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9화
신유성은 지금까지 겪었던 이야기와 여기 오기까지의 과정을 말해주었다. 지루할 법도 한 긴 이야기였지만 원래도 로렐라이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좋아하는 독서광.
“……정말 흥미롭네요. 인형과 드래곤의 우정이라.”
로렐라이는 듣는 내내 너무 흥미롭다는 얼굴로 신유성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결국 인형의 영혼을 부활시키고 싶다는 말씀이시군요.”
“오르카는 벨벳에게 절대 바꿀 수 없는 친구거든. 결국 글래스 하트에 봉인된 이유도 벨벳을 구하기 위해서니까. 절대 모른 척할 수 없어.”
“물론…… 그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로렐라이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사물에 깃든 영혼을 다룸에 있어 스승님보다 능통하신 분은 없으세요. 스승님이라면 분명 가능한 일이겠죠.”
게다가 봉인이 되자마자 바로 찾아온 것도 청신호였다. 물건에 깃든 영혼은 빠르게 인격이 지워진다. 기껏해야 주어진 시간은 일주일 정도일까?
며칠 만에 스승님을 찾아왔다는 사실은 그 ‘오르카’라는 인형의 영혼을 복구할 가능성을 높여주었다.
“하지만…… 스승님이 승낙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건 쉽지 않을 겁니다.”
“로렐라이 넌 뭔가 알고 있구나.”
“저는 지금까지 스승님을 지켜본 제자. 이번과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때 그분이 어떤 판단을 내리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무르익어갈 즘 마침 로렐라이에게 홍차를 따라주러 한 명의 골렘이 걸어왔다. 기껏해야 10살 남짓한 어린 미소년이지만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살벌한 분위기가 있었다.
“저 아이는 원래 검이었습니다.”
“검?”
“네 영국의 유명한 헌터가 지닌 검이었죠. 수없이 많은 괴수를 베어낸 명검이었습니다. 그 헌터의 유일한 친구였고, 목숨보다 소중히 여긴 검이었죠.”
그 헌터는 목숨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마녀에게 그 검을 맡겼다. 이 검은 정말 자신의 친구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저와 함께 수없이 몬스터를 베어냈으니……. 그 힘든 여정을 언제나 함께했으니……. 이만 쉬었으면 좋겠어요.]
이젠 평안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부디…… 아리스 님이 맡아주세요.]
이 골렘만이 아니었다. 저택에 있는 골렘들은 제각기 다른 사연이 있었고, 로렐라이는 그 모든 사연을 알고 있었다.
“저 아이뿐만이 아닙니다. 당신도 들어오실 때 입구에서 머리가 긴 소녀를 보셨겠죠. 그 아이의 영혼은 불치병이 걸린 소녀입니다.”
“……불치병?”
“네 태어날 때부터 걸린 불치병으로 죽었죠. 그 아이의 소원은 2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것. 아리스 님은 그 아이의 영혼을 추출해 골렘으로 만드셨습니다. 그 소원대로 20번째 생일을 맞이하는 날 움직임을 멈추겠죠.”
신유성은 로렐라이의 말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이들의 이야기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었다.
“저의 스승이지만 아리스 님은 변덕스럽습니다. 어떤 선택을 내리실지 좀처럼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유성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의 이야기만으로 아리스의 대답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로렐라이. 이번 일은 절대 아리스 님의 변덕에 맡길 수 없어.”
그러니 신유성은 간절하게 로렐라이의 손을 붙잡고 부탁했다.
“오르카에겐 기껏해야 며칠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어. 이번에 설득하지 못한다면…….”
신유성은 로렐라이를 향해 몸까지 밀어붙였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이 가까워지고 간절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치자 로렐라이는 얼굴을 붉혔다.
“……무, 물론. 스승님도 약점은 있으십니다.”
“약점?”
로렐라이는 뒤로 물러나 퍼뜩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이 뛰는 걸 보면 신유성이 좋지만 역시 이런 경험은 심장에 나쁘다고 생각했다.
“네, 약점. 스승님은 스스로를 무감하고 냉혈하다 표현하시지만 대외적으로 비치시는 모습과 달리 실은…….”
스승의 성격이나 약점을 이렇게 낱낱이 신유성에게 말해주어도 되는 걸까? 신유성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로렐라이는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간절한 신유성의 눈빛 공세에 이내 로렐라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감성을 자극하는 것에…… 아주 약하신 분입니다. 만약 아리스 님이 손수건을 꺼낸다면 성공률은 5할. 그분께서 눈물을 흘리신다면 성공률은 9할…….”
