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7화
김은아는 이수현의 안내를 받아 파티가 벌어지는 연회장이 아닌 저택 안쪽으로 들어섰다.
저택 내부에는 단순히 연회에 초대 받은 인플루언서들이 아닌, 신성그룹의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신성그룹에 속한 계열사부터 협력사 회장까지 재계의 수많은 권력가들이 모인 자리에 김은아는 당당하게 주인공으로서 입장했다.
“아가씨께서 입장하십니다.”
물론 당사자인 김은아는 이런 환영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야, 부담스럽게 무슨 이런 쇼를 해? 내가 조용히 들어가고 싶다고 했지.”
“회장님 지시입니다.”
재계에는 재계의 규칙이 있다. 거추장스러워도 자리에 걸맞은 격식이란 필요한 법이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살짝 고개를 숙인 이수현의 안내가 끝나자 김은아는 박수갈채가 쏟아지는 쪽을 향해 웃어주었다. 여럿 놓인 긴 원탁형 테이블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한 재계의 인사가 모여 있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군요. 은아 아가씨. 이렇게 인사를 또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금발의 젊은 남자가 마치 귀족에게 예를 표하듯 자세를 낮춘 몸짓을 보이자. 김은아는 작은 목소리로 이수현에게 물었다.
“누구였지?”
“흑산 길드의 차기 마스터님이십니다.”
“넌 참, 신기해. 이런 걸 어떻게 다 외우는 거야?”
“제 일이니까요.”
5대 길드인 흑산의 길드장이라면 일반 학생들은 말도 섞기 힘든 고위급 관계자였지만 김은아는 감흥 없이 손짓으로 답했다.
“잊으시는 것도 이해가 됩니다. 은아 아가씨께선 계승 교육은 물론 헌터 일까지 겸하시며 굉장히 바쁘시다 들었습니다.”
“뭐, 그런 것도 아니지만. 나도 잘 부탁해요. 마침 신오랑 유수는 영원히 거래가 끊어진 참이니까.”
눈엣가시였던 신오 가문과 유수 길드가 신성그룹의 협력 길드에서 제외되었다니 흑산의 차기 마스터는 도저히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 신오와 유수가. 그렇군요. 저희 흑산은 그 둘의 빈자리가 절대 느껴지지 않도록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아카데미에선 일개 A반의 반장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 김은아의 입지는 좀 달랐다. 최상위 길드 마스터가 기회만 준다면 충성을 다한다는 맹세를 직접 할 정도였다.
“네. 잘 부탁합니다.”
그러나 새로울 건 없었다. 김은아는 자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익숙했다.
김은아와 정말 친구처럼 어울릴 수 있는 건 지금까지 신유성과 동료들이 끝이었다. 김은아가 정말 마음을 연 사람은 바보 같아도 철없게 놀던 그 몇 명의 친구가 끝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아가씨. 30분 뒤에는 부사장님과 이사님께서…….”
“그냥 우리끼리 있을 땐 엄마 아빠라고 해, 대충 좀 있다 만나자는 이야기지?”
“네.”
알겠다고 답한 김은아는 가온에서 닳도록 본 얼굴을 발견했다. 거기엔 부반장인 박수현이 정장 차림으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뭐야, 말 걸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 거야?”
“여긴 가온 아카데미가 아니잖아. 대놓고 먼저 말을 걸기엔 눈치가 너무 보이는걸?”
박수현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김은아가 박수현에게 아는 척 먼저 말을 걸어주자. 주변에서 은근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김은아가 아는 척을 해줄 정도면 박수현이 자신들 사이에서도 꽤 ‘급이 높다.’라고 짐짓 판단한 모양이었다.
“나도 피해자야. 원래라면 부모님이나 장남인 형이 나왔겠지만. 네 소식을 듣고 내가 대신 나오게 됐거든.”
