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긴 시간은 아니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볼테라는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과거와 달라진 점이라면 마을에 눈에 띌 정도로 거대한 묘지가 있다는 점.
아델라는 묘지의 정중앙, 최고의 헌터이자 최고의 부모였던 두 분의 묘비 앞에 꽃을 내려놓았다.
“다음에도 함께 찾아올 게요.”
추운 날씨에도 어린 아이였던 그때처럼 하얀 원피스를 입고 두터운 코트를 어깨에 걸친 아델라는 예쁘게 미소 지었다.
그래. 슬픔만이 애도하는 법은 아니었다. 자신도 성장했다면 성장한 거겠지.
“오래 기다렸죠? 벨벳?”
“아니 벨벳은 엄마랑 같이 여행 와서 행보캐. 지금도 재미써.”
벨벳의 대답에 인자하게 웃은 아델라는 신유성을 돌아보았다.
“당신에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최근 바쁜 와중에……. 이렇게 동행을 요청하게 되어…….”
“아니 나도 와보고 싶었어. 여긴 아델라가 살던 곳인 걸?”
신유성을 볼테라의 전경을 살펴보았다. 공략 당시에는 몰랐지만 볼테라엔 메트로시티와는 전혀 다른 멋이 있었다.
물론 무엇보다 좋은 건 따로 있었다. 마치 중세를 떠오르게 하는 석재건물 사이를 거닐고 있자면 아델라는 하나하나 관련된 자신의 과거를 설명해주었다.
“원래 여긴…… 수작업으로 인형을 만들어주던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인형?”
“네. 저는 말수가 적어 친구가 없었거든요. 비록 인형이라도 친구를 만들어주시고 싶으셨겠죠.”
신유성은 경청하고 아델라는 평소보다 들뜬 모습으로 설명했다. 예전에 아델라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거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게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이렇게 재밌는 줄은 처음 알았다.
“그건 나랑 똑같네? 나도 친구가 없었거든. 5살까진 신오가문을 나간 적이 없으니까.”
“기회가 있었다면…… 당신은 분명 인기가 많았겠죠. 저와 달리 무척이나 따뜻한 사람이니까요.”
“그건 아델라도 마찬가지던데.”
신유성은 갑자기 아델라와 눈을 맞췄다.
“아델라도 무척 따뜻한걸. 안아봤으니까 알아.”
“……그런 의미인가요? 하지만 저는 손이 차갑다고 들었는데.”
“몸은 따뜻해.”
“그렇군요…….”
“맞아. 벨벳도 아델라 엄마랑 똑같아. 벨벳의 친구도 오르카야!”
생각해보면 억지 같지만 그래도 아델라는 자신을 닮았다고 말을 해주는 두 사람이 좋았다.
“저는 벨벳과 당신이 저와 닮았다는 말이 참 좋습니다.”
아델라의 대답을 듣고 있자면 둔한 신유성조차 알 수 있었다. 아델라는 점점 감정 표현이 늘고 있었다. 표정도 다채로워지고 차가웠던 손도 따뜻해지고 있었다.
“왜인지 알 거 같아.”
그 변화가 그저 기분 탓은 아니겠지. 인형 가게를 지나친 신유성은 볼테라의 거리를 거닐며 아까 전 이야기를 곱씹었다.
“어린 시절의 아델라를 만났다면 좋았겠네. 우린 금방 친구가 되었을 텐데.”
“괜찮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의 당신을 만났으니까요. 무척…… 귀여웠습니다.”
“캬항~ 벨벳도 귀여워.”
벨벳의 애교에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후훗- 하고 웃었다. 차가운 얼음 같았던 모습은 이제 아델라에게 없었다. 오히려 점점 미소가 잦아지는 게 보기 좋았다.
다만.
그렇게 행복한 미소를 지었음에도 아델라는 문득 신유성에게 작은 목소리로 묻곤 했다.
“……제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신유성은 그 심리를 알고 있었다. 너무 행복하기에 그 행복이 달아날까 두려워하는 사람의 심리를 알고 있었다.
그건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자신이 행복과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마음은 한눈이라도 팔면 손에 쥔 소중한 풍선이 하늘 너머로 날아갈까, 안절부절못하는 아이와 같았다.
