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영국 브리튼 제도의 최고봉.
네티스 산.
도보라 부르기도 뭣한 길이지만 좁게 난 길을 따라 걷던 신유성은 허리를 펴고 넓게 퍼진 산등성이를 보았다.
“바로 이 주변에…….”
나무로 가득 찬 녹림의 숲이 대부분인 무림산과 달리 네티스 산은 정반대로 뻥 뚫린 전경이 보기 좋은 산이었다.
“신기한 일이야. 스승님도 그 동료분도…… 모두 산을 좋아하시다니…….”
산이라는 특성상 시민들의 시선을 피해 은거하기 좋기 때문일까? 아니면 맑은 공기와 자연이 힘을 북돋워 주는 걸까?
그 내막이 뭔지는 몰라도 신유성이 올라오는 내내 네티스 산의 기운은 심상치 않았다.
8급 헌터 마녀 아리스의 아지트임에도 너무나 조용했기에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심지어 이렇게 거대한 크기를 자랑함에도 단 하나의 몬스터도 존재하지 않았다.
저벅저벅.
신유성은 마치 길이라도 있는 듯 아무것도 없는 정상을 향해 묵묵히 더 길을 걸었다.
위잉!
그 순간 발끝에 은빛의 장막이 걸쳤다. 그 장막을 몸으로 통과하자 가려졌던 현실이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나무로 된 건물. 인공 잔디가 깔린 바닥. 네티스 산에는 어울리지 않는 현대식 저택의 모습에 신유성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규모의 공간 결계가 상시로 걸려 있다니…….’
물론 신유성은 스승의 무신산을 겪었기에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무투가와 마녀는 다르다.
권왕이 마나를 다루는 방식이 오직 ‘힘’에 가깝다면 아리스가 마나를 다루는 방식은 ‘마법’이나 예술에 가까웠다.
아리스는 스킬의 도움이나 아티팩트의 도움이 없더라도 어떤 방식으로든 재해석하는 게 가능했다.
“……손님인가? 오랜만이군.”
“맞아. 오랜만이야. 로렐라이를 빼면 오는 사람은 없으니까.”
“으, 아, 아리스 님이 손님이 온다고 말씀하시진 않았는데?”
“그럼 침입자? 침입자는 우리가 처리해야 해.”
예를 들면 저택을 지키는 인간을 쏙 빼닮은 인형들도 아리스가 만들어낸 산물이었다.
“저는 아리스 님의 동료인 권왕의 제자, 신유성입니다. 아리스 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을 부탁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습니다.”
신유성은 소년 소녀처럼 생긴 골렘들에게 정중히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런가?”
“권왕? 거짓말! 그의 제자인데 전혀 닮지 않았어.”
한 골렘 소녀가 신유성의 말을 믿으려는 순간 불행히도 옆에 있던 소년이 닮지 않았다며 의심스럽다는 운을 띄웠다.
“맞아 거짓말쟁이. 권왕은 무섭게 생겼어.”
“얼굴 전혀 안 닮았어. 보물을 훔치러 온 침입자가 분명해.”
덕분에 제자인데도 전혀 ‘얼굴’이 닮지 않았다는 이상한 논리로 점점 커져가는 의심의 불씨.
“권왕의 제자라면 강하겠지.”
“맞아. 우리랑 싸워보자.”
“하지만 우리는 6급인데?”
“죽여 버릴지도 몰라…….”
“바보. 죽으면 가짜. 이기면 진짜인 거야.”
골렘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신유성을 보았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음에도 붉은 눈은 아찔한 살기를 품고 있었다.
“맞네. 지면 가짜구나. 권왕의 제자라면 약할 리 없어.”
“권왕은 아리스 님을 이겼으니까.”
“맞아. 침입자인지 확인하자.”
“……우리가 아리스 님을 위해 싸우자.”
골렘들은 어디서 났는지 도끼와 쇠사슬, 검과 창 같은 냉병기(冷兵器)를 꺼내 쥐었다.
하지만 귀여운 외모와 달리 뿜어내는 마나는 일반적인 골렘과 질을 달리했다.
