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8화
겨울 방학이라는 향기로운 꽃에는 숙제라는 가시가 있다. 그 향기에 취해 놀다 보면 결국 ‘마감의 압박’이라는 가시에 찔리기 마련.
“교수님들이 포켓으로 자료조사까지 허락해줬는데도 쉽지 않네…….”
“우리 반만 막힌 게 아닐걸? 그냥 이번 숙제 난이도 자체가 장난이 아니야.”
“딱 봐도 이번 숙제 낸 거 소해정 교수님이네, 맞지?”
심지어 이번 숙제를 준비한 건 문제 난이도가 악랄하기로 소문난 소해정이었다. A반에서 필기시험 1위인 박수현조차 이번 문제를 푸는 건 쉽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풀리지 않는 문제를 보며 김은아는 빙글빙글- 펜을 돌렸다.
“아니, 뭐 이런 어려운 숙제를 내주냐? ……이런 거 몰라도 마나는 잘만 쓰는데. 흠.”
사실 A반의 학생들은 김은아에게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오히려 A반은 S반보다 필기시험에 뛰어났지만, 반장인 김은아는 그다지 이론에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역사 쪽 문제들은 탑의 기록까지 뒤지고 있는데 나오질 않아.”
“그 키워드만 말하면 알아서 자료 찾아주는 프로그램 있다고 하지 않았나? 네 ID로 검색해 봐.”
“가능은 한데 이번 문제의 접근권이 없어. 이 문제에 필요한 정보를 열람하려면 최소 협회에서 5급 헌터로 인증받아야 해.”
“이래서 소해정 교수님이 싫어. 쉽게 가는 문제가 없어. 빈틈이 없다고…….”
아무리 시간이 줄어도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A반은 가온 아카데미 최고의 이론 파들이 모여 있었지만 소해정의 벽은 견고했다.
“탑과 관련된 역사 문제는 정말 악의적이네. 지리 문제도 그래. 이 지역은 10년은 지난 자료가 마지막인데 대체 어떻게 정답을 알아내라는 건지…….”
“그러니까, 소해정 교수님이 문제를 내면 만점자가 없잖아. 그냥 쉬엄쉬엄하자. 보충 걸릴 점수만 아니면 됐지.”
“뭐, 그런가? 반장은 어떻게 생각해?”
“……엉? 나?”
결국 돌고 돈 화살은 김은아를 향했다. 이런 중대한 문제에서 결정을 내리는 건 반장의 몫이긴 하지만 사실 이런 역할은 부반장인 박수현에게 어울렸다.
“그래. 반장인 은아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어차피 이렇게 시간 끈다고 우리가 나머지 문제를 풀 수 있을 거 같지도 않고.”
하지만 박수현은 이번에는 나서지 않고 말을 아꼈다. 오히려 이런 상황이 찾아오면 이상할 정도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김은아의 ‘운’이 작용할 순간이라 생각했다.
“흠…… 확실히 문제가 어렵긴 해. 뭐 자료조사나 조언을 받아도 된다고 허락한 건 그쪽이니까. 최대한 그쪽을 활용해야지. 안 그래도 비서한테 교수들 쪽에 수소문해보라고 물어봤어. 시간 안에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김은아는 턱을 괴고 귀찮다는 듯 이야기해도 카리스마가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꿈도 못 꿀 배경과 은연중 보이는 리더의 자질은 확실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라는 거리감을 만들어냈다.
“여, 역시 은아…….”
“교수님들이라면 설마 협회 쪽인 거야?”
“미쳤네. 은아한테 공부를 가르쳐 줬다는 그 사람들인가 봐.”
그러나 이렇게 해답을 내놓았음에도 김은아는 뭔가 느낌이 오지 않았다. 이번 숙제의 해결은 의외로 엉뚱한 곳에서 될 것 같은 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래. 뭔가, 아주, 뜬금없는 곳에서 해결이 될 거 같은…….’
생각에 빠진 김은아가 집중한 듯 눈을 가늘게 뜨는 그 순간 누군가 김은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은아 엄마 나 백 점 마자써…….”
“흐악! 놀래라! 베, 벨벳!? 너 언제 왔어!”
“벨벳은 컨디션이 좋으면 포탈을 만들 수 이써, 벨벳은 천재니까!”
그러고 보니 확실히 그런 능력을 사용하는 걸 본 듯했다. 물론 그런 능력을 돌이나 줍고 다녀서 인지하지 못했지만 저건 사실 엄청 대단한 능력이 아닐까?
슥-!
벨벳은 에이타 킨더가든에서 받은 상장을 김은아에게 내밀었다. 물론 상장에 적힌 건 아주 어려운 상급 필기시험에서 벨벳이 만점을 받았다는 걸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만점? 그래. 잘했네. 지금 우리는 엄청 어려운 문제를 풀고 있거든? 머리 쓰다듬어 줄 테니까 부실에…….”
