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신성그룹의 저택 이른 오전.
비극을 알리는 김은아의 날카로운 비명이 탈의실에서 들려왔다.
“꺄아아악-!”
혹여 김은아의 신변에 문제가 생겼을까 이수현은 엄청난 속도로 몸을 내달렸다.
‘설마…… 연회를 앞두고, 괴한이라도 침입한 건가?’
신성그룹의 철통같은 보안과 이젠 이수현에 버금갈 정도로 강해진 김은아를 위협할 인물들이라면 범인은 리벨리온 밖에 없었다.
그들은 장남인 김준혁을 노린 적도 있었기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은아 아가씨!”
화악!
이수현은 다급하게 탈의실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보이는 건 너무나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은 김은아의 모습.
“이, 이건 아니야……. 절대 사실이 아니야.”
김은아는 어떤 심연을 본 것인지 절망에 찬 얼굴로 측정기를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아가씨?”
걱정이 된 이수현은 김은아를 불렀다. 하지만 김은아는 대답 대신 힘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솔직히 말해줘.”
그리곤 슬픔이 가득한 얼굴로 이수현을 흘기며 촉촉한 목소리로 이렇게 물었다.
“나, 살쪄 보여?”
“……엣, 네?”
처음 듣는 김은아의 질문에 이수현은 당황했다. 이수현은 그제야 김은아의 몸을 보았지만 솔직히 말하면 평소랑 비슷했다.
다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면 항상 입던 티셔츠와 돌핀팬츠가 약간 작아 보인다는 정도?
“그, 글쎄요? 저는 전혀 모르겠는데요?”
“거짓말하지 마. 지금 몸에 옷이 낀다고 생각했지?”
“성장하신 게 아닐까요? 키나 다른 어, 네 볼륨감 같은 그런…….”
이수현은 김은아의 직설적인 질문에 어떻게든 대답을 포장하려 했다.
“다만, 아주 조금…… 옷이 작아 보이긴 하네요.”
“놀라지 마. 나…… 후……. 2킬로나 쪘어.”
절망한 김은아와 달리 이수현이 겉으로 보았을 때 큰 변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볼륨감이 올라 보기에 따라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질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철저하게 자기관리를 하던 김은아가 체중이 올랐다는 건 의미가 컸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김은아는 문제가 뭔지 알아내기 위해 천천히 과거의 일들을 되짚어 보았다.
- 아가씨, 곧 필라테스 시간입니다. 강사님도 저택에 도착 하셨습니다.
- 나? 오늘은 안 해. 유성이랑 좀만 더 놀래.
생각해보면 신유성과 놀기 위해 한 번, 아니 몇 번 정도 운동을 빠진 적은 있다.
‘그거 때문인가?’
그게 아니라면 스미레가 만들어준 음식과 디저트 때문일지도 모른다.
- 은아 씨, 평소보다 양을 많이 드시네요? 그렇게 입에 맞으신가요?
- 직접 집에서 만든 라면도 괜찮네. 셰프 못지않아.
- 이 밤 양갱은 어떠세요?
- 뭐야, 이거? 엄청 맛있네!? 이것도 직접 만든 거야?
김은아는 일류 셰프보다 더 입에 잘 맞는 스미레의 음식에 평소보다 많이 먹은 탓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자꾸 간식을 같이 먹고 싶어 하는 벨벳 때문이 아닐까?
- 은아 엄마, 가치 젤리 머글래?
- 혼자 먹어도 되잖아. 방학 숙제 하느라 바쁘다고 했지?
- 혼자 먹으면 맛 업는데……. 알게써 벨벳은 젤리 다음에 먹을래.
- 아이 진짜, 이리와 같이 먹어줄 테니까. 바쁘다니까 정말.
- 캬항!
생각해보면 자꾸 점심만 지나면 벨벳이 김은아에게 같이 간식을 먹자고 찾아왔던 적이 꽤 있었다.
‘그것도 아니면…….’
- 영화는 팝콘이긴 한데……. 이런 밤에는 좀…….
- 이 정돈 괜찮습니다.
- 흠…….
밤마다 같이 영화를 보자며 보채는 아델라와 함께 먹은 팝콘 때문일지도 몰랐다. 이수현은 김은아의 고민이 길어지자 멋쩍게 웃었다.
