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김은아는 이제 막 신유성과 함께 연회를 즐길 참이었지만 너무 바쁜 탓에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은아야? 아버님 손님들께 인사 좀 드리지 않을래?”
“오자마자, 또 부르네…….”
신성그룹이 개최한 이번 연회의 주인공이 김은아인 만큼 아무리 신유성과 함께 놀고 싶어도 찾는 곳이 너무 많았다.
“잠깐 다녀올 테니까. 너무 멀리 가지 말고 기다려. 심심하면 아까 그 게임이나 한 판 더 하던지.”
그러니 단단히 신유성의 단속을 하고 잠깐 자리를 비우는 김은아. 물론 신유성은 테이블에 앉아 그런 김은아를 조용히 기다릴 참이었다.
“저어, 혹시…… 신유성 씨 맞으신가요?”
그러나 잔을 든 긴 머리의 여성이 신유성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여성은 조심스레 묻는 말투와 달리 신유성이 자신이 찾던 사람이라는 걸 확신한 모양이었다.
“꼭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후후, 머리를 푼 모습은 처음이라. 아무렇지 않게 지나칠 뻔했네요. 손해 볼 뻔했어요.”
신유성은 마치 자신을 아는 듯 친근하게 말하며 웃는 여성의 모습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절 아시나요?”
“그럼요. 길드의 회의에서 얼마나 자주 이름이 오갔는데요~ 기억하고 계실까요? 브릴리언트의 길드마스터님이 저희 아버지거든요.”
명왕 이현조.
브릴리언트 길드라는 이름에 신유성은 얼핏 기억이 떠올랐다. 브릴리언트는 신유성이 입단한다면 차기 길드마스터의 자리는 물론 보고의 열쇠까지 인계하겠다고 제안한 길드였다.
“아…….”
“떠오르신 모양이네요. 아쉽게 됐어요. 이런 미남 헌터가 길드마스터라면 임원으로서 같이 일할 맛이 났을 텐데…….”
여성은 입을 가린 채 웃었다. 여성은 김은아와 비슷한 드레스를 입었지만 전혀 다른 어른이라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뭐야, 성아 너 헤드헌터 아니랄까 봐, 연회에서까지 일이야?”
게다가 조용히 있으려던 신유성의 마음과 달리 주변에는 갑자기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가온의 학생들한테는 2학년까지 접근 금지 몰라? 우리 업계에선 암묵적인 룰인데.”
“괜찮아. 그런 사무적인 이유가 아니라. 좀 더 개인적인 이유로 접근한 거라서.”
“네가 아주 미쳤구나~”
브릴리언트의 이성아와 달리 주황색 머리에 활발해 보이는 여성은 주하선이었다. 신유성은 전혀 처음 보는 주하선의 모습에서 묘하게 겹치는 얼굴이 있었다.
‘어디서 본 적이…….’
신유성은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대체 어디일까,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느낌의 얼굴을 분명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곧 신유성은 눈을 번쩍 뜨며 아! 하고 반사적으로 말을 뱉었다.
“……주하진?”
“아니 내 얼굴을 보자마자 그 이름이 왜 나와!”
주하진의 이름을 듣자마자 주황 머리의 여성이 질색팔색하자. 이성아는 쿡쿡- 하고 웃었다.
“하선이 넌 동생 이름에 왜 그렇게 질색하니?”
“싫어할 만하거든? 머리 색깔 빼곤 닮은 게 없는데, 얘는 또 어떻게 맞춘 거야?”
“음, 약간 막무가내 분위기 같은 거? 너랑 네 동생은 묘한 부분에서 닮은 거 같긴 해.”
신유성은 이성아의 말에 긍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닮은 구석이…….”
“후우, 순서를 따지자면 걔가 날 닮은 거지……. 내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주하선은 포기해버린 듯 한숨을 쉬곤 이내 유쾌하게 받아주었다.
그러나 신유성의 곁에 모이는 건 이성아와 주하선과 끝이 아니었다. 신성그룹의 연회장에 초대를 받은 인원들 중에는 다른 아카데미의 학생들도 있었다.
