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5화
겨울 방학은 헌터 생활로 지친 학생들에겐 꿈만 같은 시간이었다. 일본만 하여도 삿포로의 명물인 ‘설녀의 눈꽃 축제’라거나 오사카의 ‘30다리 문어 타코야끼’ 같은 축제들은 이미 사람으로 만석일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시우와 사쿠라가 겨울 방학에 함께 찾은 곳은 축제가 아닌 도장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도장의 풍경이 축제에 밀리는 건 아니었다. 넓적한 마루에 앉아 소복하게 눈이 쌓인 바깥을 보는 건 꽤 운치가 좋았다. 식탁에 놓인 뜨끈한 김을 뿜어내는 전골도 기대가 됐다.
‘그래…….’
식탁의 맞은편에서 웃고 있는 사쿠라의 부모님을 본 이시우는 오늘만큼은 꿀꺽- 침을 삼킬 정도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올 게 왔구나.’
이시우는 바보가 아니었다. 겨울 방학이라는 기간에 이런 자리를 애써 만들어 자신을 초대하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 전골…… 냄새가 참 좋네요. 그러니까, 버섯 냄새가…….”
아무리 어색하다지만 자신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이 중요한 순간에 식탐이 많은 것도 아니면서 기껏 꺼낸 게 음식 이야기라니 좀 더 나은 주제는 없었던 걸까?
“상등품이랍니다. 겨울에도 이렇게 맛있는 버섯을 먹을 수 있다니 참 기쁜 일이죠?”
하지만 그런 어색한 질문도 기꺼이 받아주는 사쿠라의 어머니에게 이시우는 감사함을 느꼈다.
“그, 그러네요…….”
“어머, 시우 네가 긴장한 거야? 벌써부터 긴장하지 마~”
사쿠라는 긴장한 이시우의 모습마저 귀여운 듯 쿄쿄- 하고 여우처럼 웃었다.
“바쁠 텐데 이렇게 시간을 내주다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이유는 시우 군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란다.”
지금까지 두 사람의 관계를 지켜봐 온 사쿠라의 아버지는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네요. 시우 군이 온 이후 도장도 활기가 생기고, 사쿠라도 웃는 날이 늘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시우는 사쿠라의 부모님이 감사를 표해도 곧이곧대로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고마운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신유성과 파티가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에 한걸음에 달려와 준 것도 사쿠라였고, 늘 자신을 응원해준 것도 사쿠라였다.
“아뇨.”
이시우는 깊은 생각 끝에 입을 열었다.
“감사의 인사는…….”
사쿠라와 부모님 3명의 시선이 이시우를 향했다. 모두가 이시우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말을 뱉으려니 이시우는 형용 못 할 민망함이 마음속에서 꿈틀거렸다.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을 뱉으려니 입술이 간지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시우는 끝내 뱉어냈다.
“오히려 제가…… 사쿠라에게 해야겠죠.”
“흐응~ 시우 네가 나한테? 어디 한 번 들어 볼까? 뭔데?”
사쿠라는 아직까진 이시우에게 팔짱까지 끼며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맞대응했다. 그러나 이시우는 너무나 진지한 얼굴과 목소리로 운을 띄웠다.
“그게…… 널 만나기 전 나는 가시 돋친 인간이었거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자리 같은 것도 없었고, 다가오는 사람도 없었어.”
진짜 자신은 어린 시절부터 전문적으로 교육된 살인 병기였으니까. 정반대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래서 밝고 쾌활한……. 누구에게나 친절한 정반대의 나를 연기했지. 실상의 난 기분 나쁜 음침한 놈이니까.”
사쿠라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시우도 식탁만 바라본 탓에 사쿠라의 얼굴을 확인 할 수 없었다. 지금은 담아둔 생각을 뱉어내는 정도가 최선이었다.
“근데 이젠 달라. ……아니, 달라지고 싶어졌어. 나한텐 안 어울리지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조금 더 노력해보고 싶어졌어.”