신유성을 막아선 골렘들은 하나하나가 헌터 협회 지부장과 맞먹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에 본 헌터로 비교하자면 6급인 메이린과 비슷한 수준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런 골렘이 4명.’
신유성은 진심으로 자세를 잡았다. 같은 인형이라도 상대는 오르카 같은 장난감이 아니었다. 아리스가 네티스 산 주변의 몬스터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낸 일종의 마나 병기였다.
‘상처 없이 생포하는 건 무리야. 부수는 수밖에 없어.’
신유성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리스에게 부탁을 하기 위해 찾아왔는데 시작부터 그녀가 만든 골렘을 부숴야 한다니 이런 최악의 전개가 있을까?
지이잉-
살벌한 기계음을 내며 4명의 골렘은 동시에 다리의 부품이 바뀌었다. 아마 헌터 용품으로 만들어진 추진 장치 같은 걸 부품으로 사용한 모양이었다.
“미안. 너희 생각이 어떻든 난 소중한 사람을 위해 물러설 수도 도망칠 수도 없어.”
신유성은 골렘들에게 미리 사죄했다. 글래스하트에 담긴 오르카의 영혼은 영원하지 않다. 휘발성이다. 덕분에 신유성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걱정하지 마.”
“우린 아리스 님의 골렘.”
“우리 4인조는 무적이야.”
“맞아. 패배한 적이 없어.”
쾅!
소년이 던진 쇠사슬은 신유성의 다리 한쪽을 노렸고, 소녀의 할버드는 머리통을 노렸다.
그와 동시에 다른 하나의 창은 심장을, 검은 팔을 노렸다.
4명의 골렘은 정말 한 몸처럼 완벽한 합을 자랑했다. 4번의 공격이 하나의 공격처럼 느껴졌다.
‘사방에서 퍼부어지는 공격이라.’
신유성이 입고 있던 옷 위에 푸른 입자가 덧씌워졌다. 곧 모습을 드러낸 건 금박으로 그려진 흑룡과 검은 도포.
턱!
한쪽 다리를 굳건한 뿌리처럼 땅에 심은 신유성은 몸을 가볍게 회전시켜 검은 마나를 배리어처럼 둘렀다.
츠으윽-!
쇠로 쇠를 갈아버리는 살벌한 소리와 함께 마나에 닿은 냉병기들이 쇳물이 되어 녹아내렸다.
골렘 중 하나는 회전에 휘말린 쇠사슬 때문에 자세가 무너져 그 자리에 쓰러졌다.
‘일단 가까운 하나부터.’
공격을 막아낸 신유성은 하나의 콤비네이션처럼 귀여운 외모를 가진 골렘의 머리통을 향해 매섭게 손을 들었다.
합이 좋은 4인조를 이기려면 그 중 하나를 파괴하는 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골렘들은 그 무자비한 손속을 어딘가에서 본적 있었다.
“다, 닮았다!”
몬스터부터 인간형 보스에 이르기까지 아무렇지 않게 머리통을 부수는 건 권왕의 무자비한 손속 그 자체였다.
[흑룡회천(Skill) - 보유한 마나를 보호막으로 만들어 사출한다.]
이건 투신류가 아닌 흑룡포라는 아티팩트에 심어진 스킬. 상대방이 신유성의 존재를 확인하기에 상징성이 충분했다.
“우리 공격을 막아낸 저 스킬! 나 본적 있어!”
“나도 저 옷 본 거 같아…….”
심지어 여기저기서 갑자기 증언자가 속출하자 일격으로 골렘의 머리를 부수려던 신유성은 움직임을 멈췄다.
‘……안 부숴도 되나?’
그리곤 눈치를 보며 신유성이 슬쩍 4인조를 훑어보자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는 골렘들.
“우리가 무례가 많았어!”
“넌 권왕의 제자가 맞아!”
“2, 2호를 놔줘.”
“힝. 내 머리 부수지 마…….”
갑자기 골렘들이 패배를 인정하며 살려달라고 부탁하자 신유성은 괜히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모르는 사람이 상황을 보면 신유성은 10살 남짓한 소년을 때려눕히고 머리통을 내려치려는 극악무도한 악당처럼 보였다.