“어, 너어엇-! 너는!”
신유성을 알아본 건 다름 아닌 이노 아카데미의 나지혜. 그러나 좀처럼 모르겠다는 신유성의 반응에 나지혜는 충격을 먹었다.
“천재 헌터인 나를 이긴, 아델라를 이긴-!”
덕분에 나지혜는 부연 설명까지 첨언했지만 신유성은 나지혜가 누군지 떠오르지 않았다.
“흐흥, 어이가 없네. 라이벌의 이름은 좀 기억하지? 근데 잊어도 괜찮아. 지금부터 기억하면 되지.”
스스로 직접 라이벌을 자처한 나지혜는 포켓 ID를 건네며 연락처 추가를 먼저 제안했다.
“이건 내 ID 넘버니까. 추가 해줘. 그리고 에이미 로즈가 네 파티원 맞지?”
“응 맞아.”
“그, 그럼…… 내 이야기 좀 잘 부탁해. 저번 제안 정말 마음에 들더라! 전대 학생회장은 콧대도 높고 까칠하다고 해서 걱정 했는데. 정말 다행이야.”
얼떨결에 포켓의 연락처를 교환하고 업무적인 부탁까지 떠맡게 된 신유성. 그러나 신유성의 테이블 근처에 모이는 건 나지혜조차 끝이 아니었다.
밤의 불빛이 불나방을 모이게 하듯 점점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들자 신유성의 곁은 금방 북적북적해졌다.
“뭐야, 얜 어디 간 거야?”
하지만 김은아는 몰랐다. 자신이 아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을 줄 알았던 신유성이 연회의 주인공급이 되어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을 줄은 상상조차 못 했다.
“오늘 시간 있으면 나랑 놀자! 네 머릿속에 나지혜란 이름을 똑똑히 새겨줄 테니까!”
“그러지 말고. 영양가 없는 꼬마랑 놀기 보단, 어른들의 사업에 어울리는 게 어때요? 조금만 걸으면 브릴리언트의 임원들이 모인 테이블도 있는데…….”
아카데미와 부실에선 아델라와 스미레더니 연회에서까지 이 지경을 만들다니 신유성을 데리고 오면 어디가 되었든 김은아는 한 눈을 팔 수가 없었다.
“아, 진짜! 신유성!”
샤악-!
김은아는 순식간에 인파 사이에 파고들어 신유성을 낚아챘다. 자신이 어떻게 스미레와 아델라라는 엄청난 연적들을 두고 이 연회까지 신유성을 데려왔는데 이름 모를 어중이떠중이들에게 그 순간을 뺏길 순 없었다.
“미안한데, 선약이 있으니까 다들 돌아가지?”
이전이었다면 부끄러움을 탈만도 했건만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지 김은아는 당당하게 선포했다.
“와, 소문이 사실이었네…….”
“그러게. 상대가 신성그룹이라면 브릴리언트의 제안이 안 먹힐 만도 하지.”
몇몇 사람들은 웅성거렸지만 김은아는 그 정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1분 1초가 바쁘다는 듯 신유성을 잡아끌고 자리를 옮겼다.
“후우…….”
주변에 자신과 신유성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까지 오고 나서야 김은아는 안도한 듯 한숨을 쉬었다. 본래 자신은, 그러니까 신성그룹의 후계자는 고고했다.
그런데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집착하고 의지하고 그걸 넘어 질투까지 하다니. 신유성을 만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상상조차 못했을 일이었다.
“……조금만 한눈팔면 이 모양이니 내가 유성이 너를 어쩌면 좋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신유성이 자신의 것이라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까? 김은아는 어중간하고 답답한 건 싫었다. 소유욕이 엄청나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지는 성격이었다.
“유성이 너…… 다른 사람이랑 너무 친해지지 마.”
김은아는 신유성을 보았다.
