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2화
“후우…….”
진병철은 한숨을 쉬었다.
가온 아카데미의 2학년은 물론 3학년까지 통솔하고 있던 신하윤이 떠난 빈자리는 너무나 컸다.
“학생회의 일은 지금 누가 맡고 있나?”
진병철은 소해정을 보았다.
소해정은 1학년을 맡은 교사지만 사실 가장 많은 학생들과 접촉하고 있기에 신하윤의 후임자를 정하기에 적임자였다.
“……S반의 상급자 중 몇 명의 인원을 뽑아, 3일의 시간을 두고 순번제로 운영 중입니다.”
“학생회장 유력 후보는?”
“2학년 중에서 3명. 1학년 중에서도 3명입니다.”
“3학년은 곧 졸업일 테니 2학년이 유력하겠군.”
“모를 일입니다. 이번 1학년들은 기세가 남다르니까요.”
“정리된 자료가 있으면 줘보게.”
진병철이 손을 내밀자 소해정은 홀로그램으로 자료를 띄워주었다.
“2학년들은 말할 것도 없이 쟁쟁하군. 성적은 세븐넘버 출신들에 교외에서의 활동도 훌륭하고……. 물론 유성이나 아델라처럼 특출 난 학생이 맡아주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겠지.”
“학생회의 일은 헌터 활동이 힘들 정도로 바쁘니까요.”
“그래. 닭 잡는 일에 소 잡는 칼을 쓸 순 없지. 그럼 1학년은…….”
진병철은 나머지 1학년들의 자료도 슥슥- 훑어보았다.
“S반의 이채현. 음, 본 적 있는 얼굴이야. A반의 박수현……. 유명한 기업의 아들이라지? 그리고 마지막은……. 음? 으음!?”
“A반의 에이미 로즈입니다. 잊으신 건 아니겠죠?”
“아니 잊을 리가 있나!? 에이미 얘가 무슨 학생회장을 한단 말인가! 평소에도 학교엔 코빼기도 안 보이는데!”
“기본적으로 학생회장 선거는 투표니까요. 주변은 물론 대외적으로도 인기가 많은 학생이니……. 음 재미나 흥미 본위의 가벼운 마음으로 후보에 뽑힌 게 아닐까 생각 중입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에이미는 좀 아니지 않은가. 일단……. 신하윤이랑은 좀 이미지가 많이 다르고.”
기본적으로 신하윤은 학생회장의 지위 이전에 감히 범접하지 못할 카리스마가 있었다. 학생회장이 아니었을 때도 신하윤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거스르는 학생은 없었다.
그게 바로 통솔자로서의 재능.
‘반면 에이미는…….’
진병철은 홀로그램 속 에이미의 얼굴을 보았다. 밝게 웃고 있어 보기는 좋지만 어딘가 묘하게 멍청해 보였다. 일을 잘 처리할 것 같지도 않았고 카리스마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까놓고 말해서 에이미 같은 애가 회장이 되면 학생들이 말이나 듣겠는가?”
진병철은 이건 아니라고 확신했다. 방송인이나 연예인으로서의 재능은 인정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학생회장 감은 아니었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 에이미는 신유성의 파티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에이미가 갑자기 학생회장에 출마한 이유가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는 말은…….”
무언가 깨달은 진병철의 표정에 소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외적으로 바쁜 신유성 학생이 자신을 대신해 에이미 학생을 학생회장 자리에 앉히고…… 에이미를 통해 아카데미를 컨트롤 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죠.”
“유성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지. 순진한 척 굴어도 야망이 보통이 아니야……. 권왕도 울고 갈 야심가이니 말일세.”
그렇게 생각하니 진병철의 머리에선 지금까지 풀리지 않던 퍼즐이 들어맞기 시작했다.
‘신유성과 아델라가 학생회장 자리에 출마하지 않은 이유도 모두 설명이 되는 군…….’
어찌 보면 신유성처럼 바쁘게 활동하는 헌터에게 학생회장 자리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리를 챙기며 책임의 무게는 에이미를 통해 희석시키다니 진병철은 신유성의 혜안에 감탄했다.
“소해정 교수. 자네 말이 맞는 듯 하네. 누나를 해임시키자마자 그 자리에 자기 사람을 앉히다니 순진한 척 굴어도 유성이는 역시 무서운 녀석이야…….”
진병철과 소해정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둘의 오해는 좋은 쪽으로 깊어지는 모양이었다.
* * *
아직 겨울 방학이 끝나지 않았음에도 교내에서 밀린 일 처리를 하고 있던 여학생들은 갑작스런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래서 하윤이도 이혁도 나간 마당에 다음 학생회장은 누가 될까?”
“다음 회장도 무조건 우리 2학년이지. 세븐 넘버만 3명인데 그 중에선 유명 길드 후보도 있고……. 일본의 6급 헌터가 초대했다던 걔도 있잖아.”
