탓일까?
콰악!
갑작스레 바닥에서 튀어나온 밴시에게 발목을 붙잡히고 말았다.
“악-!”
유라는 기본적인 신체 훈련보다는 특성 쪽을 훨씬 많이 연마한 헌터였다. 이렇게 거리를 내줘버리면 능력을 쓰기도 애매해져 엄청난 위기 상황이었다.
“위층으로 도망간 게 아니라. 계단에 잠복하고 있었네요.”
일단 밴시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치던 유라에게 차분한 신유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퍽!
신유성은 긴급한 상황에서도 정확하게 밴시의 손을 밟아 주더니 균형이 무너진 유라의 몸을 받아냈다.
그리곤 흔히 말하는 [공주님 안기]의 자세로 유라를 들어 마치 나무에서 나뭇잎이 떨어지듯 완벽하게 위층으로 착지했다.
“괜찮으세요? 선배님?”
일단 신유성은 유라의 발목부터 확인했다. 혹여 부러지거나 손톱의 독에 당하기라도 했다면 차라라 자신이 전면에 나설 생각이었다.
그러나 베테랑인 유라를 당황시킨 건 밴시가 아니었다.
- ……괜찮으세요? 선배님?
매혹에 당한 유라는 신유성의 행동들이 슬로우 모션으로 움직이듯 너무나 선명하게 느껴졌다.
구해준 건 고맙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볼 건 또 뭐란 말인가?
이건 반칙이었다.
자신을 걱정하는 달콤하고 그윽한 목소리. 호수처럼 깊은 눈. 티 없이 깨끗한 피부와 이목구비까지 이제 갓 2학년이 된 학생을 이성으로 생각하고 싶진 않았지만 심장이 먼저 반응했다.
“으응…… 괘, 괜찮아…….”
유라는 깨달았다.
매혹만큼이나 심장에 문제인 건 신유성의 얼굴이었다. 이런 걸 가까이서 보고 있는데 정상적인 사고가 될 리가 없었다.
‘위험한 녀석…….’
유라는 생각했다.
헌터에게 급이 있듯, 잘생김에도 급이 있다. 그렇다면 신유성은 과연 몇 급일까?
이쯤 되면 신유성의 특성이 외모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방금처럼 잠복하고 있는 녀석들 중에는 마나로 감지가 안 되는 개체도 있는 모양이네요.”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전투에 집중한 신유성을 보니 유라는 아까 전의 자신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미리 말할게.]
[마스터는 널 인정했는지 몰라도 난 아니야.]
혹시 주변에 쥐구멍이 있으면 숨고 싶었다.
‘방금 전만 해도 온갖 잘난 척을 해놓고 이런 꼴을 보이다니…….’
짝-!
유라는 정신 차리기 위해 자신의 볼을 직접 쳤다. 일시적이지만 잠에서 깨듯 정신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사아아-
신유성의 눈에 푸른 불빛이 감돌았다. 그러자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존재들이 보이며 자신의 주위를 감싸는 게 느껴졌다.
“너도 느꼈지? 최대한 도망만 치던 밴시들이 이쪽으론 못 가게 막으려하고 있어. 생존자들을 잡아뒀다는 증거지.”
“이 앞부턴 위험하겠네요.”
“……나한테는 네 얼굴이 제일 위험해.”
유라는 영문 모를 말을 하며 양손을 교차시켜 결계를 펼쳤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기괴하게 자란 발톱은 사각의 도형에 가로막혔다.
챙!
“여기서 전부 없앤다는 생각보단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해!”
“네!”
신유성은 달려드는 밴시를 손동작 하나로 찢어 발겼다. 투명한 몸체에 손을 집어넣고 마나를 공명시키자 밴시의 몸은 형체도 없이 소멸했다.
“이상하네…… 큭! 이렇게까지 몰려드는 걸 보면 주위에 뭔가 있는 게 확실한데.”
유라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밴시를 투우라도 하듯 사각형의 도형으로 골인시켰다.
당연히 결계를 통과한 밴시들은 교회로 따끈따끈한 직송 배달.
유라와 등을 맞대고 선 신유성은 밴시를 차례대로 소멸시키며 트릭을 설명해주었다.
“생존자의 기척을 감지해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모두 죽었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기본적으로 밴시들은 인간을 먼저 죽이지 않아. 붙잡아서 최대한 생체 에너지를 흡수하지.”
유라는 신유성의 앞에 네모난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신유성이 그 공간으로 주먹을 뻗자.
