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0화
좁은 곳에 3명이 오순도순 갇힌 새장 같은 방.
‘정말 이런 게 집?’
김은아가 알고 있는 욕실과는 전혀 거리가 먼 화장실을 보며 김은아는 생각했다.
‘정말 이런 곳에서 산다고?’
이런 곳에서 사람이 살 수 있다니 그것도 몇 명씩이나 살고 있다니 김은아는 믿을 수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잘못된 거지?’
처음부터 잘못된 것 같진 않았다. 그냥 평범한 초대였으니까. 분명 스미레도 이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가족들이 보고 싶다고 하네요. 요즘, 제가 받은 지원금 덕분에 집의 상황이 엄청 좋아졌다고……. 꼭 보여주고 싶다고도 해서…….]
그런 스미레를 일본까지 혼자 보내는 것도 정이 없지 않은가? 신유성과 단둘이 보내는 건 더더욱 안 될 일이지 않은가?
[그럼 우리도 같이 가자! 난 스미레 네 집은 가 본 적 없으니까. 인사도 할 겸.]
김은아는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대답했을 뿐이다. 번쩍번쩍한 대저택을 생각한 건 아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안녕. 예쁜 누나! 엄마가 간식을 준비할 때까지 여기 앉아서 기다리면 돼!”
김은아는 자칭 스미레의 남동생이라는 스이토가 내민 방석을 보았다. 헤지고 헤져서 도저히 쓸 수 없어 보이는 방석을 몇 번이나 꿰매서 누더기 같은 모양새였다.
‘……신종 놀리기인가?’
어떻게 이런 방석에 앉으라는 거지? 설마 놀리는 건가? 방석이 낡으면 새로 사면 되건만 이 방석은 스이토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다.
“어, 으응…… 고마워.”
김은아는 쭈뼛거리며 스이토가 내민 방석에 앉았다. 김은아는 이 방석이 스이토보다 나이가 많아 보인다는 생각을 취소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이 방석은 김은아보다 나이가 많은 모양이었다.
‘……그냥 앉은 것만으로 방석이 찢어지려고 하는데?’
그러나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저기 이, 이름이 뭐랬더라?”
“나? 스이토.”
“어, 그래…… 그, 방 천장에 있는 저 구멍은 뭐야?”
“아 저거! 흠, 언제였더라. 막내 녀석이 던진 야구공 때문이었나?”
스이토는 기억을 더듬으며 턱을 붙잡고 고민했지만 김은아는 정체 불명의 구멍이 왜 천장에 생겼는지 물은 게 아니었다.
“……그냥 저렇게 두는 거야?”
왜 구멍까지 뚫린 천장을 아직까지 남겨 뒀는지 묻고 있었다.
“그렇지? 가끔 비가 오는 날은 물이 새긴 하는데. 그럴 땐 양동이를 받쳐두면 되니까.”
“……방에 양동이를 받쳐 둬?”
설상가상인 스이토의 대답에 김은아는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저, 정말?”
“엉, 두 개 정도만 받쳐두면 돼. 얼마나 듣기 좋은데?”
정작 이 상황이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는 스이토를 보니 김은아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그렇구나…….”
그래. 더 이상 구멍 이야기는 꺼내지 말자. 이 집에서 저 정도는 스이토의 말처럼 아무렇지 않은 게 상식이라고 생각하자.
김은아는 그렇게 스스로를 마인드 컨트롤하고 있었건만 스이토는 더 충격적인 말을 꺼냈다.
“뭐 문제가 있다면 오히려 쥐나 벌레일까?”
“지잇…… 아니, 쥐랑 벌레!?
얼마나 놀랐는지 김은아가 발음까지 새며 당황하자 옆에 앉아 있던 귀여운 소녀 스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후, 지금은 겨울이라 괜찮은데. 여름에는 저 구멍으로 진짜 날벌레 같은 게 들어와서 진짜 고생이었지.”
그러나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근데 원래 스미레가 지내던 방은 어디 있어?”
김은아는 이 장소가 손님을 모시는 방이고 당연히 스미레의 방은 따로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물었지만 스이토는 그게 신기하다는 듯 대답했다.