“6급 헌터가 길드로 초대했다고? 아~ 아아~ 들은 거 같다. 그 자칭 심안?”
쇼이치의 시그니처인 벽에 등대고 기대기를 흉내 내며 여학생 중 한 명이 깔깔거리자, 맞은 편에 앉은 여학생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자칭이라니! 그리고 쇼이치 씨가 웃겨? 왜 갑자기 놀리는데?”
방금 화를 낸 건 2학년 중에서도 쇼이치의 광팬으로 손꼽히는 이설아라는 여학생이었다.
“아니 기자 회견에서 이상한 소리를 하질 않나 솔직히 웃기잖아.”
“아~ 나는…… 바람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거?”
“아니, 다음 공략 예정 던전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바람을 따라 움직일 뿐이라니…….”
하지만 아무리 이설아가 쇼이치를 두둔하려 애써도 다른 2명의 여학생들이 낄낄거리며 웃자. 이설아는 자신이 모욕당한 듯 얼굴이 붉어졌다.
“머, 머리가 이상한 게 아니라 쇼이치 씨는 서정적인 거야……. 그, 그러니까 자신만의 표현으로 대답을 하시는 거라고…….”
“야, 얘 있을 땐 그러지 마. 우리 설아가 쇼이치 씨한테 얼마나 진심인데.”
심안 헌터 쇼이치를 주제로 때아닌 논쟁이 펼쳐진 그 순간 갑자기 누군가 문을 열고 등장했다.
“……헌터는 실력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관심과 사랑도 중요한 법! 그러기 위해선 캐릭터가 필요하죠.”
목소리의 주인공은 핑크빛 머리카락을 트윈테일로 묶은 에이미였다. 에이미는 아무도 묻지 않은 주제로 갑작스레 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쇼이치 씨의 캐릭터는 꽤 훌륭했어요. 기자 회견은 물론이고 평소에도 뱉는 엉뚱한 답변들 덕분에 다른 헌터보다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으니까요. 덕분에 광고는 물론 자신의 길드도 승승장구!”
“마, 맞아! 내가 말하려던 게 저거야! 얼마나 똑똑하신 분인데? 그런 엉뚱한 면까지 계획이 있으신 거라고!”
“그럼요. 대외적인 이미지랑 다르게 쇼이치 씨는 엄청 똑똑한 분이니까요. 흠! 따지자면 곰인 척하는 여우에 가깝다고 할까?”
이설아는 에이미의 변호가 마음에 들었는지 남들 몰래 윙크까지 날리며 호감을 보였다.
그러나 에이미는 둘의 관계에 사기적인 인맥을 통해 화룡정점을 찍었다.
“선배가 원하시면 만나게 해드릴 수 있어요! 쇼이치 씨를 직접! 가온의 직속 선배에게만 해드리는 저 에이미의 파격 혜택!”
“뭐어!? 쇼, 쇼이치 씨를!?”
어안이 벙벙해진 이설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다른 여학생들은 에이미의 말이 진짜인지 눈치를 살폈다.
“진짜 그게 가능해?”
“아무리 에이미 너라도…… 상대는 6급 헌터인데. 게다가 사는 곳도 일본이고…….”
“에이 좀 있으면 촬영 때문에 한국에 들른다던데요? 저랑 같은 방송에 나올 예정인데요 뭐! 짜잔! 이건 미리 받은 선물!”
슥-
에이미는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건 바로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포켓용 아크릴 키링이었다. 심지어 무서운 사실은 마치 이 모든 전개를 예상했다는 듯 키링에는 이설아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 이건…….”
“사실 저 이미 소식을 들었었거든요! 설아 선배님이 쇼이치 씨의 엄청난 빅팬이라는……. 이건 그 소식을 듣자마자 준비한 저의 선물!”
지금까지의 방송계 활동으로 다져진 에미미의 사회생활 레벨은 이미 만렙이었다. 감동한 이설아는 눈물까지 훌쩍거리며 손을 떨었다.
“고, 고마워.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설아 선배님이 쓰신 신문부 글은 모두 읽어 봤거든요. 저, 무척 팬이에요!”
“내 글을…… 전부?”
“선배님은 물론이고 신문부에서 나온 글은 기사도 칼럼도 전부요! 그러니까, 다음 촬영에 쇼이치 씨도 같이 만나러 가요!”
에이미의 이야기에 감동한 이설아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 설아 성불하겠구나…….”
옆에 있던 여학생의 말처럼 이설아는 정말 성불해버렸다.
“응, 정말, 정말…… 고마워!”
임무를 끝낸 에이미는 곧 신문부에서 나왔다. 그리곤 소악마처럼 쿄쿄- 하고 웃었다.
“후후후후- 캬하하하하!”
그리곤 곧이어 마치 세계 정복을 꿈꾸는 악당처럼 크게 웃어젖혔다.