질투를 느꼈을 때 보여주는 특유의 가늘게 뜬 눈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혹시 친해지더라도 내 앞에서 친근하게 굴지 마. ……알겠지? 자꾸 그러면…….
김은아는 신유성이 팔과 겨드랑 사이에 자신의 팔을 넣으며 달라붙었다. 그렇게 서로 팔짱을 낀 김은아는 귀여운 선전포고를 날렸다.
“……질투한다?”
* * *
연회장에 침입한 류진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혹여 모를 상황을 피하기 위해 네임리스의 경호를 맡는 것.
‘그러니…….’
정체를 들키지 않고 지금처럼 조용히만 있으면 임무는 성공이었다. 남은 건 리벨리온의 아지트에서 신호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근데 어째서…….’
임무의 시작부터 누군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걸까?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는 핑크 머리의 소녀는 류진의 얼굴을 보며 계속 기억을 더듬었다.
“크으으- 이상하다. 분명 본적 있는데…….”
혹시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 약간의 변장까지 했지만 그 정도로는 에이미의 눈썰미를 막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다른 사람을 착각한 모양이군. 우린 초면이다.”
류진은 자신의 정체를 들킨다는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해 에이미를 벗어나 자리에서 도망치려 했지만 오히려 그게 발목을 붙잡았다.
“어, 이 목소리…….”
* * *
에이미에게 온갖 산해진미와 유명인들이 모인 신성그룹의 연회장은 천국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파티 테이블만 돌아다녀도 업무적인 인맥이 저절로 쌓인다니 이건 정말 일석이조였다.
‘근데……. 이 사람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자신의 옆에 있는 남자를 대체 누굴까? 분명 본 적 있는 얼굴이건만 좀처럼 에이미는 이름이 떠오르질 않았다.
‘이상하네…….’
눈썰미가 좋은 에이미가 얼굴을 착각할 리가 없었다. 한 번 본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기억하는 게 에이미의 장기였다.
‘대체 어디서 봤더라…….’
의심 가득한 눈초리로 류진을 바라보던 에이미는 이제 숨길 생각도 없어보였다.
“음, 흐으음…….”
류진은 나름 충분히 변장을 했지만 에이미의 눈썰미는 그걸 무시했다.
“분명 어디서 본 적 있는 얼굴인데……. 어디였더라?”
아니 이젠 아예 대놓고 류진에게 물어보았다.
“저희 본 적 있죠!?”
그러나 범인이 먼저 자백할 리 없었다.
“……없다.”
잡아떼는 류진의 대답에도 에이미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크으으- 이상하다. 분명 본 적 있는데!”
“……다른 사람을 착각한 모양이군. 우린 초면이다.”
“혹시 이름이?”
에이미가 이름을 묻자 류진은 당황했다. 여기서 이름을 대답하지 않고 더 잡아떼면 오히려 그게 의심스럽게 보일 수 있었다.
“류…….”
“류?”
“류지노…….”
“혹시, 일본 사람? 은아 네 별장에 갔을 때 봤나?”
혼자 기억을 더듬는 에이미의 모습에 류진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조용히만 넘어간다면 굳이 일을 벌일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팔목을 류진을 향해 뻗었고 곧 이어 포켓에서 빛이 쏟아져 나왔다.
사아아-!
[안면 인식을 진행 중입니다.]
[데이터 인식 완료]
[류진-17세]
[소속……. 리벨리온의 멤버로 현재 현상 수배 중.]
“아……. 앗.”
그러나 진실을 안다고 그게 서로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다. 진실을 알게 된 에이미에게 주어진 건 어색하고 긴 침묵.
“와아악-! 압!”
결국 소리를 지르던 에이미는 류진의 손바닥에 입을 막혔다.
“자, 잠깐!”
“우븝, 브브븝- 립엡이온입답. 우브으으-!”
당황한 류진이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에이미는 방금 바다에서 낚아 올린 물고기처럼 푸덕거리며 발을 굴렀다.
“우븝, 읍, 삽랍살력!”
류진의 입장에선 아주 당황스러울 노릇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