“엉? 누나도 여기서 살았는데? 지금은 3명이서 자고 누나가 있을 땐 4명 다 여기서 지냈어.”
“맞아. 언니가 있을 땐 북적북적한 게 기분 좋았지…….”
마치 그게 좋은 시절이라는 듯 과거를 회상하는 스구하를 보니 김은아는 상식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자기…… 방이 없다고? 내 옷장 하나보다 좁은 곳에서…… 3명이 지낸다고?’
지금까지 김은아가 살아온 현실과 정반대의 삶을 보며 김은아는 멍한 얼굴이 됐다. ‘충격’이라는 단어보다는 그저 힘이 심하게 빠진 듯 보였다.
“저어, 예쁜 언니 기다리는 동안 이거라도 마시세요.”
마침 그런 김은아를 위해 스구하는 언제 준비했는지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녹차와 양갱을 쟁반에 담아 가져왔다.
“손님 접대용 간식이라니 이거 정말 제대로인 느낌이네. 스미레 누나가 가져온 돈 덕분이야……. 감동적인걸.”
김은아는 스이토의 말을 흘려들으며 작은 1인용 탁자에 놓인 녹차와 양갱을 보았다.
“어, 그, 그래. 정말 고마워…….”
스구하가 준비해준 녹차와 양갱은 겉만 보아선 전혀 문제점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긴 녹차조차 차원이 달랐다. 김은아가 입을 덴 순간 느껴진 녹차의 향은 이번에도 상식을 파괴했다.
“저기, 이거, 녹차라고?”
“그렇지. 물론 녹차 가루 1킬로에 500엔짜리 싸구려지만.”
“너 그러다 스미레 언니한테 혼나. 진짜 별말을 다 해.”
같은 무게로 치자면 금가루보다 비싼 홍차를 마시던 김은아가 1킬로에 500엔짜리 싸구려 녹차를 마신 충격은 심플했다.
그냥 김은아가 알던 녹차는 이런 게 아니었다. 억지로 입에 댄 양갱도 마찬가지였다.
“젼말, 마싯네…….”
김은아는 못 먹을 것이라도 먹은 듯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양갱을 억지로 씹어 삼켰다. 하나에 50엔짜리 양갱의 싸구려 단맛은 김은아가 말을 절게 만들었다.
“예쁜 언니가 잘 먹으니까. 보기 좋다. 엄~청! 부자라고 해서 혹시 입에 맞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또 그 와중에 스미레의 가족들은 마음씨는 왜 이렇게 착한 걸까? 김은아는 스구하와 스이토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야 맛, 있어…….”
“앵? 근데 더 안 먹어?”
“응, 충분해……. 아까 간식을 먹어서.”
“그럼 양갱은 내꺼~”
“야! 손님이 먹던 걸, 뺏어 먹으면 어떻게 해!”
“버리긴 아깝잖아~”
싸구려 양갱으로 옥신각신 싸우는 스이토와 스구하를 둔 채 김은아는 조심스레 방을 나왔다.
그리곤 조심스레 목재 계단을 통해 주방으로 내려갔다.
토도도독-
식칼로 야채를 써는 기분 좋은 소리가 들려온다. 무슨 국인지는 몰라도 주방에선 맛있는 냄새가 났다.
“저기 스미레…….”
“아, 은아 씨!”
스미레는 김은아를 보자마자 썰었던 야채를 국에 넣으며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여기 앉으세요!”
“괜찮아? 요리하는 거…… 같은데 바쁜 거 아니야?”
“아니에요. 마침 준비가 끝나서 기다리기만 하면 되요!”
“그렇구나…….”
김은아와 스미레는 어딘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식탁에 마주 앉았다. 물론 먼저 운을 띄운 건 스미레였다.
“정말 오랜만에 집에 왔는데……. 많은 게 바뀌어서 다행이었어요. 새로운 세탁기도 생기고…… 접시도 새 걸로 바뀌고. 냉장고에 음식도 많아지고…… 헌터가 되길 정말 잘했다고 느껴요.”
김은아는 그런 스미레의 말을 들으며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역시 그래도 은아 씨가 지내기에는 좀 불편한 곳이죠?”