아리스는 사물이나, 인간을 무작정 골렘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녀 나름에 이유와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승부처는 오르카와 벨벳의 이야기가.
“그렇구나…….”
아리스에게 먹히는지였다.
* * *
모닥불이 피워진 난로와 불길함을 상징하는 검은색 고양이, 게다가 수정구슬까지 놓인 아리스의 방은 마녀의 방이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이런 비밀스러운 장소에 신유성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리스의 동료이자 첫사랑인 권왕의 제자기 때문.
“……후훗, 재밌는 일이네. 이 저택에 널 보게 될 줄이야. 그래서 방문한 이유는?”
아리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웃자 신유성은 글래스 하트를 포켓에서 꺼냈다.
“아리스 님이라면 이미 들으셨겠지만……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그럼 알지. 들어오면서 집사장을 보았지? 그 녀석 마음을 읽을 수 있거든. 네가 무슨 부탁을 할지 정도는 이미 들었단다.”
“그럼…….”
하지만 마녀 아리스는 신유성이 무슨 부탁을 할지 안다고 했지 들어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결국 로렐라이의 경고처럼 변덕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아무리 원학이의 제자라도 그 부탁은 거절할게. 아무 영혼이나 집어다 골렘을 빚고 싶진 않아. 마녀에겐 나름의 철학이 있거든. 그리고……. 내가 부탁을 들어줄 이유도 없잖아?”
전설의 헌터인 아리스가 이렇게 답한 이상. 협상의 여지는 없다. 보통의 헌터라면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에겐 비장의 카드가 있었다.
“협회장님께선 아리스 님이 그리 대답하시면 이 사진을 보여주라 하셨습니다.”
신유성은 강유찬이 준 사진을 내밀었다. 사진을 본 아리스는 표정 변화가 있진 않았지만 흠- 하는 짧은 감탄사를 입 밖으로 냈다.
“너에게 길을 알려준 게 강유찬이었구나. 하지만 어쩌지. 그 녀석이랑 한 약속은 유효기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단다.”
아리스의 말은 그 사진만으로 부탁을 들어주기엔 교환이 맞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봉인된 영혼을 꺼내 사물에 넣는다는 건 큰일이다. 빚의 크기가 달랐다.
하지만 다행히 신유성에겐 또 하나의 무기가 있었다.
“그리고 이것…….”
그건 바로 아덴이 준 정체불명의 회중시계. 아리스는 이번만큼은 표정의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회중시계를 받아들었다.
“너 이건…….”
“아덴 님께선 이 시계를 주며 이번엔 아리스 님이 약속을 지킬 차례라고 하셨습니다.”
아리스는 아덴에게 이 회중시계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이건 아덴의 아내가 남긴 유품이었으니까. 아덴이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곁에서 지켜보았다.
아덴은 그런 소중한 물건을 신유성에게 주었다. 그게 무슨 의미일까? 심지어 ‘약속’까지 언급했다.
“약속을 지킬 차례라…….”
아리스는 한동안 침묵했다.
나이를 먹어서일까? 언제 이렇게 감상적인 여자가 되어버린 걸까. 아리스는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 정돈 들어봐 줄게. 그 유리에 담긴 영혼은 누구 것인지. 딱 그 정도는 말이야.”
신유성은 힘든 여정이지만 자신의 차례가 왔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강유찬과 아덴의 도움 덕분에 아리스는 조금이나마 신유성에게 마음을 연 모양이었다.
“아리스 님이라면 물건에서 영혼의 기억을 읽는 건 간단한 일. 이럴 때는…… 백번의 말보다. 직접 보시는 게 빠르시겠죠.”
아리스는 신유성의 말처럼 그쪽이 편한 듯 손을 내밀었다. 그건 직접 오르카와 벨벳의 기억을 읽어보겠다는 뜻.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구경해볼까?”
위잉-!
아리스가 글래스 하트에 손을 올리자 방에 놓인 수정구가 빛을 내며 벨벳과 오르카의 모습을 영사기처럼 틀어주기 시작했다.
이야기의 첫 시작은 강가였다.
[작은 주인님. 저도 따라서 줍긴 주웠습니다만 돌을 줍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요?]
[캬항~! 반짝반짝하는 게 예쁘잖아! 황금이나 보석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함께 돌을 줍고 방을 꾸미고.
[호곡.]
그걸 가져다 팔고.
[……벨벳은 이제 부자야.]