“……풉, 재밌네. 무슨 같은 A반으로서 어드밴티지 좀 받아오라. 이거야?”
“그런 거지. 내가 변방의 귀족쯤 된다면 넌 정식 승계를 받은 왕족이니까. 당연히, 잘 보여야겠지?”
이 연회장의 목적이 ‘축하’나 ‘파티’ 정도가 전부라고 알고 있다면 그건 하수였다. 여긴 서로의 격을 알아보고 자신에게 필요한 인맥을 넓히는 일종의 전쟁터였다.
물론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도 소수 있었다. 하지만 인맥이 중요한 재계에서 사교성이 없다는 건 꽤 많은 부분을 포기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래?”
그런 면에서 박수현의 부모님이 취한 전략은 칭찬할 만했다. 박수현이 없다면 기껏해야 중견 기업이지만 김은아와 안면을 터둔 사이라면 이야기가 달랐으니까.
“의도가 참 투명하고 노골적이어서 마음에 드네.”
“욕이야? 칭찬이야?”
“마음대로 해석해. 겉으론 웃으면서, 속은 시커먼 놈들보단 낫다는 이야기야.”
김은아가 턱 끝을 살짝 움직이자 비서인 이수현은 명함 하나를 꺼내 박수현에게 건네주었다.
예비용 검정색 명함에는 김은아라는 3글자와 신성그룹의 이름만이 심플하게 적혀 있었지만 그 파급력은 남달랐다.
신성그룹에서 검은색 명함을 사용하는 건 오직 회장 김석한이었다. 그런데 김은아가 그 색을 물려받았다는 건 차기 회장의 재목이라는 간접적인 뜻. 비록 예비용이지만 그런 인맥의 명함이라면 천금보다 가치가 있었다.
“부탁이 있으면 여기로 연락해. 신경 정돈 써줄 수 있어.”
박수현은 믿기지 않는 김은아의 선물에 명함을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저, 정말? 기대도 안 했는데……. 이런 수확을…….”
평소엔 포커페이스로 유명한 박수현이지만 이번만큼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뭐, 같은 반이었으니까. 그리고 말했잖아. 곰을 자처한 여우보다는 차라리 의도가 투명하고 노골적인 쪽이 낫다고.”
박수현은 김은아의 명함을 보물처럼 마나 코팅까지 해서 포켓에 넣었다. 그리곤 목적을 이뤄 흡족한지 김은아의 말에 곧장 맞장구를 쳤다.
“그래? 네 말대로 그런 면에선 신유성이 제일 마음에 들었겠네. 그 녀석 속이 참, 투명하잖아? 표정만 봐도 뭔 생각인지 알 거 같고.”
하지만 맞장구를 치려 박수현이 꺼낸 말은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김은아는 인상을 찡그리더니 경고를 담아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앞에서 유성이를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
김은아는 A반에서도 까칠한 반장이었지만 이곳에서 성질을 드러내니 박수현은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바, 반장! 심기를 거스를 생각은 없었어! 아니, 그냥,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신유성이 남을 이용할 녀석처럼 보이진 않았거든!”
당황한 박수현이 심기를 맞추기 위해 다급하게 수습을 하자 김은아는 그제야 흥- 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렇긴 하지. 유성이가, 그런 애는 아니지…….”
“그, 그럼 바쁠 텐데 먼저 가봐. 반장. 혹시 할 이야기 있으면 가온ID로 메시지 보내줘. 내 쪽에서 갈 테니까.”
박수현은 혹여 김은아의 성질을 긁어 불똥이 튈까, 황급하게 도망갔다. ‘차기 회장님의 명함과 약속’이라는 목적을 이룬 마당에 괜히 질질 끌 필요는 없었다.
“아가씨. 대화하시느라, 입이 마르실텐데 목도 축이실 겸. 샹그리아 한 잔 어떠실까요? 물론 무알코올입니다.”
