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신유성에게 명품 가구를 구분하는 눈은 없었다. 하지만 김은아의 숙소에 있는 가구들은 세븐넘버의 숙소 중에서도 단연 특별했다.
일반인들은 그 가격만 들어도 손가락이 떨릴 정도의 고가품들.
‘은아의 숙소까지 직접 찾아온 건 오랜만이네…….’
심지어 김은아의 숙소는 방의 크기도 넓었다. 부실에 비견될 만한 넓은 거실을 지나 침실까지 걷고 있으니 이 정도면 특실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김은아가 자고 있을까 신유성이 조심스레 문을 열자.
“흐으, 유성아~ 왔구나~”
김은아는 죽어가는 곡소리를 내며 신유성을 반겼다.
“으, 은아야 괜찮아?”
아프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지만 막상 김은아의 붉어진 얼굴을 보니 신유성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하얀 피부에 도드라진 붉은 홍조를 보고 있자면 큰 열병이라도 걸린 듯 보였다.
“괜찮아…….”
하지만 김은아의 병명은 단순 감기였다. 헌터들은 일반인보다 잔병치레가 적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한 번 병에 걸리면 크게 고생했다.
“저, 정말 괜찮아? 얼굴이 엄청 붉은데…….”
“콜록콜록! 그냥 감기래……. 별 거 아니야…….”
신유성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김은아의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뜨거운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는 열기가 느껴졌다.
‘……걱정할 정도는 아닌가?’
하지만 신유성이 안도하려던 그 순간 김은아는 죽는 소리를 냈다.
“유성아, 나 죽어……. 머리, 엄청 뜨겁지?”
“어, 응. 뜨거운 거 같아.”
사실 신유성은 이렇게 말해도 그리 걱정하지는 않았다. 온도로 치자면 37도 정도일까?
따지자면 미열 정도로 심각한 상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나 어제 무리했나 봐. 몸살도 났어. 아까, 잠깐 일어났는데…… 엄청 아픈 거 있지?”
김은아는 아프다고 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티를 내지 않는 쪽에 가까웠다. 그러나 오늘은 유독 흔한 감기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몸살이라면…… 특정 부위에 마나가 뭉쳤을 수도 있겠네. 정상적으로 한번 발휘된 마나가 순환이 막히면 빠져 나올 동안은 통증을 느끼게 되거든.”
김은아는 심각하게 고민 중인 신유성의 모습이 답답한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바보야 그게 중요해? 나~ 아프다구~”
목소리가 잠긴 탓에 오늘따라 유독 간드러지는 김은아의 목소리. 열기 때문에 얼굴도 붉고, 묘하게 애교가 있는 모습이 연회에서 본 김은아와 같았다.
물론 알코올이 들어간 티라미수를 먹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김은아는 몸에 열이 오르면 애교가 늘어나는 듯 보였다.
‘……무방비한 은아는 이런 성격이구나. 사실 이게 진짜 모습인 걸까?’
신유성은 옅게 미소 지으며 물수건을 갈아주었다. 김은아가 아픈 오늘만큼은 어떤 어리광도 다 받아줄 마음이었다.
턱-
갑자기 김은아는 물수건을 갈고 있는 신유성의 손을 잡아챘다.
“……나도 머리 쓰다듬어 줘.”
“머, 머리를?”
물론 그렇게 생각했어도 이건 너무 갑작스러운 부탁이라 의아했지만 김은아는 이불에 반쯤 얼굴을 숨기며 요구사항을 추가했다.
“……응. 벨벳한테 하는 것처럼.”
겨우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정도야. 김은아의 부탁이라면 못할 건 없었다. 신유성이 기꺼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김은아는 만족한 듯 웃었다.
“유성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기쁨 탓일까, 아니면 열기가 더해지는 탓일까? 김은아의 목소리는 점점 더 간드러졌다.
“……어제 했던 말 기억해?”
조심스레 묻는 중에도 살짝 잠긴 김은아의 목소리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평소엔 민망하다며 눈을 마주치는 걸 싫어했지만 오늘은 온전히 신유성의 두 눈에 시선을 마주치고 있었다.
“무슨 말?”
“너랑 네가 어려졌을 때……. 네가 나한테 한 말…….”
김은아는 몸의 열기를 빌려도 이 질문만큼은 민망한지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음…….”
“아니야. 생각 안 나면…… 됐고.”
그렇게 말한 김은아는 슬쩍 고개를 천장으로 돌렸다. 이건 누가 봐도 서운하다는 반응. 신유성은 그런 조심스레 김은아의 머리카락을 손에 부드럽게 쥐며 운을 띄웠다.
“은아는 눈이 예뻐.”
신유성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김은아는 주인의 부름에 반응하는 강아지처럼 휙- 고개를 돌려 보았다. 부끄러움에 입술이 옅게 떨렸지만, 얼굴에선 기대감이 엿보였다.
만약 김은아가 벨벳처럼 꼬리가 있다면 지금쯤 거세게 흔들고 있지 않을까?
“어, 어떻게 예쁜데?”
작은 말 한마디에 이렇게나 크게 반응하고 기뻐하는 모습에 신유성은 김은아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김은아가 진정으로 자신에게 원한 건 표현이 아니었을까? 사실 감정이 아닌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다. 무엇을 느끼든 말을 하지 않으면 순간에 그친다.