“아가씨께서 짚이시는 부분이 많으신가 보네요.”
“됐어. 이젠 정말 뭘 줘도 안 먹어. 곧 연회잖아. 드레스도 입어야 하고…….”
예전보다 약간 도톰해진 허리를 잡아보더니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한 김은아의 변명에 이수현은 못 본 척 고개를 끄덕였다.
“힘내 봐요. 아가씨! 물론 지금도 이미 완벽하시지만…….”
* * *
김은아는 전쟁 같은 운동을 끝내고 절대 과식과 야식은 없다는 다짐과 함께 부실에 들어왔다.
그러나 부실에선 김은아를 비웃듯 문을 열자마자 기분 좋은 요리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뭐야, 저녁도 아닌데…….”
김은아가 설마 하는 생각에 거실을 바라보자 거기 놓인 건 엄청난 규모의 케이크였다. 아무리 스미레라도 이걸 어떻게 집에서 만들었지? 라는 의문이 생기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스미레? 뭐야 이 케이크는?”
김은아의 물음에 뻘뻘 흐르는 땀을 닦으며 스미레는 싱긋 웃었다.
“일찍 오셨네요? 그게…… 오늘은 은아 씨가 부실에 들어온 지 정확히 반년이 되는 날이거든요.”
이건 복병이었다. 1년도 아니고 반년 기념식 같은 게 있었다니 김은아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캬항…… 벨벳이랑 스미레 엄마가 하루 종일 준비해써…….”
평소의 김은아라면 자신을 신경써준 동료들의 마음에 기뻐했겠지만 오늘은 떨떠름하게 웃었다.
“고, 고마워. 이 많은 걸 전부 날 위해 준비한 거야?”
언제 왔는지 자리를 꿰찬 이시우와 사쿠라는 김은아의 마음도 모른 채 더욱 부담을 짊어지게 했다.
“다들 고생 많이 했지.”
“참고로~ 저기 있는 전병은 내가 직접 만든 거야. 우리 가문의 비기랄까? 한 번 먹어봐 진짜 맛있다?”
끝없는 음식의 행렬을 본 김은아는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모든 게 오직 자신을 위해 준비된 음식이라는 점이었다.
“은아 씨에게는 항상 고마워하고 있어요. 저희 집에 오셨을 때도 적응하기 힘드셨을 텐데 싫은 내색 없이 같이 있어 주시고…….”
“스, 스미레…….”
“그 마음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지만 제가 잘하는 건 기껏해야 요리 정도라 이렇게 은아 씨를 위한 케이크를 준비했어요.”
김은아는 이 케이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자신을 생각하며 부엌에서 케이크를 만들었을 스미레를 생각하니 포크를 집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김은아는 포크로 케이크의 귀퉁이를 잘라 입에 가져 넣었다.
“마, 맛있네……. 진짜 맛있어.”
이건 그저 고마운 마음에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건 김은아를 위한 케이크인 만큼 김은아가 좋아하는 재료들로 채워져 있었다.
언젠가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 과일, 언젠가 이 정도가 딱 좋다고 말한 적이 있는 당도, 언젠가 푹신해서 좋다고 말한 스펀지케이크.
‘스미레는…… 그걸 다 기억하고 있구나.’
이 케이크는 단순한 케이크가 아닌 감동이었다. 그러니 깨끗이 먹어 치울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게 끝이 아니라는 것. 아델라는 정체불명의 초록색 요리를 내밀었다.
“……응? 뭐야, 이 초록색 괴상한 음식은?”
워낙 괴상한 비쥬얼에 김은아는 별다른 악의 없이 한 평가였다.
“……볼테라에 조난됐을 때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해주신 음식입니다. 그때와 똑같은 콩 통조림 제품이 사용했습니다.”
“어? 으으응?”
그러나 아델라가 들려준 이야기는 김은아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저 괴식으로만 보였던 음식에 갑자기 그런 무거운 스토리가 덧씌워지니 김은아는 난색을 표했다.
“지, 지금 보니까 식욕이 돋는 색깔인데? 냄새도 좋고…….”
지금까지 김은아는 셰프들이 만든 최상급 식재료만 상대했다. 기껏해야 통조림으로 만든 콩 요리의 냄새가 좋으면 얼마나 좋을까? 심지어 아델라는 요리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정말입니까?”
