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5화
신유성은 눈 앞에 펼쳐진 마치 전쟁 같은 상황을 보며 생각했다. 아까 전만 하더라도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카드 게임을 했다. 말하자면 평화의 극치였다.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상하네…… 내가 유수 길드장한테 이해가 힘든 말을 했나? 이. 수. 현. 비서?”
지금 신유성의 앞에선 김은아가 상대를 비웃으며 눈을 치켜세웠고.
“그렇게 실무에 간섭해도 괜찮으신가요?”
한 때 신유성의 어머니였던 유수길드의 마스터 유민서는 부채를 들고 여유롭게 웃었다.
“이건 꼬마 아가씨가 다루기엔 꽤 단위가 큰…… 민감한 영역이라고 생각이 되는데요?”
그래, 분명 들은 적이 있었다.
게임에서 패배하고 질투 선언까지 했지만 김은아는 연회장을 걸어 다니는 내내 기뻐했다.
[……음, 대충 10분 뒤인가? 준비 단단히 해 유성아. 곧 우리는 전쟁에 나서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이 장면이다.
‘은아가 아까 했던 이야기가 이거였구나…….’
아무래도 신하윤에게 크게 데인 김은아는 유민서와 단판을 지을 모양이었다. 물론 헌터 대 헌터로 승부를 한다면 단숨에 바닥에 쓰러질 테니 승부의 관건은 주먹이 아니었다.
“괜찮아 평범한 꼬마 아가씨가 아니거든. 적법한 절차를 밟아 후계자 교육을 받은 엘리트야.”
김은아는 이번 전쟁에 신성그룹의 후계자로서 참전했다. 7급 헌터인 유민서에게 김은아는 일개 학생에 불과했지만 신성그룹의 후계자는 이야기가 달랐다.
“……맞습니다. 아직은 대외적인 이야기지만 김은아 아가씨께선 그럴 힘도 권리도 있습니다.”
그 증거로 신성그룹의 실무자 중 상당히 높은 레벨인 이수현 비서까지 증인이 되어주자. 유민서는 탁 소리가 나게 부채를 펼쳤다.
“김석한 회장님이 직접 연회장에 초대하신 게 이런 서프라이즈를 위해서였다니……. 재미있네요.”
이수현은 유민서의 눈웃음을 보는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항상 김은아는 이상했지만 오늘은 연회장에서 뭘 잘못 먹었기에 그 선악의 헤일로를 긁고 계신 걸까?
상대는 국가 단위의 7급 헌터다. 내로라하는 상급 헌터들로도 처리 못 할 재앙이 벌어졌을 때 그제야 출동하는 결전 병기였다.
“그…… 은아 아가씨, 일단 진정하시고 오늘은 연회 날이니 업무에 관한 이야기는…….”
그러나 김은아는 이수현의 충고 따위 듣지 않았다. 이 전쟁이 얼마나 기다려온 순간인데 곱게 물러선단 말인가?
“아니 워낙 바쁜 몸이시잖아.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해? 지금 만났을 때 하면 좋지. 나 요즘~ 길드 관리에 관심이 많아졌거든.”
김은아는 오히려 냉큼 유민서에게 다가서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법 키 차이가 있었지만 기세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관계가 있으니 유수 길드를 믿고 싶어도- 이미 후계자 쪽이 저지른 일이 소문이 자자한 걸? 우리 학생회장 말이야.”
김은아의 입에서 신하윤의 이름이 나오자 여유로운 자세를 고수하던 유민서도 더 이상은 웃지 못했다. 그만큼 유민서에게도 최근 사건은 충격이었다. 물론 그 충격은 신하윤이 벌인 일보다는 신하윤이 패배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우리 신성 그룹은 후계자조차 똑바로 관리하지 못하는 길드랑 계약을 이어갈 순 없거든.”
“유감이네요. 신성그룹은 저희와 꽤 긴 시간 동안 신뢰 관계를 맺어왔는데.”
아무리 대형 길드인 유수 길드라 하여도 신성그룹과는 몸집에서 승부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김은아가 승기를 잡는 건 당연했다.
“악감정은 없어. 기업가의 입장으로서 손익을 따질 뿐이지. 장사꾼이 그렇잖아?”
