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아무리 신성그룹의 연구원이라고 하여도 상징적인 하얀 가운을 입고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없었다. 자신의 직업을 밝혀야 하는 순간이 오더라도 홀로그램 명함을 띄우는 게 전부였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우리 연구소 가운을 입고 있군…….’
그러니 안경을 쓴 가운 차림의 남자는 연구소장인 리페르만의 눈에 유독 튀어 보였다.
관할 연구소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연회에 참가한 것만 보더라도 신성그룹의 산하에 속한 건 분명했다. 이상한 건 아무리 기억을 뒤져도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것.
‘……안 그래도 새 프로젝트 이야기를 하더니. 새로 뽑은 연구원인가보군.’
리페르만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려던 찰나 안경을 쓴 남성은 오히려 반갑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혹시, 리페르만 연구소장님 아니신가요?”
“맞습니다만. 처음 보는 얼굴이시군요. 게다가…… 연회장까지 실험복 차림을 고수하시다니. 이런 인원은 드문데. 제가 잊은 게 아니라면…….”
“네 맞습니다. 신규 프로젝트 때문이죠. 물론 신성그룹의 연구소에 지원한 동기 자체는 리페르만 연구소장님 때문이지만요.”
“오호, 저를?”
리페르만이 신기하다는 듯 반응하자 흰 가운의 남자는 자신이 연구소에 들어오기 이전부터 리페르만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을 늘어놓았다.
“리페르만 연구소장님께서 작성하신 논문은 전부 읽었거든요. 특성 분리학과, 초형에 따른 마정석의 성분 분류. 물론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건, 스트레스가 마나인지에 미치는 영향……. 이지만요.”
가운의 남자를 그냥 괴짜 정도로만 생각했던 리페르만은 그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논문 이름들에 흡족하게 웃었다.
“마지막 논문은 저에게도 꽤 어려운 주제였죠.”
“맞습니다. 겨우 5번의 계산식만으로 증명해내신 게 정말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추론만으로 그 영역까지 가셨는지…….”
안경을 쓴 연구원은 리페르만의 논문에 정말 감탄한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특성 연구법이 개정된 이후…… 진짜 ‘인간’에게 실험을 하는 건 금기가 되었으니까요. 후우, 저 같은 평범하고 평범한 범인(凡人)에겐 100년이 넘는 시간이 주어져도 해내지 못할 성과입니다.”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남자가 이리도 입이 닳도록 칭찬을 하자 리페르만은 괜히 어깨가 올라갔다.
“중요한 건 시간이 아니라 상상력이죠. 추론이란 그 상상력을 토대로 증명하는 과정이니까요. 뭐, 물론 과정보다는 당연히…… 결과가 중요하지만 말입니다.”
이 분야에 이 정도의 지식인이 있었다니 아무리 같은 연구원이라 하여도 리페르만의 논문은 십여 년도 더 넘은 자료였다.
“근데 그런 오래된 논문까지 찾아볼 학구열이라니…… 내 직접 이름을 기억하고 싶군요.”
안경을 쓴 남자는 홀로그램 명함을 내미는 리페르만의 행동에 영광이라며 기뻐했다. 그도 그럴 게 리페르만은 천재였다. 마치 금지된 인체실험이라도 자행한 것처럼 추론만으론 닿을 수 없던 영역까지 논물을 쏟아냈다.
마치 답안지를 보고 온 사람처럼 어려운 추론들을 직접 증명했다.
“정말 영광입니다. 리페르만 연구소장님이 제 이름을 기억해주시겠다니! 아, 그런데…….”
하지만 안경을 쓴 남자는 이름을 알려달라는 리페르만의 제안에 곤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름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이름이 없다니?”
리페르만은 그의 행동에 이건 무슨 장난인가 싶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안경을 쓴 남자는 곤혹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아…… 누구도 지어준 적이 없거든요. 그도 그럴게 괜히 실험체에게 이름이라도 지어줬다가 정이 들면 곤란하지 않습니까?”
남자는 미소를 지으며 안경을 벗었다. 안경을 벗기 전 무해한 모습과는 정반대의 인상.