보글보글-
오직 전골이 끓는 소리만 가득하다. 소복하게 눈이 쌓인 바깥은 오직 침묵했다. 마루에는 이시우의 목소리만이 유일했다.
하지만 이시우가 숨을 고르며 다음 말을 뱉으려던 그 찰나 사쿠라는 물었다.
“……왜?”
왜 이시우가 변하려고 생각했는지, 왜 노력하려고 생각했는지 그걸 함축한 짧은 외마디였다.
뭐 이미 이렇게까지 질러버렸는데 저 정도 질문에 대답하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야 사쿠라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준비가 안 되었다는 말로 포기하기엔 사쿠라 넌 내게…….”
그러나 솔직한 이시우의 고백은 갑작스런 검지의 공격에 끊어지고 말았다.
“그, 그만…….”
사쿠라의 검지는 이시우의 입술에 걸쳤다. 솔직한 말을 막았다. 이시우는 그제야 사쿠라의 얼굴을 마주 볼 수 있었다.
사쿠라의 귀와 볼은 너무나 붉고, 눈은 너무나 커져 있었다.
“뭐야, 사쿠라 너.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거야?”
사쿠라는 이시우의 장난스런 빈정거림에도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습기까지 머금은 눈을 한 채 조용히 읊조렸다.
“그게…… 너무 좋아서…….”
닭살마저 돋는 둘의 애정 행각에 사쿠라의 부모님은 흐뭇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늘 두 부모님들은 이시우에게 부탁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아무래도 그런 말은 필요 없을 듯 보였다.
“이제 슬슬 전골이 익어가기 시작하네요.”
“그래요. 지금은 식사부터 하는 게 좋겠지요.”
그러니 지금은 그런 몇 마디 말 보다 따뜻할 때 전골을 먹는 게 나았다. 이시우는 그런 약속이 없어도 사쿠라를 자신의 목숨보다 아껴줄 사람이었으니까.
* * *
세상의 모든 지식에 통달한 마녀라 하여도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게 있다. 예를 들면 바다를 가르는 호화 크루즈에 앉아 겨울에도 따뜻한 열대지방의 온기를 즐긴다거나 여행객이 던져주는 먹이를 먹기 위해 모이는 바닷새들의 모습 같은 것들이다.
“흠…….”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신하윤은 쏟아지는 햇살 속에서 수평선을 보았다. 평범한 여인이라면 어떻게 반응할까? 아름답다고 말할까? 투명한 바다가 빛을 반사하는 모습은 마치 보석 같았다.
충분히 그런 감상에 빠질 수 있는 풍경이었다.
“바람이 시원하네. 이게 이혁 네가 보여주고 싶었던 풍경이야?”
신하윤의 물음에도 옆을 지키는 이혁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신하윤과 함께 하는 지금이 기쁜 듯 옅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혁이 처음으로 자신의 대답을 무시했건만 신하윤은 화를 내기는커녕 풋- 하고 웃어 보였다.
“……참, 넓구나. 세상이라는 건.”
“마음에 들어?”
“그냥 깨달았을 뿐이야 이렇게 오랜 시간을 살았는데도 내가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걸…….”
신하윤이 선단에서 내려가겠다며 턱 끝을 움직이자 이혁은 기다리기도 한 듯 몸을 받아주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높이는 염동력을 통해 사뿐하게 내려올 테지만 당분간 마나를 봉인 당한 신하윤의 신체는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몬스터나 괴수는커녕 무거운 물건도 혼자선 제대로 들 수 없는 연약한 몸이 되어버렸다.
“흠 신기한 경험이네. 보살핌받는 건 익숙하지 않은데.”
“나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를 지켜주는 건 하윤이 네가 처음이니까.”
물론 아직 신하윤과 이혁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둘 사이의 거리는 완벽히 좁혀지지 못했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참 귀찮은 일이구나. 약한 사람의 수발을 들며 기뻐하다니…….”