눈치가 빠른 이수현은 김은아의 기분을 풀어주고 분위기도 환기시킬 겸 와인 잔을 건넸다.
“어?”
하지만 김은아는 그 잔을 받지 않았다. 샹그리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닌 전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그게…….”
김은아는 하얀 손가락으로 조심스레 자신의 입술을 만지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이내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곤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됐어……. 지금은 안 마실래.”
김은아는 괜히 음료로 입을 적시면 아까 전에 느낀 감촉과 기억이 덧 씌워질 것만 같았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무척 붉으신데…….”
너무 붉어진 얼굴에 비서인 이수현이 걱정스레 쳐다보자 김은아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진짜, 괜찮아! 그냥, 좀 덥네!”
“네? 그런가요? 더울 만한 온도는 아닌 거 같은데…….”
이수현은 갑자기 얼굴이 붉어진 김은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김은아가 연회장에서 신유성과 나눈 밀회를 보았다면 금방 이해가 갔을 것이다.
“됐고! 빨리 엄마 아빠한테 가자 나 불렀다며!”
결국 애꿎은 이수현만 죄 없이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 뒤에 가족들과 나눈 이야기는 김은아에게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잘 돌아왔구나. 은아야.”
믿음직하다며 오늘만큼은 기꺼이 웃어주는 아버지의 환대.
“그래 이건 널 위한 자리니까. 넌, 이쪽 방면으론 어릴 때부터 천재였잖니?”
어머니의 믿음 속에서 김은아는 진정한 후계자가 되었다. 이번 연회에 참가한 이들은 기꺼이 신성그룹의 후계자가 누가 되었는지 알릴 것이다.
다른 그룹이었다면 왕좌를 노린 친족 간의 쟁탈도 일어날 법했지만 다행이 신성그룹엔 그런 일은 없었다.
“은아야. 마음이 바뀌었나구나?”
김준혁은 처음부터 후계자의 자리엔 욕심이 없었다. 후계자 자리를 위해 교육을 받기 보단 헌터가 되는 것에 더 꿈이 있었으니까.
오히려 김준혁이 마정석에 의존하면서 까지 이루고 싶었던 건 상급헌터의 꿈이었다. 그러니 기꺼이 웃으며 양보할 수 있었다.
그건 처음부터 자신의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응.”
“넌 좋은 경영자가 될 거야. 그 자질을 의심하는 사람은 신성그룹에서 아무도 없으니까. 다만…….”
오히려 김준혁은 정말 걱정이 된다는 얼굴로 오빠로서 김은아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겠어? 은아야?”
김준혁의 짧은 질문에는 참 많은 의미가 내포 되어 있어서 김은아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정말로 후회하지 않겠냐는 이야기야. 난 네 오빠니까. 네가 어떤 아이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걸?”
결국 김준혁이 웃으며 신성그룹의 관계자가 아닌, 오빠로서 이야기를 건네자 김은아는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응, 괜찮아. 당분간 생각은 나겠지…… 걱정도 될 거고……. 근데 유성이 곁에는 스미레도 있고, 아델라도 있으니까. 잘할 거라고 믿어! 걱정 안 해도 될 거 같아.”
“정말?”
“응. 정말……. 그리고 그런 걸 생각할 겨를 도 없는 걸? 당분간은 내 일에 매진하고 싶어.”
명확한 김은아의 대답에도 김준혁은 알 듯, 모를 듯,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잘 알고 있는 사이니까 오히려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작은 신호에도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건 이번만큼은 슬픈 일이었다.
“……그래 믿을게.”
김준혁은 연회장을 떠나는 김은아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힘든 선택이겠지만 그게 김은아의 결정이라면 응원해주는 게 오빠의 역할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참 많이 커버렸구나. 은아야.’
그 작던 꼬마가 자신이 보지 못한 사이 이렇게 커버렸다니. 김준혁은 자신이 없던 빈 공백이 오늘따라 크게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