함께 노는 벨벳과 오르카의 모습을 보며 아리스는 웃고 말았다.
“이 드래곤이 네 딸이란 말이지? 재미있는 아이구나. 후훗…….”
함께 동화책을 읽고, 모험을 떠나는 벨벳과 오르카의 우정은 꽤 깊었다. 아리스는 몇 시간에 걸친 둘의 여행을 재미있다는 듯 계속 시청하였다.
하지만 결국 벨벳이 신하윤에게 잡힌 순간 이야기의 흐름은 변화했다.
[난 너에게 화를 내야 해. 넌 작은 주인님에게…… 내 소중한 친구에게 나쁜 짓을 한 사람이니까.]
버림받았던 장난감.
토이킹의 변화한 생각.
[넌 평생 모를걸? 누구도 믿지 못하고, 친구 하나 없는 가여운 바보니까!]
[……이 망할 쓰레기가!]
[아니, 후회는 없다! 잘 봐둬! 나 토이킹은 작은 주인님의 친구! 오르카로 죽는다!]
그리고 용기에 아리스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버려진 장난감이 새 주인을 만나 이렇게 변화하다니.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물론 벨벳과 오르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동요를 보인 그 순간 한 번 더 몰아쳤다.
한적한 산.
[……작은 주인님. 오르카가 아니라 토이킹입니다. 물론 지금은 범고래도 아니고 오리 인형이고요. 아이 러브 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판매됐죠.]
벨벳은 모습이 변한 오르카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친구가 여기 온다고 해써?]
[네. ……어른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어른들은 바쁘니까요. 저 같은 낡은 인형은 진작 잊어버렸겠죠.]
아리스는 자연스럽게 나누는 둘의 대화를 통해 오르카의 사연을 알게 되었다.
[작은 주인님은 돌아갈 곳이 있는걸요. 꿈에서 깨면 소중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아리스는 동감했다. 인간에게 받은 상처를 구원할 수 있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인간뿐이었다.
[저는 그 아이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을 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음, 먼데?]
[분명……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죠. 그 아이는 몸이 좋지 않은 아이였어요. 수술도 받기 전이었으니까요.]
아리스는 둘의 여정이 어디로 가는지 묵묵히 지켜보았다. 오르카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벨벳에게 무엇을 구원받았는지 지켜보았다.
같은 탑이지만 자신은 오롯이 무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도, 이런 해결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아리스는 감탄했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차라리 저를 버린 게 맞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제 생각이 바뀔 수 있었던 건 탑의 기적 덕분이고 작은 주인님과 만난 덕분이에요.]
결국 오르카는 벨벳에게 구원받았다. 아니 스스로를 구원했다. 아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손수건을 꺼냈다.
“흑, 훌쩍…… 크흥…….”
그리곤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먹먹해진 코까지 손수건에 풀었다. 이건 로렐라이가 말한 아리스의 강렬한 신호.
“아리스 님…….”
신유성은 아리스를 보았다.
이제와 어떤 말이 더 필요할까? 이젠 오직 아리스의 선택만 남겨두고 있었다.
* * *
셔셔셕- 샤샤샥-
산책을 나온 벨벳은 아델라의 옆에 누워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낙서를 하고 있었다. 언젠가 돌아올 친구를 기다리며 오르카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다 잠깐 쫑긋- 벨벳의 귀가 솟았다.
“캬, 캬항!”
벨벳은 간식 냄새를 맡은 강아지처럼 어딘가를 보았다.
“이, 이건!”
“벨벳?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델라는 걱정스럽게 보았지만 벨벳은 오히려 너무 기쁜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 느낌! 틀림업써-!”
벨벳은 무작정 달렸다. 벨벳은 알 수 있었다. 설령 상대의 모습이 변하더라도 알 수 있었다.
범고래 인형이 오리 인형으로 변하더라도 모를 리가 없었고, 범고래 인형이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더라도 모를 리 없었다.
친구를 못 알아보는 바보는 이 세상에 없으니까.
다다다-!
짧은 다리로 무작정 달린 벨벳은 검은 머리를 한 소년을 보았다. 그리곤 거리낌 없이 그 이름을 불렀다.
“오르카!”
검은 머리의 미소년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약속이 지켜졌구나. 이번 결말은 달라졌구나. 그 사실에 기뻐하며 해맑게 웃을 뿐이었다.
“역시…….”
소년은, 아니 오르카는 생각했다.
“……알아보시네요. 작은 주인님.”
자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장난감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