텁-
신유성은 그런 아델라를 말없이 끌어안아주었다.
“아…….”
수련으로 다져진 두터운 손이 자신의 몸을 감싸자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흘렸다.
“아델라 넌 그럴 자격이 있어.”
신유성이 차분한 목소리로 위로해주며 따뜻한 온기를 나누어 주자 품에 안긴 아델라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예전에는 눈을 감는 게 무서웠습니다.”
눈을 감은 아델라는 어린 신유성을 떠올렸다. 바위 뒤에 숨어 슬퍼하던 신유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찌 그런 슬픈 과거를 가졌음에도 자신에게 먼저 행복을 나누어 줄 수 있었을까? 먼저 위로를 해줄 수 있었을까?
아델라에게 신유성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어떤 모습, 어떤 상황에서도 언제나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눈을 뜨면, 과거로 돌아갈까, 어린 아이가 되어 그 집에 홀로 남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이제, 달라?”
아델라는 신유성의 물음에 살짝 웃었다.
“네. 다르네요. 눈을 감으면 당신을 더 선명히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당신의 온기가 있으니, 제가 여기에 있다는 게 실감이 됩니다.”
아델라는 오늘 유독 수다스러웠던 자신을 떠올렸다. 자신은 오늘 무척 행복했구나, 신유성은 무감한 여자였던 자신이 들떠있다는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자신의 인생에서 과연 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아델라는 단연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얼음도 녹고 볼테라는 예전이 무색하게 변했지만 적어도 이 마음은 영원이었다.
아델라에게 신유성은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존재였다.
“……당신. 저를 좀 더, 세게 끌어안아 주실 수 있습니까?”
눈을 감은 아델라는 신유성에게 특이한 부탁을 했다. 덕분에 부드럽게 감싸 안았던 신유성은 이제 아델라의 팔과 가슴이 압박될 정도로 힘을 주었다.
아델라는 그 감각이 무척 좋았다.
어린아이가 풍선이 날아가지 않게 붙잡듯, 신유성이 자신을 떠나지 못하게 붙잡는 거 같아 묘한 안정이 들었다.
“……캬, 캬항.”
벨벳은 슬쩍 눈치를 살폈다. 바로 어제 스미레 엄마에 이어 아델라 엄마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사랑이 충만한 아빠가 있을까?
‘역시 아빠는 대단해.’
물론 신유성과 아델라가 서로를 느끼며 교감하고 있을 때, 벨벳은 맞은편 카페에 앉은 은발의 할아버지와 눈이 맞았다.
‘헉, 저 사람. 아델라 엄마의 할아버지야.’
상대가 누군지 눈치 챈 벨벳은 인사를 하며 손을 흔들려고 했지만 아덴은 검지를 입술에 댔다.
그리곤 지금은 신유성과 아델라를 놔두라는 듯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 * *
신유성과 이렇게 지붕에 앉아 볼테라를 내려 보고 있자니 아덴의 입가에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볼테라를 구해줘서 고맙구나. 볼테라는 내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장소란다.”
아덴은 신유성을 보았다.
신유성에게 유원학을 닮았다고 말하면 어떻게 생각할까?
물론 외면은 전혀 닮지 않았고, 유원학은 예전부터 괴팍한데다 괴짜라고 소문이 난 남자였다. 그러나 그 본연의 마음과 타인을 구하는 행동은 제자와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게 꼭 좋은 장소란 뜻은 아니란다. 나의 생각은 언제나 그 과거에 얽매여 있었지.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아델라까지도……. 계속 그 과거에 멈춰 있었어.”
그러니 아덴은 소원이 있었다.
아델라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고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그 소원이 모두 이루어졌다. 아델라는 진정으로 루이스를 극복했다. 볼테라의 어긋났던 시계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그 과거가 다시 흐르기 시작한 걸 느꼈단다. 나도 아델라의 미래를, 행복을 꿈꿀 수 있게 되었지.”
신유성은 아덴의 말처럼 볼테라를 보았다. 오늘 하루 볼테라를 걸으며 아델라가 해준 이야기들을 떠올리니 눈앞의 전경은 사뭇 달랐다. 그러니 신유성은 자신의 옆에 앉은 게 전설의 헌터가 아닌, 오랜 고민을 해결한 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덴 님과 스승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습니까?”
