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아카데미의 최강투신-406화 (405/434)

제406화

정서윤.

그녀는 S반의 소속이지만 학년 랭킹은 40위 정도의 학생이었다. 더 실력을 올려 커리어를 쌓겠다는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한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학생.

‘싸우는 게 싫은데 헌터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다니……. 남이 들으면 웃을 일이지’

그러나 정서윤은 수많은 아카데미 중 가온을 콕 짚어 지원한 이유가 있었다. 교문 너머엔 도심 한가운데 최신식 시설에도 불구하고 가온의 부지에는 숲이 있고, 호수가 있었으며, 바다로 이어지는 하천이 있었다. 자연을 사랑하는 정서윤에게 가온 아카데미는 꿈만 같은 장소였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숙소에 남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이른 아침부터 가온의 산책로를 거닐고 숲에 도달하면 자신을 반겨주는 자연이 있다. 멸종 위기종인 다람쥐도 보이고 동화에서나 볼법한 아름다운 새들도 있었다.

정서윤은 그런 자연을 벗 삼아 나무 그늘 아래에서 잠에 빠지는 게 취미였다. 정령사인 그녀가 숲에 들어올 때면 정령들은 가족이 돌아온 듯 기뻐했다.

드루이드만큼은 아니지만 자연 친화도가 높아 동물들도 따르는 탓에 숲속에 사는 소동물들도 모두 그녀를 따랐다.

그러니 가온의 숲은 정서윤의 비밀스러운 보금자리였다.

‘저 사람만 빼면…….’

토끼와 다람쥐는 물론 숲새들까지 대동한 정서윤은 나무 뒤편에서 장발의 남자를 훔쳐보았다.

정서윤은 남자와 함께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가끔은 눈이 맞을 때도 있지만 가볍게 인사만 건넬 뿐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런 주제에 정서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장발의 남자에게 호감을 가져 버렸다.

‘오늘은…… 사복 차림이네? 주말이라, 금방 가려나?’

기분 나쁘게 뒷조사를 한 건 아니지만 워낙 유명한 상대인지라 이름까지 알아버렸다.

가끔 눈 인사를 한 게 전부지만 시간이 괜찮으면 자신이 만든 도시락을 대접하고 싶었다.

돗자리를 편 숲속의 피크닉.

정령들과 작고 귀여운 동물들이 뛰노는 숲속에서 함께 도시락을 먹는다면 얼마나 즐거울까?

그 모습을 상상한 정서윤은 갑자기 헛기침을 하며 안경을 만졌다. 은근히 관심을 가진 정서윤과 다르게 신유성은 전혀 자신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근데 숲속보단 아카데미에서 말을 거는 게 자연스럽겠지? 그러려면…… 뒤를 밟아봐야 하나? 겸사겸사 취미랑 스케줄도 알고…….’

숨죽인 정서윤은 명찰을 보았다.

[신유성]

이름도 반도 부실도 알지만 아카데미에서 신유성의 뒤를 밟아볼 생각을 한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너무 바짝 따라붙는 건 곤란했다. 자신이 근처에 있는 것 정도는 신유성도 알겠지만 본심을 들키는 건 이야기가 다르니까.

그러나 신유성에게 남몰래 호감을 가진 정서윤은 시작부터 난항을 겪고 말았다.

“아, 스미레.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거야?”

뭐가 담겼는지 큰 보따리를 들고 신유성의 앞에 나타난 건 하나지마 스미레. 정서윤은 다른 학생에게 큰 관심이 없었지만 F반 소속인데도 세븐넘버가 된 스미레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부실에서 식사를 하는 것도 좋지만 오랜만에 함께 도시락을 먹는 것도 좋을 거 같아서요. 피크닉 같기도 하고…….”

스미레는 정서윤이 몇 주간이나 신유성과 내적 친밀감을 쌓아온 아지트에서 갑자기 돗자리를 펼치기 시작했다.

“아, 아앗…….”

자신이 너무나 꿈꾼 그 장면을 눈앞에서 스미레에게 뺏겨버린 정서윤은 힘 빠진 소리를 냈다.

“아직 유성 씨는 젓가락질이 서투시네요. 제가 먹여 드릴게요. 아~”

정서윤은 사람 속에 불을 지르는 애정행각까지 하며 스미레가 계란말이를 먹여주는 모습에 그만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풀썩!