“헉, 엄마 문제 풀고 이써써? 벨벳은 천재야! 엄마를 도와줄게!”
물론 자신감 넘치는 벨벳과 달리 그 말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A반에 아무도 없었다.
“쟤, 귀엽다. 은아를 엄마라고 생각하나 봐.”
“꼬리 만지면 화내려나?”
“조심해! 쟤 불도 뿜어.”
그저 벨벳을 신기하게 볼 뿐, 아무리 똑똑해도 소해정 교수님의 문제는 꼬마가 풀 수 있는 난이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벨벳 자신 있는데!”
벨벳은 자신이 문제를 풀 수 있게 해달라며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학생들은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안 돼~ 벨벳~ 그러지 말고 여기서 간식이나 먹어.”
“귀엽다. 볼이 말랑말랑해.”
“포켓에 달달한 거 있는 사람? 껌이나 사탕 같은 거~”
“젤리는 있는데. 홍삼 맛이야.”
“너나 많이 먹어. 대체 무슨 취향이야 그건…….”
결국 A반 학생들의 손에 붙잡힌 벨벳은 간식형에 처해진 채 젤리와 사탕을 냠냠거리고 있었다.
벨벳이 시험지에 관심을 보인 건, 상당한 양의 간식을 축낸 뒤였다.
“벨벳 그럼 시험지 구경만 할래!”
사실 벨벳의 부탁은 그리 어려운 요구는 아니었다. 어차피 시험지는 반에 널려 있었고 그 중 하나를 넘기고 문제에 집중할 수 있는 평화를 모두가 얻는다면 꽤 남는 장사였다.
“벨벳한테 그냥 시험지 줘. 재미삼아 보게.”
결국 반장인 김은아의 허락이 떨어지자 박수현은 벨벳에게 시험지를 넘겼다.
“허, 허걱…….”
하지만 아무리 천재 드래곤 벨벳이라도 소해정의 문제는 펜을 멈춰 서게 만들었다. 유치원생부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대가 다니는 에이타 킨더가든과 가온 아카데미의 문제는 차원이 달랐다.
“이, 이거 어려운 문제야-!”
“그렇다니까? 어린애한테는 아직 일러~ 그러니까 맛있는 젤리……가 없네? 홍삼 젤리뿐이잖아?”
“나 팥양갱도 있어.”
“넌 대체 포켓에 홍삼 젤리랑 팥양갱을 왜 넣고 다니는데? 무슨 취향이…….”
학생들의 마음은 고맙지만 벨벳은 간식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이 정도 난이도의 문제를 풀려면 시간도 부족한데다 고도의 집중력까지 요했다.
‘벨벳은 풀수 이써! 하지만 시간이 업써! 빠르게 생각해야 해!’
집중력을 끌어올려 사고를 가속한다. 비정상적으로 가속된 사고는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착각마저 들 게 한다. 어찌 보면 지금 벨벳이 하고 있는 건 신유성의 특성인 ‘집중력 강화’의 원리와 비슷했다.
사아아-
[3]
국내에는 1,432개의 던전이 포함된 에어리어A와 3,245개의 던전과 탑의 하부가 포함된 에어리어B가 있다. 그러나 협회의 첫 발표 때는 이와 다른 6개의 구역으로…….
소해정이 이번 시험 문제로 낸 건 포켓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는 아주 오래된 자료들이었다.
그러나 그건 벨벳에겐 오히려 유리한 조건이었다. 벨벳의 스승은 책이었다. 자신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책도 일단 표지만 예쁘면 무작정 읽은 탓에 벨벳의 머리엔 막대한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거 책에서 본적 이써-!’
심지어 벨벳은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정보를 서재에 저장해둔 책처럼 생생하게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책 제목-던전 역사 대 탐험!]
[협회에서 제안한 최초의 에이리어 시스템은 지금과 형태가 다르다. 던전의 수와 몬스터의 위험도에 따라 총 6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지역이나 위치로 분류하는 형식이 아닌 난이도의 분류에 가까웠다. - 232Page-]
‘떠올라써!’
슥, 스스슥-!
[4]
[3]에 기재된 에어리어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어낸 교수는 현역 헌터 출신이다. 그의 이름과 소속을…….
‘이것도 알아!’
현실의 시간이 겨우 10초쯤 지났을 때 벨벳은 이미 두 문제를 풀어버렸다. 벨벳 버전 집중력 강화를 쓰느라 머리도 몸도 녹초가 됐지만 멈추지 않았다.
‘5번 정답은 이거야!’
오히려 벨벳의 사고는 더욱 가속 햇다. 벨벳의 재능은 단순히 머리가 좋은 아이가 아니었다. 사도닉스의 재능을 물려받은 천재 드래곤이었다. 심지어 벨벳은 사도닉스보다 훨씬 뛰어난 조건이 있었다.