“유수 길드와 손을 잡는 건 이익보다 손해가 크다?”
물론 유수 길드의 실력을 생각하면 이건 억측에 가까웠다. 다만 김은아의 논리도 생각해볼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투자는 원래 멀리 봐야 하거든. 내실이 중요하다고.”
지금 아카데미를 갓 졸업하는 학생들과 외국에서 들어온 헌터들로 신흥 길드가 많아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 중에선 신생 길드치고 꽤 큰 규모의 길드도 있었다.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의뢰에 필요한 비용은 싸지만 어느 정도 실력이 보장되는 길드였다.
유명하지 않으니 유수 길드처럼 다른 잡음도 없었다. 기업가의 입장에서 투자할 가치가 충분했다.
“유수 길드는 거대한 나무지만 성장이 막힌 나무야. 더 자랄 곳이 없지. 지금은 7급 헌터인 당신들이 관리하고 있지만 다음 차례는 누구인데?”
비교적 소규모의 인원으로 관리 되는 신오와 유수가 5대 길드로 꼽히는 건 가주인 유민서와 신강윤의 힘 때문이었다.
그 자리는 차기 길드장으로서 신하윤이 이어받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게 파토가 나고 말았다.
“그쪽에 이제 제대로 된 카드가 없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잖아? 그렇다고 외부인을 데려올 거 같지도 않고…….”
최고의 기대주였던 신하윤이 아카데미를 그만두고 잠적해버린 건 헌터계에서 유명한 사건이었다.
“뭐 당연한 취급이지 브릴리언트가 왜 신예들에게 목을 매겠어?”
김은아는 그렇게 말한 뒤 보란 듯 신유성과 팔짱을 꼈다.
그리곤 유민서가 들으라는 듯 그녀의 신경을 긁기 위해 일부러 신유성의 이름을 언급하며 조롱했다.
“근데 참, 아쉽다. 당신들 유성이가 있었으면 달랐겠네? 유성이 같은 헌터가 차기 후계자였으면 고민도 없이 해줬을 텐데……. 계. 약. 연. 장.”
김은아가 7급 헌터인 유민서가 보란 듯 악센트까지 주며 조롱하자 이수현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현기증을 느꼈다.
‘제발 그만하세요. 아가씨…….’
대체 유민서를 도발하는 이유와 목적은 무엇이며 그녀를 적으로 만들어 좋을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다행히도 유민서는 김은아의 도발에 놀아나지 않았다. 오히려 여제로서 품위를 지켰다.
다만 차분하고도 어딘가 외로운 목소리로 신유성을 향해 이렇게 물어볼 뿐이었다.
“내게 돌아올 생각은 없니?”
신유성은 그 말에 유민서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때 어머니였지만 이젠 신유성이 이름도 얼굴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그러니 신유성은 당연하게도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무리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도 신오가문에 있을 때 기뻤던 순간 같은 건 떠오르지 않으니까요.”
유민서는 의문인 듯 고개를 갸웃 움직이더니 손을 길게 뻗었다. 그리곤 신유성의 턱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관심, 그리고 사랑…….”
뭐가 그리 이해가 되지 않는 걸까? 유민서는 신유성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윤이가 말하지 않았니? 그런 감정은 아무런 가치도 없다고.”
그리곤 유민서는 긴 손가락으로 신유성의 턱을 타고 올라가 볼을 쓸어내리며 웃었다.
“어떻게 겉은 이리도 나를 빼닮았건만, 네 속은 나를 닮지도 그 이를 닮지도 않았구나.”
하지만 신유성의 볼을 쓸어내리던 유민서의 손짓은 곧 김은아에 의해 중지되었다.
“그쯤 하지? 당신이라면 돌아가겠어? 바보도 아니고?”
“……이건 길드의 일이 아니라 가족의 일. 신성그룹의 후계자는 이런 일까지 끼어들 권리가 있는 건가요?”
유민서의 한쪽 눈이 붉게, 다른 한 쪽의 눈이 금색으로 빛났다. 머리에는 동그란 선악의 헤일로가 떠올랐다.
“으, 은아 아가씨…….”