“아…… 미, 믿어주는 거구나.”
“훌쩍, 믿을 게……. 2호를 부수지 마. 우리 친구야.”
“맞아. 2호는 4호의 유일한 친구야. 부수지 말아 줘.”
“차라리 날 부숴…….”
“우리가 잘못했어.”
순식간에 악당처럼 되어버린 신유성은 내려치려던 손으로 목을 긁적이며 멋쩍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하지 마. 완전히 부술 생각까진 없었어. 잠깐…… 작동을 멈추려던 거야.”
그리곤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자 4인조는 경멸 어린 눈으로 신유성을 훑어보았다.
“으, 잔인해……. 권왕의 제자가 분명해.”
“권왕 그 자체야.”
“분명 생고기를…… 입으로 뜯어 먹을 거야.”
“하지만 잘생겼어. 아리스 님은 왜 무섭게 생긴 권왕을 좋아하신 걸까?”
신유성을 인정한 골렘들은 이제는 주인인 아리스의 취향에 의문을 표하기 시작했다.
“맞아. 권왕의 제자는 권왕이랑 다르게 멋져. 이 사람을 좋아한다면 이해 할 수 있어.”
“맞아! 권왕은 귀신같아. 무서워.”
“으응, 아리스 님은…… 대단하지만 취향은 이상해.”
신유성이 그저 웃으며 저택을 들어가기 위해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초대 받지 않은 손님이 오셨었군요?”
저택의 문이 열리고 유일하게 30대 여성으로 보이는 골렘이 정중히 인사를 했다.
“무례가 많았습니다. 권왕님의 제자시지요? 미리 연락을 주셨다면 자리를 마련했을 텐데요.”
“아, 죄송합니다. 연락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미안함을 표하기 위해 신유성이 머리를 숙이자 여성은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권왕의 제자인 당신이 기껏해야 골렘인 저희에게 사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신유성은 아리스가 만들어낸 골렘들이 신기했다. 눈앞의 여성도 무뚝뚝해 보이지만 정말 감정이 있는 것처럼 행동했고, 나머지 골렘들도 생각을 가진 채 성격도 개성도 제각각이었다.
“저는 0호. 아리스 님이 최초로 만들어낸 골렘이자 이 저택을 통솔하고 있지요. 음…… 하우스키퍼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0호의 등장에 문지기를 자처했던 4인의 골렘은 길을 비켰다. 덕분에 신유성은 당당히 저택으로 입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대단하시군요. 1호부터 4호는…… 5급 보스도 상처 없이 사냥이 가능한 전투형 개체. 그런 병기들을 혼자서 막아내시다니……. 원래는 전투가 아니라, 적법한 절차를 통해 입성하니까요. 이런 구경은 잘 없습니다.”
0호의 말에는 뼈가 있었다. 칭찬처럼 보이지만 마음대로 아리스의 저택에 입성한 신유성에게 주의를 주고 있었다.
“아, 미안. 이렇게 무작정 찾아와서…….”
“아까 말했듯 인간처럼 보여도 저희는 골렘. 사과하실 필요는 없건만……. 특이하신 분이군요.”
0호는 신유성이 재미있다는 듯 웃더니 방으로 안내했다.
“그럼 아리스 님이 돌아오시지 않으셨으니 죄송하지만 일단 귀빈실에서 기다리시겠습니까?”
신유성은 오르카를 구하기 위해 아리스의 도움이 필요 했다. 그러니 아리스를 만날 수만 있다면 얼마든 기다릴 수 있었다.
“먼저 오신 손님이 있으시지만. 귀빈실은 넓으니까요.”
“좋아. 기다릴게.”
신유성의 대답에 0호는 목재로 만들어진 문을 열었고, 신유성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귀빈실의 전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거대한 원형 목재 테이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난로와 그 속에서 타고 있는 마른 장작들. 괴수의 머리로 만들어진 헌팅 트로피까지 모든 게 화려한 귀빈실이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신유성의 눈을 붙잡는 건.
“아…….”
신유성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채 놀란 로렐라이의 모습.
“오랜만…… 이라기에는 금방 만났네. 로렐라이.”
덕분에 신유성은 멋쩍게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