“짹짹…….”

적색 깃털의 산새는 그런 정서윤의 어깨에 앉아 위로를 담아 지저귀었고, 뿔이 멋진 사슴은 사람처럼 툭툭 정서윤의 등을 앞발로 토닥여 주었다.

“괜찮아. 얘들아.”

하지만 꺾일 줄 알았던 정서윤은 오히려 멋들어지게 웃어 보였다.

“평소의 나라면 포기했겠지. 지금까진 그냥…… 아카데미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랄 것도 없었으니까. 솔직히 조용히 졸업하고 싶은 마음뿐이었어.”

그러나 정서윤은 달라졌다.

다람쥐는 안경 뒤에 감춰진 정서윤의 눈에서 마치 이글거리는 열기가 느껴졌다.

“……찍, 찍찍?”

다람쥐는 달라진 정서윤의 분위기에게서 절대로 꺾이지 않을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적색 물총새도 유일하게 교감한 인간인 정서윤의 변화를 느낀 모양이었다.

“짹, 짹짹짹!? 짹?”

“응, 결심했어. 이번에는 달라.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아. 내가 쟁취할 거야!”

아직 정서윤은 신유성과 말 한번 해본 적 없었지만 오늘부터 스미레를 연적으로 삼았다. 어떻게 보면 스미레는 정서윤의 역사적인 첫 라이벌이라 말할 수 있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

정서윤은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하기 위해 빠르게 신유성의 뒤를 밟았다. 식사를 마친 신유성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는 정서윤도 알지 못했다.

그냥 자연스러운 만남을 자처하며 우연히 ‘아, 산속에서 자주 봤던 남자애 맞지?’라는 말을 거는 게 오늘의 목적이었다.

그러다가 대화가 길어지고 신유성에게 눈도장을 찍으면 더할 나위 없었으니까.

터덕! 턱턱!

정서윤은 사슴을 타고 동물 한 무리를 이끈 채 신유성의 뒤를 쫓았다. 숲을 넘어 어느새 산책로까지 온 신유성은 호수 근처의 도보를 걷고 있었다.

‘다음 스케줄은 산책인가? 여기는 나도 좋아하는 산책로인데…….’

어쩜 이렇게 서로 좋아하는 장소가 이렇게 똑같을까? 먼저 신유성과 만난 건 스미레지만 정서윤은 자신이 더욱 잘 통하는 짝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비밀 아지트에서 산책로까지 좋아하는 장소가 겹친다는 건 분명 인연이라는 확증일 터!

부우웅-!

그러나 신유성의 목적은 산책이 아니었다. 도보와 차도가 이어지는 자리에 갑자기 흰색 리무진이 멈춰 섰다.

탁!

리무진은 자동으로 문이 열렸고, 성공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는 젊은 여성이 내려 신유성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오늘 학원 도시까지 인도를 맡게 된 이수현 비서입니다.”

이수현은 그 말과 함께 빙긋 웃으며 신유성을 리무진에 태웠다. 덕분에 정서윤은 순식간에 신유성을 놓치게 됐다.

“뭐야 갑자기 저 리무진은?!”

그러나 정령사인 정서윤에겐 동물과 정령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짹짹!”

적색 물총새가 신유성이 탄 리무진을 추적하기 위해 날갯짓을 시작하자 정령들은 바람의 힘을 실어주었다.

펄럭-!

그 힘을 등에 업고 순식간에 리무진을 쫓아가기 시작하는 적색 물총새.

‘학원 도시라고 했지?’

한숨 돌린 정서윤은 사슴을 타고 빠르게 학원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 * *

리무진이 신유성을 내려준 장소는 학원 도시 최고 규모를 자랑하는 고층 백화점이었다.

“저희가 갈 곳은 11층입니다. 이 카드가 있는 사람만 입장이 가능한 장소죠.”

“그 카드는…….”

“저희 은아 아가씨의 카드죠.”

신유성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11층은 일반 손님은 방문조차 불가능한 VIP샵이었다. 입구부터 호화로운 장식품에 부담스러울 정도의 숫자인 접객원들이 줄지어 서 있는 장소였다.

