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짠-!
초록 탄산수가 담긴 와인 잔을 마치 신유성의 잔과 부딪히며 함께 기쁨을 나누었다.
“아까 표정 봤지?”
“은아 네가 기대하라고 했던 일이 이거구나?”
7급 헌터인 유민서를 직접 불러 이렇게 담판을 짓다니 김은아의 이번 서프라이즈는 신유성조차 놀란 게 사실이었다.
“설명 안 해줘서 미안. 꼭 되갚아주고 싶었어.”
물론 일을 벌이고 난 뒤 그 대가로 유민서의 미움을 받게 되었지만 김은아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오히려 김은아가 걱정하는 건 신유성의 마음이었다.
“……좀, 내가 너무 멋대로지?”
신유성은 유민서를 만나고 싶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김은아가 이런 결정을 한 건, 피하는 걸론 아무 해결도 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준 사람이 바로 눈앞의 신유성이기 때문이었다.
“놀란 건 사실이야.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데…… 밀리지 않고 있는 널 보니.”
키만 해도 유민서보다 한 뼘은 작고, 실력도 7급 헌터인 유민서에겐 비교도 되지 않으면서 김은아는 기세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신유성은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귀여움과 함께 든든한 기분마저 들었다.
“무척 좋았어. 은아는 역시 완전한 내 편이구나 하고 생각이 들어서…….”
“당연히 네 편이지! 무슨 일이 벌어져도 네 편이야. 그야, 우린 같은 파티원이고……. 그리고…….”
무언가를 말하려던 김은아는 순간 말꼬리를 흐렸다. 민망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모르지만 오늘은 이르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으…… 아, 속은 시원해?”
김은아는 누가 봐도 말을 돌린 모양새였지만 신유성은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시원하다라…….”
김은아는 어쩌면 카페에서 신유성이 과거를 털어놓은 그 순간부터 쭉-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을 것이다. 신유성이 멋있게 복수하는 이 날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은아 네가 곤란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하긴 했어.”
그런데 당사자인 신유성이 이렇게 착해 빠져서야 무슨 의미가 있을까, 김은아는 에휴- 하고 짧은 한숨을 쉬었다.
“넌, 참…… 착한 건지, 둔한 건지, 통쾌한 마음도 없어? 널 버리고 떠난 사람이잖아.”
“솔직히, 응. 통쾌했어.”
“정말?”
“물론, 은아가 내 편이 되어준다는 기쁨이 더 컸지만…….”
신유성이 이렇게 대답할 때면 김은아는 정말 이 녀석이 여자의 마음을 몰라주던 그 녀석이 맞는지, 아니면 타고난 선수인 건지 궁금해지곤 했다.
“뭐, 유성이 너를 부른 게 이거 때문만은 아니지만.”
김은아가 이 말을 꺼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처음은 국가대항전, 그다음은 탑 공략전, 그다음은 겨울 방학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답을 내는 걸 자신도 모르게 미뤘으니까.
“있지, 유성아…….”
말을 꺼내기 전 김은아는 한번 깊게 숨을 골랐다. 어쩐지 결의에 찬 김은아의 눈빛은 기뻐 보이고, 또 슬퍼 보였다.
“……유성이 너는 너무 반짝, 반짝 빛이 나. 보고 있으면 눈이 부실 정도야.”
멋쩍게 웃으며 김은아는 볼을 긁적였다. 사실 이렇게 뜸을 들일 이유는 없었다. 미안해할 이유도 없었다. 김은아가 했던 약속은 이미 이행되었으니까.
[탑.]
[……탑? 몇 층?]
[음…… 한 20층?]
신유성의 파티는 처음 내밀었던 조건인 20층도 공략을 마쳤으며 김은아가 타협안으로 내놓은 국가대항전도 이미 끝난 상태였으니까.
[……대신 딱 국가대항전. 그거 끝날 때까지다. 알았냐?]
하지만 누구보다 파티에 남아 있고 싶은 건, 신유성과 함께 있고 싶은 건 김은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김은아가 이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내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너는 나랑 다르게…… 하고 싶은 게 있고, 꿈이 있으니까. 언젠가 스승님을 뛰어넘어 최고의 헌터가 되는 게 네 목표잖아?”