“믿기지 않겠지만 내게 먼저 손을 뻗은 건 그 녀석이란다. 아리스도 유찬이도 모두 그 녀석을 믿고 하나의 팀이 되었지. 우리 파티의 중심은 언제나 유원학이었어. 그리고 너는 그런 유원학을 닮았단다.”
신유성은 유원학이 가진 카리스마가 겸손이 아닌, 자신에겐 없는 재능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스승은 정말 처음 보는 타인조차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자신이 그 길을 똑같이 쫒을 필요는 없었다. 신유성에겐 유원학과 같은 카리스마는 없지만, 그 자신조차 모르는 다정한 마음이 있었다.
오늘 신유성은 그 마음의 가치를 스승의 동료인 아덴에게 인정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성아. 네가 가지고 있는 건 강한 힘만이 아니란다. 너는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단다. 운명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지.”
물론 아덴은 헌터로서 신유성이 가진 자질도 인정했다.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 건, 너의 파티만이 유일하다. 네가 만든 파티만이 유원학과 우리의 숙원을 이룰 수 있단다.”
강한 힘과 포용력.
그걸 넘어서는 ‘무언가’는 신유성과 파티원을 헌터로서 최정상에 도달하게 만들 것이다. 아덴은 그 순간 신유성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했다.
우리의 현실에 어떤 미래가 다가올지 궁금했다.
“제가 스승님을 뛰어넘으란 말씀이시군요.”
신유성의 차분한 대답에 아덴은 씁쓸함이 감도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위험한 헌터 일을 그만두고 아델라의 곁에 남기를 바란 적도 있단다. 아델라가 행복하기만 할 수 있다면 인류의 비원 같은 건…… 내게 하찮은 일이니까.”
아덴은 웃었다. 젊은 시절 자신은 신비롭고 비밀스런 노인이 될 줄 알았건만 지금 보니 손녀밖에 모르는 참 솔직한 노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 세상에서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다.”
신유성은 아덴의 말에 차분해지려 감정을 억눌렀다. 아덴에게 인정받는 건 마치 스승님에게 인정받는 것 같았다.
“물론…… 나와 달리 아리스는 심술을 부릴 수도 있단다. 유원학한테 데인 게 많기 때문이지.”
지금까지 진지했던 아덴이 하하하- 하고 신사답게 웃자, 신유성의 표정에는 걱정이 어렸다.
“제가 아리스 님을 찾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군요.”
“그래. 내가 알려준다면 아리스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하지만 아리스가 네 부탁을 들어줄지는 나도 모르겠구나. 아리스는 변덕이 심하거든.”
신유성의 부탁이 무엇이든 아리스는 그에 합당한 대가를 원하겠지. 아덴은 아리스가 자신의 부탁이라고 무작정 들어줄 위인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답은 있단다.”
그러나 역시 동료답게 아덴은 이번 사건의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그것도 오직 유성이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신유성은 그제야 얼굴이 밝아졌다. 아덴의 정보를 통해 아리스의 도움을 얻는다면 벨벳의 소원처럼 오르카를 되살리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따지자면 오르카도 사물에 영혼이 깃든 일종의 골렘이다. 이 분야에서 마녀라 칭해지는 아리스보다 정통한 사람은 없었다.
“부디, 알려주십시오!”
신유성이 기뻐하며 눈을 빛내자 아덴은 또 하하하- 하고 호탕하게 웃어보였다.
“물론! 알려주지! 사위가 될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누구의 부탁을 들어주겠나?”
다만 아덴은 조금은 앞서나간 말을 하며 신유성의 손을 꼭- 아주 강하게 붙잡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이제 학생에 불과한 신유성을 사위 삼을 생각을 하다니? 아덴의 생각은 너무 급진적이었다.
하지만 아덴은 알고 있었다.
아델라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건 오직 신유성뿐이라는 걸. 그러니 욕심을 부려서라도 그런 상대를 놓칠 순 없었다.
아델라를 위해서라면 신사적인 아덴도 무슨 짓이든 벌일 각오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