“너, 너, 너는!”
남자의 차가운 미소를 마주한 리페르만의 피부는 공포로 하얗게 질렸다.
“시티가드! 아어억!”
리페르만이 비명을 지르려는 찰나 검은 액체가 리페르만의 입을 틀어막았다. 액체는 꾸역꾸역 리페르만의 몸을 비집고 들어가며 신체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절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이름을 물으니 참 곤란했습니다. 당신들이 저에게 허락한 건, 네 개의 숫자가 전부니까요.”
네임리스(Nameless).
리벨리온의 대장이자 빌런의 상징이 된 그의 모습에 리페르만은 눈을 부릅떴다.
“사, 사악 살…….”
리페르만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지만 그 말은 검은 액체에 막혀 나오지 않았다. 리페르만은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살, 력!”
“쉿…….”
네임리스는 그런 리페르만의 행동에 입술에 손을 얹고 조용히 하라며 옅게 주의를 주었다.
“……저들까지 죽일 생각입니까? 희생자는 당신 하나로 족하잖아요. 리페르만 씨.”
손목에 찬 아날로그 손목시계를 보았다. 포켓과 홀로그램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그건 참 특이한 물건이었다.
“참 신기하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아무도 당신에게 관심이 없다니……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도요.”
이 지옥 같은 풍경은 리페르만이 검은 액체를 모두 삼킨 뒤에 끝이 났다. 리페르만은 그제야 숨을 컥컥- 거린 뒤, 불안에 떨며 네임리스를 노려보았다.
“나,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여유로운 네임리스와 달리 검은 액체를 삼킨 리페르만은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무릎까지 꿇으며 애걸했지만 네임리스는 그저 처음처럼 옅게 웃을 뿐이었다.
“서프라이즈를 미리 알려주면 재미없지 않습니까?”
“제발! 제발! 목숨만은 살려다오! 나도 상부의 명령 때문에…….”
리페르만은 바지자락을 붙잡으며 네임리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 그러나 네임리스는 리페르만에게 이미 시선을 거둔 지 오래였다. 그저 와인 잔을 기울여 홀짝- 입을 적신 후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라면 알고 있겠죠. 마나 반발 성질……. 서로 다른 성질의 마나는 섞이지 못하고 자성의 S극과 N극처럼 서로의 힘에 반발 한다는 걸.”
이건 연구원이 아닌 헌터들조차 알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학문이었다. 레이드에서 드래곤의 브레스 같은 범위 공격을 막기 위한 배리어들도 이 마나 반발력의 원리를 접목해 만들어졌다.
“그, 그렇지. 알고 있다.”
“그럼 당신은 만약 힘으로서 이길 수 없는 상대가 있다면 어떤 전략을 짜겠습니까? 인류의 범주를 넘어, 드래곤처럼 마나가 강한 존재라면. 갑주 같은 그의 마나를 뚫을 수 있을까요?”
리페르만은 그 ‘상대’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네임리스의 적은 누가 보아도 강유찬. 그리고 동료 중에 유일하게 그의 악행을 도왔던 검신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건…….”
마음 같아선 리페르만은 네임리스에게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퍼붓고 싶었다. 전설의 헌터들은 탑의 60층이라는 인외마경을 경험한 자들이었다. 그들의 강함에 비하면 아무리 네임리스라 하여도 일개 빌런에 불과 했다.
“전 생각을 바꿨습니다. 그들의 벽이 견고하다면 그걸 부수는 게 아니라, 검문을 피해 몰래 들어가야겠죠.”
“마나 성질을 임의로 바꾼다는 말인가? 그런 건 불가능해……. 마나의 파장은 생명체가 내뿜는 인식표다. 그걸 조절하는 건, 물이 불이 되는 것만큼 터무니없는…….”
네임리스는 감탄했다. 역시 연구소장인 리페르만은 역시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그가 시행착오를 걸쳐 도달한 해답들에 손쉽게 닿는 걸 보니 역시 실력은 확실한 자였다.
“좋습니다. 그럼 생명체가 아닌, 사물이라면?”