‘6번도!’
그건 바로 인간과 함께 한다는 점이었다. 긴 시간을 레어에서 향유하는 드래곤과 달리 벨벳은 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우며 자랐다.
‘7번도 떠올라써!’
사도닉스는 어린 시절 드래곤 레어에서 진리를 깨우치기 위해 사색에 빠져야 했지만 벨벳은 달랐다. 첨단의 기술을 옆에 두고 전자 서재와 포켓을 통해 원하는 지식은 뭐든 습득할 수 있었다.
드래곤은 탐욕스럽다.
그 대상이 눈부신 재화와 끝없는 지식이라면 더욱 그랬다.
‘10번!’
벨벳에게 책읽기와 공부는 힘든 일이 아니었다. 돌을 마나석으로 바꿔 헌터 용품점에 파는 것처럼 너무나 즐거운 활동이었다.
아무리 똑똑한 인간이라 하여도 즐기는 자를 이길 순 없다. 그런데 벨벳은 공부를 즐기는 ‘천재 드래곤’이었다.
“휴, 하나 빼고 다 풀어써…….”
시험지를 받은 지 겨우 10분.
모든 힘을 불태운 벨벳은 책상에 푹- 하고 엎드렸다.
“후후, 읽는 것도 어렵지?”
“뭐야, 시험지에 해답도 적은 거야? 열심히 풀었구나 벨벳~”
“엄청 힘들었나 봐. 잠들었어.”
“귀엽네~”
여학생들은 해답이 빠듯하게 적힌 벨벳의 시험지를 보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하하호호- 떠들었다. 정말 벨벳이 이 모든 문제를 풀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흠, 결국…… 답변이 오기 전에 시험이 끝났네. 우리끼린 4개 정도 풀었나?”
가온은 협동심을 기른다는 명목으로 반 학생들 함께 머리를 맞대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A반이 풀어낸 평균적인 문제 숫자는 4개.
“아마 상위권일 거야. 소문으론 다른 반들은 기껏해야 2개에서 3문제 정도만 풀었다고 들었어.”
박수현의 말처럼 A반이 아닌 다른 하급반들은 2개나 3개 정도에 그쳤다.
“S반은?”
“3개에서 4개일 거야 반장. 백퍼센트 확실해.”
“좋아. 그럼 시험지 걷어. 이번 시험은 1등 점수만 반영되니까. 최대한 공란이 없도록 하고, 정답도 안 겹치게 적어.”
김은아의 명령에 학생들은 시험지를 걷기 시작했다.
“캬, 캬항…….”
힘이 빠져 엎드려 있던 벨벳은 그제야 자신의 이름을 시험지에 적기 시작했다.
[단체 필기시험]
[A반 소속]
[이름: 벨벳]
스윽-
닿지 않는 책상에 몰래 손을 뻗어 시험지를 제출하는 벨벳. 아무도 모르게 완벽 범죄를 끝낸 벨벳은 책상에 뻗어 잠이 들었다.
‘캬우, 피, 피곤해…….’
* * *
적어도 단체 시험이라면 난이도는 높아야 한다는 게 교수로서 소해정의 신조였다. 그러니 이번 시험은 단 한 문제만 맞춰도 낙제는 면하는 최고난도로 정했다.
예측한 상급반의 정답은 3개.
하급반은 2개.
혹여 하나도 못 맞힌 반이 있다면 낙제 처리해 보충 수업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S반은…… 3개. A반은 평균이 4개 정도인가……. 예상대로군. 이 정도 난이도의 문제를 4개나 풀었다는 건 칭찬할 만해.’
소해정은 이제 B반의 채점으로 넘어가려던 순간. 차마 알아채지 못했던 약간 구겨진 시험지 하나가 더 보였다.
‘이건 뭐야? 내용도 빼곡하고 다른 A반 학생들이랑 내용이 너무 다른데?’
보통 반 단체 시험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기에 같은 반 학생들의 내용이 비슷비슷하다. 그러나 소해정의 진짜 의문은 채점을 시작한 순간 시작됐다.
혹여 학생 중 몇몇이 사적으로 자문을 구해 올까, 일부러 난이도를 극한까지 높인 킬러 문제까지 마지막 학생은 모두 풀었다.
이 문제를 풀면 오히려 의심을 해 풀이 과정을 추궁해 볼 생각이었지만, 시험지에 적힌 문제를 모두 풀었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여기 적힌 문제를 모두 푸는 건 출제자인 소해정조차 해낼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이, 이게 뭐야…….’
소해정은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이름을 확인했다. 물론 거기에 적힌 건.
[단체 필기시험]
[A반 소속]
[이름: 벨벳]
A반 학생의 이름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