반대편의 공간에서 튀어나온 주먹이 밴시를 가격했다. 유라의 공간전이 능력을 일종의 포탈처럼 이용한 것이다.
오늘 합을 맞춘 것치고는 제법 팀플레이가 괜찮았다.
“그럼 선배님은 밴시들이 어떻게 마나와 생체에너지를 흡수하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방식?”
“거미가 포획한 먹이를 섭취하기 전에 거미줄로 감싸듯, 밴시들에게도 절차가 있습니다.”
이건 유라도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밴시의 생태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긴 했지만 이건 스미레처럼 사령술사나 알 법한 고급 정보였다.
[밴시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들었어요. 건물의 벽이나 그림자에 숨는 정찰자. 그리고 생포한 인간의 정기를 밴시 퀸에게 바치기 위해 숨겨두는 포박자.]
[숨겨둔다니?]
[유성 씨, 밴시들은 반항 할 수 없는 형태로 봉인해두어요! 먹이를 포획하는 거미처럼요!]
[그럼 스미레. 밴시가 포획한 생존자를 찾기 위해선 봉인을 풀어야 한다는 이야기야?]
신유성은 스미레와 포켓으로 대화하는 동안 많은 질문을 했다. 봉인을 해제할 해법까지 들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아쉽게도 신유성의 몫이었다.
[네. 하지만 어려워 보여도 결국 생존자를 봉인할 수 있는 건 형태가 있는 사물이에요!]
신유성은 스미레가 해준 충고를 더듬으며 주위를 살폈다. 생존자를 찾아내기엔 밴시들의 공격이 줄어든 지금이 좋았다.
“지금은 델타 타워의 사물들 중에 생존자가 봉인된 곳을 알아내야 합니다.”
신유성은 조심스레 따라오는 유라를 뒤로한 채 복도를 걸었다. 비록 밴시의 습격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델타타워에는 아름다운 장식품이 많이 남아 있었다.
스윽-
신유성은 복도를 지나치며 장식품인 부드럽게 항아리를 만졌다.
하지만 항아리에서 마나의 흔적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델타타워는 기본적으로 백화점이었다. 이렇게 넓고 거대한 백화점에선 미아를 찾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 신유성이 찾아야 하는 건, 수없이 많은 사물 속에 봉인된 생존자였다.
“……네 말이 사실이고 밴시들이 결계를 다룰 수 있다면 생성식이 있을 거야. 손으로 만진다고 끝이 아니야. 결계를 이루고 있는 근간을 지워야 해.”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
유라는 바닥을 보았다. 둘을 제압하기 위해서인지 바닥에선 보라색 연기가 점점 차오르고 있었다.
‘결계의 생성식이라.’
하지만 신유성은 유라의 말에서 오히려 희망을 발견해냈다.
수많은 사물 중에서 생존자가 있는 곳을 찾아내는 건 어렵지만 반대로 수많은 사물 중 가장 결계를 숨기기 좋은 곳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결계를 유지하기 위해선 유라의 말처럼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생성식이 필요했고, 신유성은 그걸 감추기 위해 가장 자연스러운 사물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사진. 아니 그림인가?’
신유성은 복도의 끝에 걸린 액자들을 보았다.
곧게 뻗은 선과 옅게 칠해진 면.
사람의 형상을 한 검은 존재들이 우글우글 모인- 모습은 얼핏 보기엔 평범한 현대미술품이었다.
스윽-
하지만 신유성이 액자에 그려진 선을 손가락으로 지우자 서서히 본래의 형체가 드러났다.
“……찾았다.”
신유성이 지운 건 결계를 이루고 있는 생성식이었다. 그건 기계처럼 세밀하고 복잡한 원리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조금만 지워도 본래의 목적을 유지 할 수 없었다.
“끼약-!”
덕분에 순식간에 결계가 일그러지며 그림에서 한 소녀가 튀어 나왔다.
“……생존자가 그림에 있었어?”
놀란 유라가 다가오자 정신을 차린 소녀는 숨을 골랐다.
“괜찮아?”
그러나 소녀는 신유성의 물음에도 대답이 없었다. 그저 신유성의 입 모양만 유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얘.”
유라는 그런 소녀의 행동에서 무언가를 알아챈 모양이었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에 귀가 들리지 않는 특별한 특징은 절대 틀릴 수가 없었다.
‘……헌터 바이온의 외동딸.’
유라는 신유성을 보더니 풋- 하고 기분 좋게 웃었다. 신유성은 그 미소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