야망의 소녀. 에이미는 과연 어디까지 예상한 것일까?
[에이미 로즈! 가온 아카데미의 가장 유력한 학생회장 후보!]
[로즈가문의 막내인 그녀에 관해 우리가 몰랐던 사실!]
[귀여운 외모에 감춰진 엄청난 실력! 리벨리온의 멤버조차 혼자 막아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온의 교내에는 신문부의 실세 이설아가 써낸 교내 신문이 쏟아져 나왔다. 놀라운 사실은 모든 내용이 하나같이 에이미에 관해 칭찬 일색이었다.
“가온 내부는 이걸로 됐고, 다음은 시민 투표인가? 뭐, 시민 투표도 40%나 영향력을 주니까. 놓칠 수 없지!”
에이미는 웃었다.
“에헤헤헤-”
매운 떡볶이를 집어 먹으며 무섭게 웃었다.
“에헷, 헤헤헤-”
매운 떡볶이처럼 가온 아카데미를 집어 삼키기 위한 에이미의 야망은 이제 시작이었다.
* * *
김은아는 꿈을 꾸었다.
호화로운 결혼식장에서 자신은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정장 차림의 신유성.
‘여기까진 정상인데…….’
신유성의 옆에는 아델라와 스미레가 있었다. 아니 벨벳도 있었다. 이건 따지고 보자면 행복한 꿈일까, 악몽일까.
“아니 이게 뭔 개꿈이야!”
김은아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꿈에서 깬 김은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스미레의 동생들은 좁은 단칸방안에 옹기종기 모여 잘도 자고 있었다.
하지만 방에는 있어야 할 신유성과 스미레가 없었다.
‘……유성이도 스미레도 없네?’
잠이 덜 깬 상태로 김은아는 조심스레 방안에서 걸어 나왔다. 창가로 스며든 달빛 덕분에 불을 켜지 않아도 방안은 훤히 보였다.
낡은 계단을 걸어 내려가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잠을 깨게 만들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그때 벽 너머에서 스미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아 씨가 저렇게 빨리 적응해주실 줄은 몰랐어요.”
“그렇지 확실히 은아가 지내던 저택보단 불편했을 테니까.”
이번에 들린 건 신유성의 목소리였다. 김은아는 훔쳐 들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둘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그런데도 은아 씨는……. 하루 종일 웃어 주셔서 엄청 감사했어요.”
김은아는 단둘이 남은 이런 순간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스미레의 말에 생각이 깊어졌다.
김은아는 한 번도 저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자신은 그저 스미레에게 신유성을 뺏길까 봐 초조했을 뿐이었다.
좀 더 스미레보다 신유성과 같이 있고 싶고,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모습을 보면 괜히 질투하게 됐다. 유치해도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신유성을 좋아하니까.
하지만 스미레는 그런 순간에도 김은아를 걱정했다.
후우-
긴 한숨을 뱉어낸 김은아는 기척을 내며 벽 너머로 걸어갔다.
“야, 뭔 얘기를 그렇게 하는데. 둘만 슬그머니 밖에 나와선…….”
함께 달을 올려다보던 스미레와 신유성은 김은아를 보며 싱긋 웃어보였다.
“은아 씨!”
“기뻐하지 마. 스미레 넌 너무 착해. 난 방해하러 온 거라고.”
“네, 네엣? 헤헤…….”
김은아는 딱 붙어 있는 신유성과 스미레를 보았다. 평소라면 당연한 듯 신유성과 스미레의 틈에 끼어 둘 사이를 벌려 놓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스윽-
김은아는 신유성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섰다. 왼쪽에는 스미레를 오른쪽에는 자신을 두고 신유성의 옆자리를 공유했다.
“이 야밤에, 같이 달이나 올려다 보고. 둘 다 로맨틱해……. 아주?”
이렇게 빈정거려도 김은아는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아니야. 달보다는 바람이 쐬고 싶었어. 물론……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김은아는 자신의 마음을 알기나 하는 건지 아무렇지 않게 웃는 신유성의 얼굴을 보았다.
아무리 사랑이 좋아하면 지는 거라지만 자신은 너무 많이 져버린 게 아닐까?
“그래. 다음에는 자고 있으면 깨워서라도 같이 바람 쐬러 가. 이렇게 셋이서…… 알겠지? 몰래 나가는 건 이번만 봐주는 거야.”
김은아는 한숨을 쉬며 신유성의 손을 잡았다. 반대쪽 신유성의 손은 스미레가 잡고 있을지, 아주 잠깐 궁금했지만 그런 건 잊기로 했다.
“그럼 은아도 일어 났으니 함께 산책이나 할까?”
“네! 밤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어요! 여기 지리는 제가 자신 있으니까요!”
“그래. 가자 가~”
지금은 습기를 품은 밤공기가 무척 상쾌하고 달이 밝다는 게 중요한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