유민서의 힘을 아는 이수현은 겁에 질려 경련하듯 몸을 떨며 김은아의 팔을 잡아당겼다. 이제 제발 그만하자는 부탁이었지만 김은아는 이수현을 뿌리쳤다.
“그럼 권리가 있지. 난 유성이랑 결혼 할 생각이거든 가족을 자처하는데 그것도 몰랐어?”
“제, 제발…… 아가씨! 주변에 보는 눈도 많은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혹여 이상한 소문이라도 퍼질까 이수현이 기겁을 했지만 김은아는 당당했다.
“그러니까 유성이는 당신한테 안 돌아가. 당신 것이 아니라. 내 거야.”
김은아는 유민서가 보란 듯 팔짱을 낀 팔에 힘을 더욱 주었다.
“……은아야.”
신유성은 유민서와 맞서는 김은아를 보며 묘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자신을 위해 김은아가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당사자가 입을 다물 순 없었다.
“……내가 직접 말할게.”
신유성은 직접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유민서라 하여도 김은아보단 키가 컸지만 남자인 신유성보단 작았다. 신유성은 유민서를 내려다보며 아무런 감정 없이 담담하게 뱉었다.
“앞서 말했듯 신오가문도 유수가문도, 이젠 나와 관계없는 곳이에요. 그러니…… 돌아갈 일은 절대 없습니다.”
유민서는 그런 신유성의 행동이 같잖다는 듯 신하윤처럼 입꼬리를 올려 풋- 하고 비웃었다. 신하윤의 버릇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유성이 넌 참 재주가 많구나? 이렇게 든든한 배경까지 네 편으로 만들다니. 그래. 피곤하니 오늘은 이쯤 할게. 아무리 나라도 신성그룹의 후계자를 반죽처럼 터트리면…… 무사할 순 없으니까.”
유민서는 농담이라기엔 너무나 섬뜩한 말을 했다. 그녀를 알고 있는 이수현은 절대 그 말이 농담으로 들리지 않았다.
“다만…… 마지막으로 꼬마 아가씨에게 충고 하나 해도 될까?”
선악의 헤일로가 씌워진, 그것도 분노한 유민서의 손아귀에 겁도 없이 냉큼 다가갈 인간이 몇이나 있을까?
“패배자가 충고한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응~ 좋아, 얼마든지.”
그러나 김은아는 그게 가능한 인간이었다. 귀신이 무서워 밤에는 어둑한 곳은 혼자 못 가는 겁쟁이지만 이런 부분에선 이상할 정도로 겁이 없었다.
“……꼬마 아가씨.”
유민서는 속삭였다.
“오늘 일은 잊지 않을게.”
신유성도 이수현도 들을 수 없는 오직 김은아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젠가 나에게 울며불며 용서를 빌게 될 거야. 알겠니?”
만약 이수현이 들었다면 몸져누워 버릴 만큼 공포 그 자체의 협박이었지만 김은아는 아핫- 하고 웃어젖혔다.
“난 또 뭐라고…….”
그리곤 너무 웃었다며 검지로 눈물까지 닦은 후 유민서가 들으라는 듯 신유성에게 넌지시 말했다.
“자기는 이제 포기한다고 앞으로도 유성이 너를 잘 부탁한대.”
김은아는 유민서가 만난 최대의 강적이었다. 이 세상 누구도 유민서의 성질을 이렇게 긁은 적이 없었다. 이건 이미 재능의 영역이었다.
“하…….”
뛰어난 김은아의 실력에 감탄한 유민서는 짧게 탄식을 흘렸다. 그리곤 붉게 물든 악마의 눈으로 테라스 너머에 곧게 선 나무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화륵-! 타오르는 불꽃과 함께 감히 온도를 측정할 수 없는 지옥의 겁화가 나무를 완벽히 태워버렸다.
나무가 사라진 곳에는 한 줌의 재조차 남지 않았고 불길도 퍼지지 않았다. 오직 거대했던 나무만 소멸하듯 사라져 있었다.
“……다음에 보도록 하지.”
당연히 그건 김은아를 향한 경고였지만 당사자는 와아- 하고 감탄하더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솜씨 좋게 받아쳤다.
“응 좋아. 근데 나무 값은 유수 길드로 청구할게.”
정말 김은아의 입놀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타고난 솜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