“으응~ 진짜 맛있어 보여~”
김은아의 반응에 감동한 아델라는 그렇게 기쁜지 직접 숟가락 가득 요리를 떠먹여 주었다.
으적, 첩-
“아, 마싯, 맛있다아…….”
김은아는 덜 익은 콩의 풋내에 눈가를 파르르 떨며 요리를 삼켰다. 기뻐하는 아델라가 정체불명의 갈색 요리를 가져오자 이번에는 김은아가 먼저 물었다.
“그 아델라? 그건 뭐……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들어주신 요리야? 색깔이 수프 같긴 한데…….”
“네 조난됐을 때,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해주신 고기 수프입니다.”
그래. 물어보길 잘했다.
아델라의 요리는 겉모습은 물론 위험한 냄새를 풀풀 풍겼지만 이건 스미레와 다른 의미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합, 크흥……. 쩝, 흡, 으적, 마, 맛있네…….”
김은아는 고역 같던 아델라의 추억 요리를 모두 시식했다. 사쿠라가 가문 전통 레시피로 만들었다는 전병도 입에 넣었다.
배는 이미 꽉 찼고 이제 김은아의 입을 여는 건 그냥 동료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김은아를 향한 모두의 사랑은 끊이지 않았다.
‘이제 끝인가?’
김은아가 이젠 정말 끝이구나 라고 안도할 때면 메뉴가 하나씩 늘었다.
“은아 엄마 이건 벨벳이 직접 잡은 물고기 구이야!”
“작은 주인님과 제가 7시간 동안 열심히 잡았습니다!”
“큭…….”
김은아는 그랬다. 자신이 남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겐 한 없이 까칠했지만 반대로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겐 한없이 약했다.
“맛있게 먹을게…….”
벨벳은 자신이 앞바다에서 잡아온 생선이 무슨 종인지도 몰랐다. 당연히 귀한 식재료도 맛있는 어종도 아니었지만 김은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생선구이를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유성이, 넌 무슨 사연이야?”
이젠 달관한 듯 모든 걸 포기한 김은아는 먼저 신유성에게 물었다.
“……스승님이 만들어주셨던 멧돼지 고기구이야.”
김은아는 지금 스스로의 한계를 초월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사랑받고 있는데 그까짓 다이어트가 뭐가 중요할까?
“설마 날 위해 무신산에 갔다 온 거야?”
“응. 은아를 위해 쓰는 시간은 하나도 아깝지 않으니까.”
운동과 소식(小食)은 언제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추억은 지금밖에 만들 수 없다. 이건 평생토록 남는 기억이었다.
“유성아…….”
김은아는 신유성이 만든 멧돼지 고기구이를 베어 물었다. 지금까지 최악의 메뉴는 아델라의 콩 통조림 요리였지만 이건 그 강함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콩 통조림이 자갈이라면 멧돼지 고기는 바위였다. 벌칙이라 해도 믿을 고기의 잡내는 김은아도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래. 내가 언제 이런 걸 먹어 보겠니…….’
김은아는 한 입 베어 문 고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곤 미소를 지었다. 김은아는 이렇게 끔찍한 요리를 한입이나 먹은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다음은 뭐야?”
김은아는 달라졌다. 이젠 다이어트 같은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김은아가 됐다. 초월의 김은아가 됐다. 동료들을 위해서라면 그럴 수 있으니까.
“나나나! 나도 준비해왔어!”
구석에 있던 에이미가 손을 번쩍 들자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무슨 메뉴야? 직접 만들었어?”
“나? 그냥 아카데미 앞에 치킨집에서 사 왔는데. 짜잔~ 2마리 세트 메뉴~”
에이미의 메뉴는 정석이었다. 누군가를 축하하기 위해 치킨은 최고의 메뉴 그러나 이번만큼은 타이밍이 안 좋았다.
“치킨? 치킨은 무슨! 안 먹어!”
“히야악-! 으, 은아야 나한테 왜 그래!”
괜히 억울하게 덤터기를 쓴 에이미는 겁을 먹고 물러섰지만 김은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쳤다.
“그렇게 먹다가 살찐다고!”
“흐익…… 은아 네가 뭘 살찐다고 그래. 추, 충분히 말랐는데…….”
에이미의 입장에선 참으로 억울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