“바보가 되는 과정이지. 가랑비에 조금씩 젖기 시작해 결국 자신을 전부 잃고 말거든.”
자신은 아무것도 해준 게 없건만 왜 이혁은 자신을 좋아하게 된 걸까? 마녀의 이성적인 지식으로 인간의 비논리적인 감정을 이해하는 건 너무나 어려웠다.
“그럼 네가 말하는 사랑은 바보가 되는 과정이니?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어 버리는?”
“그 과정이 재밌다는 것만 빼면 비슷해. 난 하윤이 너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만으로 즐겁거든.”
“……그래?”
이혁의 사랑이란 짝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참으로 일방적이고 참으로 애달픈 사랑이었다.
둘의 감정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냐면 이혁이 느끼는 감정이 신하윤을 사랑이라면 신하윤은 호기심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향해 이혁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라플라스가 기뻐하며 사라질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을 뿐이었다.
“나한테 가까이 와.”
덕분에 신하윤은 아무런 죄책감 없이 이혁을 다룰 수 있었다. 열대지방의 아름다운 바다에서 크루즈의 선단의 끝에 서서 로맨틱한 입맞춤을 할 수 있었다.
서로의 입술이 닿은 순간 지금 이혁이 느끼는 감정은 눈앞이 아찔한 사랑이지만, 신하윤은 딱 호기심과 변덕에 불과했다.
“역시 여전히 난 아닌 거 같은데? 가슴이 뛰지도 않고, 너처럼 바보가 되지도 않았어. 그도 그럴 게 피부와 점막이 닿을 뿐이잖아?”
로맨틱한 키스를 이렇게 표현하다니 참 신하윤다운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혁은 신하윤의 마성을 좀처럼 거역할 수가 없었다.
“……하윤이 네가 나를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야.”
이혁은 일방적인 패배자였다.
신하윤의 긴 생머리와 비웃음 가득한 미소를 본 순간,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신하윤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이혁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신하윤을 향한 이혁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 가고 있었다.
“그렇구나. 마녀한테 반하다니 너도 참 미련한 인간이네.”
신하윤은 그런 이혁을 비웃으며 수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멍청한 바보 같으니 마녀를 사랑한 인간을 지켜본 게 신하윤도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다만 그 끝은 항상 좋지 않았다는 걸 기억할 뿐이었다.
“아니, 넌 모르겠지만. 하윤이 너도 변하고 있어. 네가 이 여행에 순순히 따라 와줬다는 게 그 증거잖아?”
“멋대로 생각하긴. 라플라스의 말이 궁금하긴 하지만…… 난 그저 넓은 세상이 보고 싶어졌을 뿐이야. 네 사랑놀음에 어울려주고 싶은 게 아니라.”
이혁은 마치 신하윤이라도 된 듯 여유롭게 웃었다. 오래도록 같이 있으면 서로를 닮아간다는 말은 아마 사실인 듯 보였다.
“그럼 그냥 게임이라고 생각해 줘. 먼저 반한 사람이 지는 게임.”
“그래? 그럼 네 완패인데. 말했잖아. 난 그런 감정은 느낀 적도, 느낄 수도 없다고.”
신하윤의 말은 사실이었다. 지금은 이혁의 일방적인 구애. 신하윤의 감정과 이혁의 감정은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혁은 옅은 미소를 품은 채 고개를 저었다.
“그건 모를 일이지. 지금은 하윤이 네가 이기고 있지만…… 나중 일은 알 수 없으니까.”
언제나 곁에 머물렀던 이혁은 알고 있었다.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하지만 라플라스와 신유성 사건 이후, 신하윤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그래. 재밌겠네. 어디 한번 해봐. 패배하는 건 당연히 너겠지만.”
그러니 이혁은 지금의 게임이 해볼 만한 승부라고 생각했다. 승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신하윤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기 위해 이 게임에 도전했다.
평생을 외로움과 싸웠을 마녀에게 유일한 지지자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