“사물이 뿜어내는 마나는 기껏해야 한계가 있다는 걸, 아티팩트라 하여도 그건 마찬가지……. 사물이 생명체의 마나 파장에 맞는 마나로 성질을 변형하는 건 불가능하다. 서로 상반된 성질이 중첩한다는 건, 네 첫 번째 전제조차 부정하는 답이야.”
그러나 리페르만의 ‘상식’과 달리 네임리스는 그 역설 속에서 결국 증명해냈다.
“맞습니다. 참으로 힘든 일이었죠. 사물에게 변환을 위한 ‘의식’을 주는 과정. ……생령(生靈)의 힘을 사물에 가둔다는 것이.”
로쟈가 가지고 있던 정령의 힘과 모르간이 가진 마녀의 힘을 검에게 부여함으로써 평범한 인간이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 말은, 저, 정말 성공했다는 뜻인가!?”
리페르만은 네임리스의 믿기 힘든 이야기에 처음 만났던 순간만큼 놀랐다. 사물과 생명이 중첩된 상태로 모든 마나 방어막을 무산시키는 힘이라니 과학을 탐구하는 자로서 흥미가 돋는 이야기였다.
네임리스는 흥미를 보이는 리페르만을 지그시 보더니 그의 입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성공했습니다. 당신이 먹은 건 그 부산물이죠.”
“윽, 그 기분 나쁜 액체가?”
“당신은 헌터가 아니라 느끼지 못하겠지만 이미 당신의 몸에 잠들어 있습니다. 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당신의 내부에서 반발형 폭주를 일으키겠죠.”
그럼 헌터도 아닌 리페르만의 몸은 끔찍한 곤죽이 될 거다.
“……원하는 게 뭔가?”
“음, 상부의 명령 때문이라는 말. 저 역시 동감합니다. 당신 같은 끄나풀을 죽여도 역시 분이 풀리지 않죠.”
네임리스가 노리고 있는 건 강유찬과 검신. 그리고 헌터 협회라는 시스템 그 자체였다. 세계를 전복시키려는 지금 리페르만 같은 끄나풀을 잡아 분풀이를 해도 의미는 없었다.
“……나에게 스파이 짓을 하라는 거군?”
“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당신이 삼킨 마나 덕분에 우린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감시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텔레파시로 명령까지 내릴 수 있죠.”
“참 편리하군. 하지만 이건 너무 일방적인 계약이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자네를 도울 이유가 없지.”
리페르만은 자신이 이 정도 권리를 주장해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제법 강하게 나왔다.
덕분에 네임리스의 얼굴에는 잠깐 경멸의 마음이 머물더니 이내 지워졌다.
“……좋습니다. 2996의 이름에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일이 끝나면 목숨만은 살려주죠.”
리페르만은 2996이 누군지 잠깐 생각했다. 아무리 그라 하여도 실험체의 코드네임을 전부 외우진 못했다. 다만 실험실에서 네임리스가 이렇게 의미를 둘 존재가 한 명은 짐작이 갔다.
“그 여자애, 이야기인가. 좋아. 선택지가 하나니 어쩔 수 없지.”
시원시원한 리페르만의 답변에 네임리스는 마음에 든다며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그리곤 첫 목표를 귓가에 흘려주었다.
“말해두지만…… 제 첫 목적은 헌터계의 신(神)으로 군림하는 다섯의 헌터를 전부 죽이는 것입니다. 강유찬은 물론, 권왕과 마녀. 은빛바람까지도 전부…….”
1명 1명이 국가급 전력인 전설의 헌터를 전부 죽이겠다니, 다른 이라면 미친 소리로 치부했겠지만 네임리스가 가진 능력을 알고 있는 리페르만은 꿀꺽 침을 삼켰다.
차원 계약(Dimensional contract)
과연 어떤 끔찍한 존재와 계약을 했기에 신살을 논하고 있을까? 리페르만은 궁금증이 돋았다.
하지만 네임리스가 포켓에서 꺼낸 건.
“그리고 이건…… 신살자가 되기 위해 벼려낸 신살의 검입니다.”
그저 낡고 헤진 평범한 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