“어?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김은아는 말을 멈추고 스미레를 보았다. 그리곤 주방을 둘러보며 자신이 느끼는 게 무슨 감정인지 생각했다.
“오늘따라 머리가 복잡해서.”
“후훗, 네. 그런 날이 있죠.”
“스미레 너희 집엔 가족들이 참 많더라? 동생도 셋이나 있고.”
“네! 그래서 어릴 땐 동생을 돌보는 게 너무 바쁘고 힘든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익숙해졌는지 가끔 생각나곤 해요.”
“그렇구나. 화목하네. 우리 집은 엄마 아빠는 출장에 오빠는 아팠으니까. 얼굴 보기도 힘들었거든.”
이렇게 보니 김은아와 스미레는 다른 점이 참 많았다.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건만 이렇게 파티라는 이름으로 묶여 함께 지내고 있었다.
“아, 생각보다 국이 빨리 끓네요. 불을 조절해야겠어요!”
후다닥-
김은아는 갑작스레 주방 앞으로 달려가 가스 불을 조절하는 스미레의 뒷모습을 보았다.
“저기, 스미레…….”
그런 스미레를 나지막이 불렀다.
“네?”
스미레는 가스불을 조절했다. 주방을 보았다. 어느 때처럼 요리를 했다.
“유성이, 좋아해?”
김은아의 입에서 나온 건 짤막하고 강렬한 질문이었다. 그게 오늘일지는 몰랐을 뿐 언젠가는 김은아가 스미레에게 물어야 했던 말이었다.
“……네. 무척.”
“그래? ……역시 그렇구나.”
스미레는 다시 김은아와 마주 보고 앉았다. 신유성이 아버지와 목욕탕에 간 지금이 진솔한 대화를 나눌 최고의 순간이라 생각했다.
“처음에는 그냥, 유성 씨는 저랑은 거리가 먼…… 무척 대단하신분이고만 생각했어요. 유성 씨는 상냥하고 멋지니까.”
“알지. 착해. 잘 생겼고.”
김은아는 그런 스미레의 말이 사실이라는 듯 순순히 인정하며 웃었다.
“그런데……. 이제 저에게 유성 씨는 상냥하고 멋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스미레의 진지한 목소리에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도 모른 채 검지로 빙글빙글- 테이블을 매만졌다.
“응. 알 거 같아. ……유성이가, 유성이라서 좋은 거지? 상냥하고 멋져서가 아니라.”
김은아는 스미레가 자신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스미레의 기분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건 자신이었다.
“정말 큰일이네…….”
김은아는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곤 약간의 걱정과 진심을 담아 스미레를 보며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어. 유성이를 가지고 싶은 내 마음이, 너랑 달리 단순히 흥미면 어쩔까 하고…… 난 변덕이 심하니까.”
언제나 일편단심인 스미레와 달리 김은아는 자신이 애정 표현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데다, 솔직하지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솔직함을 빙자한 질투일지 몰랐다.
“……아마 아닐 거예요.”
그러나 스미레는 오히려 그런 김은아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연적이라 불릴만한 김은아의 감정이 ‘진짜’라고 인정해주었다.
“제가 지켜본 은아 씨는 유성 씨를 엄청 좋아 하시니까요.”
“바보야. 이럴 땐, 맞장구 쳐야지. 그래야 유리한 거 아냐?”
김은아가 풋- 하고 웃자 스미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짓은 못해요. 은아 씨가 얼마나 유성 씨를 좋아하는지 알고 있으니까.”
빙글빙글- 애꿎은 검지만 테이블 위에서 돌리던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김은아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정리했다. 지금까지 가온에서 본 신유성을, 그리고 과거에서 본 5살의 어린 신유성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해준 칭찬과 바보 같이 해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아마 스미레라고 다를 건 없을 것이다. 자신과 똑같은, 어쩌면 더 큰 기쁨을 느끼고, 더 큰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 몰랐다.
그러니 김은아는 스미레에게 포기하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옛날 같아선 [넌 나한테 상대가 안 돼!] 같은 말을 자신만만하게 했겠지만 지금은 그러지 못했다.
“알 거 같아.”
그저, 하얗고 기다란 검지를 여전히 테이블 위에서 빙글빙글- 돌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