물론 그 중앙에서 거만한 자세로 신유성을 기다리고 있는 건 유명인처럼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낀 김은아.

슥-

김은아는 신유성을 보며 선글라스를 내리더니 까딱까딱- 따라오라는 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일단 옷부터 입어 봐야지? 우리 엄마 아빠 만날 때 입을 옷이니까. 내가 살게.”

숍으로 들어간 김은아는 건방진 포즈로 “요거, 요거, 그리고 저기서 저기까지.”라는 짧은 명령으로 순식간에 신유성에게 옷을 사 입혔다.

“은아야, 이 옷 엄청 비싼 거 같은데……. 이 돈이면 바나나…….”

“씁, 너 또 바나나 우유 이야기 하려고 그러지? 한 번만 더 해. 그때는 가온 아카데미 앞에 바나나 우유 공장이라도 세워 버린다?”

물론 신유성의 의견은 김은아에게 간단히 묵살 당했다.

김은아는 정말 음식에 금을 뿌리는 레스토랑에 신유성을 데려갔다. 난생처음 보는 신기한 음식들이 나오는 코스 요리를 주문하고 흐흥- 하는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우리 엄마 아빠랑 식사도 할 거니까 식사 예절도 배워야지? 이번에는 친척들도 엄청 많다? 참고로 신오가문의 사람들도 올 거야.”

신유성은 궁금했다. 김은아는 대체 뭘 준비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김은아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해주는 것처럼, 김은아가 원하는 일이라면 신유성도 뭐든 해줄 수 있었다.

“신오가문의 사람들이라…….”

“너 때문에 부른 건 아니고. 회사 일 때문에 할아버지가 불렀어. 난 사람들이 모이니까, 겸사겸사 너를 불렀고…….”

아무래도 김은아는 신유성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을 꾸미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나 신유성은 그 작전이 무엇인지 구태여 묻지 않았다. 지금은 김은아와의 시간을 즐기는 게 우선이었다.

“난, 좋아!”

“좋아. 그럼 된 거네. 시간이랑 스케줄은 내 비서가 말해줄 거야. 그날은 오늘 내가 사준 옷 입고 오면 돼.”

김은아는 서툰 포크와 나이프 질로 맛있게 음식을 먹는 신유성을 만족한 듯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김은아는 이상한 걸 본 듯 눈썹을 씰룩- 움직였다.

“어? 흐음?”

한 끼 식사가 수백을 호가하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모두가 정장 차림인 와중에 웬 동물들을 이끄는 교복 여학생을 본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뭐야 여기 이제 밥 먹는데 서커스 단원도 불러?’

이게 바로 정서윤을 본 김은아의 감상이었다.

* * *

신유성을 찾기 위해 학원 도시 전체를 뒤진 정서윤은 충격적인 장면을 보았다. 아무래도 자신이 신유성을 얻기 위해 이겨야 할 사랑의 연적은 하나가 아닌 모양이었다.

‘기, 김은아잖아…….’

심지어 스케일도 갑자기 확 달라졌다. 스미레까지만 하더라도 그냥 같은 아카데미의 여학생 정도였던 레벨에 신성그룹의 후계자가 끼어드니 장르가 변해버렸다.

‘아까 도시락을 먹고 저 많은 음식을 잘도 먹네…….’

정서윤은 떨떠름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저 자신은 한 달 동안 몰래 지켜본 남학생에게 짝사랑을 고백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야기가 어떻게 이렇게 된 걸까.

자신의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건만 벌써 F반 출신 세븐넘버인 스미레는 물론이고 재계 1위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김은아를 연적으로 두고 말았다.

가온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자신을 활활 타오르게 만든 목표건만 어찌 시작부터 이렇게 어려울 수 있을까?

“찍, 찍찍?”

“짹…… 째액…….”

정서윤은 동물 친구들의 위로를 받으며 긴 한숨을 뱉어냈다.

“후…….”

그래. 좋게 생각하자, 사실 신유성의 외모라면 연적이 없는 쪽이 이상했다. 2명 정도는 오히려 적은 게 아닐까?

정서윤은 최악을 가정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 3명이 아닌 게 어디야?”

정서윤에겐 설마 아무리 그래도 3명은 아니겠지 라는 강한 믿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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