꿈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이란 너무 눈부셔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똑같이 눈부신 사람이 되어 그 옆에 서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만들었다.
“널 보고 있었더니, 나도 반짝반짝 빛이 나고 싶어졌어. 응, 아직은 오빠한테 맡겨 뒀지만…….”
말을 하는 내내 김은아는 기쁘게 웃어 보이려 했다.
“……흐흐, 나도 아직 꿈에 미련이 있나 봐. 우리 할아버지처럼 멋있는 회장님이 되는 게 내 꿈이었거든! 그래서 공부도 열심히 했고…….”
하지만 신유성의 눈에 그 모습은 그저 괴로워 보일 뿐이었다. 분명 아쉬움이겠지. 신유성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 마음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당장 자신만 하여도 당장이라도 김은아를 붙잡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은 건.
“나도, 네 꿈을 응원할게. 은아야.”
김은아를 붙잡고 싶은 마음만큼 누구보다 김은아를 응원하고 싶은 게 신유성의 마음이었다. 김은아가 용기 내어 고백한 꿈을 감히 자신이 짓밟을 순 없었다.
다만, 자신이 바보 같긴 했다.
‘내가 착각하고 있었던 건. 은아가 떠나겠다는 말을 할 때…….’
왜 예전의 자신은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당연히 김은아를 웃으며 보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왜 당연히 아무렇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을까?’
김은아와 친해진 만큼 이렇게나 슬픈 감정이 들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이렇게나 이별이 괴로울 줄 알았다면 조금은 예상해뒀어야 했는데…….’
김은아의 선택에는 언제나 미소로 화답한 신유성이지만 오늘만큼은 차마 웃지 못했다.
“아, 흐흐, 진짜…… 미안. 슬픈 일도 아닌데 괜히…… 내가 눈물까지 흘리고……. 이제 못 보는 것도 아닌데 그치?”
감정을 숨기는데 서투른 김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고이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고개 반대편으로 돌리려 했다.
“유성아, 미안한데. 나 잠시만……다른 데 좀 다녀올게!”
결국 김은아는 애써 웃으며 신유성의 앞에서 떠나려고 했다. 신유성의 앞을 떠난 김은아가 잠깐 사이 뭘 할지는 뻔했다.
분명 소리 죽여 펑펑- 운 다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오겠지. 그리곤 신유성과 함께 아무렇지 않게 하루를 보낼 것이다.
“미안. 은아야. 안 돼.”
결국 신유성은 단호하게 김은아의 손목을 잡아챘다. 오늘만큼은 김은아를 보내줄 수 없었다. 아니 혼자 둘 수 없었다.
그러니 신유성은 오늘만큼은 멋대로 행동하기로 했다. 김은아의 솔직한 고백만큼, 솔직하게 감정에 충실해지기로 했다.
“유, 유성앗…….”
짧게 늘어지는 단말마.
입이 입을 가린 탓에 무언가를 전하려던 김은아의 말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숨을 참는 소리와 함께 김은아의 동공이 커졌다.
펑-! 펑펑!
시끄러운 폭죽 소리가 주변을 덮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흐읍- 음…….”
신유성의 손이 김은아의 등과 허리를 감쌌다. 만일 이전에 키스를 주도했던 게 김은아라면 이번에는 신유성의 쪽이었다.
신유성은 좀처럼 김은아를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인사처럼, 다신 보지 못할 사람처럼 놓아주지 않았다.
“……유성아.”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눈가는 촉촉하지만 장난스런 목소리로 김은아는 말했다.
“가끔 본다고, 나 잊으면 안 돼. 알았지?”
대답조차 필요 없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 어떤 일을 겪게 된다고 해도 어떻게 김은아를 잊을 수 있을까?
“……응.”
신유성의 감정은 대답에도 묻어났다. 신유성의 짧은 한마디에 김은아는 형용 못 할 감정을 느꼈다.
“……응. 그럼 좀 있다 보자. 나는 부모님이 불러서,”
김은아는 아까 보단 나아진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신유성을 떠났다. 신유성에겐 김은아가 홀로 울진 않을 거라는 사실이 가장 중요했다. 보기와 달리 김은아는 울보라 좀처럼 혼자 둘 수 없었다.
펑-! 펑펑!
홀로 남은 신유성은 아름답게 터지는 폭죽 세례들 속에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너무나 아름답고 화려하게만 보이던 연회장의 모습이 차갑게만 느껴졌다.
‘……어디에 있는지보다, 누구와 있는지가 더 중요하구나.’
신유성은 테이블에 앉았다. 김은아가 돌아올 때까지 홀로 남겨진 신유성의 앞자리에 하얀 정장에 거구의 노인이 앉았다.
“드디어 홀로 남았구나.”
홀로 남은 신유성을 찾아온 건 연회장의 주인이자 신성그룹의 회장 김석한이었다.
“회장님이 여긴…….”
김석한은 신유성의 질문에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본론부터 이야기하마.”
김은아가 돌아오기 전까지 김석한은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둘러말할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난 네가 못마땅하다. 물론 네가 부족하다는 뜻은 아니다. ……누가 와도 마찬가지겠지. 목숨보다 소중한 손녀딸이니 말이다.”
김석한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다는 건 신유성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은아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도 없다.”
그러니 김석한은 신유성에게 경고의 메시지와 일종의 시험을 동시에 치르려고 했다.
“그러니 너에게 두 가지 부탁을 하려 한다. 괜찮겠지? 이건 은아를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신유성은 이 모든 게 김은아를 위한 일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석한은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손가락 2개를 펼쳤다.
“첫째는 가벼운 마음이라면 은아에겐 절대 접근하지 말라는 이야기다. 그 아이가 짊어지려는 왕관의 무게는 네 생각보다 무겁다. 이건 미리 하는 경고다.”
“명심하겠습니다.”
의외로 명쾌하고 빠른 신유성의 대답에 김석한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은아의 꿈은 차기 신성그룹의 회장이다. 재계의 제왕으로 만들기 위해 내가 어린 시절부터 교육시켜 온 엘리트 중의 엘리트지.”
가끔 김은아는 이런 쪽에 관련해 비범한 면을 보일 때가 있었다. 평소에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정식으로 후계자 자리를 받기까지 일반인은 상상도 못 할 교육을 받아왔다.
김은아는 마르지 않는 돈의 샘으로 최정예의 교사와 최정예의 설비로 만들어낸 진정한 엘리트였다.
“그런 은아의 곁에 서려면, 너도 그에 걸맞은 자리에 앉아야 하지 않겠더냐?”
그러니 김은아의 꿈은 김석한을 이은 재계의 정점.
“그 말씀은…….”
헌터계에서 그에 걸맞은 자리라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래. 내가 바라는 건 네가 차기 헌터 협회장의 자리에 앉는 것이다. 네가 원한다면 충분히 닿을 수 있는 자리지.”
김석한이 이렇게 노골적인 목표를 정한 건 단순히 야망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약 차기 헌터 협회장으로 신강윤이 꼽힌다면 김은아까지 신유성과 함께 엮여 험한 꼴을 당할 수가 있었다.
물론 김석한이 있는 이상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진 못하겠지만 걸림돌이 될 건 분명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지 않더냐? 내 말은…… 네 적은 네가 처리하란 이야기다. 진흙탕 싸움에 우리 은아를 엮이게 둘 순 없지.”
그러니 김석한은 신유성이 신오가문과 유수가문의 악연을 풀어 헤치고 진정한 왕좌에 앉길 바랐다. 그 정도의 야망이 있는 남자라면 곧 재계의 정점이 될 김은아의 옆자리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반면. 자신의 악연에 은아를 휘말리게 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녀석이라면 지금 연을 끊어두는 게 좋겠지.’
이제 남은 건 신유성의 대답뿐이다.
신유성은 폭죽이 그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불빛으로 뒤덮인 도시의 야경에선 별을 볼 수 없었다. 익숙하기만 했던 무신산에서 본 별빛들은 사실 고요한 하늘에만 허락된 빛이었다.
“좋습니다.”
그러니 신유성은 그 과감한 결단을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피하기만 해선 끊어낼 수 없는 악연이란 게 있으니까요.”
익숙함이라는 화려한 빛에 속아, 잊어버리기엔 그건 너무나 소중한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