그러나 표현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건 기억이 되어 영원히 남는다.
‘은아라면. 절대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겠지.’
5살의 김은아.
5살의 신유성.
둘의 멋진 모험과 잊지 못할 칭찬을 영원토록 기억하겠지.
“음~ 투명한 호수 같아.”
“뭐, 뭐래~!”
신유성의 말은 아무래도 정답인 모양이었다. 김은아의 거센 반응은 단순히 열기 때문이 아닌 게 느껴졌다. 김은아가 순수하게 기뻐하는 게 느껴졌다.
“정말이야. 은아의 눈을 보고 있으면 잡념이 사라지니까. 계속 이렇게 보고 싶어.”
신유성은 자신을 구하러 온 김은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으휴, 평소의 네가 지금의 반만 관심을 주면 얼마나 조을카…….]
그 소원을 이루어 주는 건 정말 어려울 게 없었다. 김은아를 향한 신유성의 관심은 이미 충분했고 남은 건 표현뿐이니까.
“입도 예쁘고. 코도 예뻐. 물론 귀도…….”
얼굴의 넘어 김은아의 귀가 붉어졌다. 이건 김은아의 부끄럽다는 신호였다. 즉 신유성의 [솔직한 표현]이라는 날카로운 공격이 제대로 통했다는 증거.
하지만 오늘은 김은아의 마음속에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승리하는 날이 아니었다.
“……유성아.”
몸의 열기는 솔직함이란 감정에 힘을 더 해줬다.
“나…… 좋아한다고 해줘.”
솔직함이란 곧 불안함이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 만큼 자신도 사랑 받고 싶은지 확인하고 싶은 건 사람의 본성이다.
그러니 상대방에게 자신을 좋아는지 묻는 건, 그만큼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이야기.
“정말 좋아해. 은아야.”
김은아는 자신을 쓰다듬어 주는 신유성의 부드러운 손길에 머리를 맡겼다. 그리곤 너무나 만족한 듯 배시시 웃었다.
그건 마치 신유성이 동화책을 읽어줄 때 벨벳의 반응 같아서 신유성은 웃고 말았다. 역시 김은아는 아이 같은 부분이 있었다.
“……진짜?”
“응 진짜.”
그러니 지금의 반복은 상대를 의심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만족하기 위한 과정이다.
비유를 하자면 맛있는 음식을 다시 한입 먹는 일과 같다.
“……얼마나?”
마음이 편해진 김은아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
“호수만큼?”
“바보야~ 아까 했잖아.”
푸핫- 하고 웃었다.
웃음은 소리로 남았고.
기쁨은 기억으로 남았다.
“바다만큼?”
“그건 나쁘지 않네.”
바쁜 가족들을 옆에 두고 그토록 김은아에게 필요했던 건 관심과 애정. 그러니 김은아가 신유성에게 바란 건 큰 게 아니었다.
김은아가 바란 건 그저 신유성의 소소한 표현. 신성그룹의 후계자답지 않은 소박한 소원이었다.
“……유, 유성아.”
이번에도 김은아가 신유성을 불렀다.
파앗-!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 앉은 자세로 돌아온 김은아는 다짐한 듯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 우리, 키스할까!?”
김은아는 진지했다. 뭔가 설명 못할 감정을 확신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지금 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내 이성이 돌아왔는지 김은아는 고개를 숙였다.
“아, 맞다. 감기……. 옮을 수도 있겠네.”
김은아는 신유성을 좋아하는 마음만큼 상대를 배려했다. 자신의 감정 때문에 감기에 걸린다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할까?
하지만 김은아는 곧 고개 숙였던 자신의 턱 끝에 긴 손가락이 닿는 게 느껴졌다.
이다음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신유성이 정말 그렇게 행동하리라곤 믿을 수 없었다.
“흡…….”
그러나 그다음 결과는 김은아의 소원대로 이루어졌다. 언젠가 자신이 했던 기습적인 키스처럼 이번에는 신유성의 기습적인 키스였다.
숨이 닿는 가까운 거리. 언제 마신 건지 입 안에 남은 바나나 우유의 달콤함. 아까 전과 비교도 안 되게 더해지는 열기.
“아…….”
짧고도 긴 키스가 끝났을 때 김은아는 그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
“바, 바보야. 감기…… 걸리면 어떻게 하려고오…….”
“괜찮아 그때는 은아가 간호해 줄 테니까.”
달콤함을 넘어 꿀이 흘러넘치는 분위기 속에서 김은아와 신유성은 다시 눈이 맞았다.
분명 처음은 간호가 목적이었건만 이래서야 병을 옮기는 게 아닐까? 물론 신유성과 김은아에게 그건 안중에도 없을 정도였다.
“움…….”
다시 서로 입을 맞춘 지금.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중요할까?
하지만 서로에게 너무 심취한 탓일까?
“아가씨! 메시지도 안 받으시고 진료 기록에는 감기까지 있으니 제가 얼마나…… 어…….”
김은아의 문밖에는 지금 이수현이라는 불청객이 있었다. 물론 불청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은아야! 오빠 왔어! 거실은 또 왜 이렇게 커?”
“이수현 비서! 우리 은아 그 방에 있나?”
오빠인 김준혁에 신성그룹의 회장인 김석한까지 직접 행차하자 본의 아니게 밀회를 훔쳐보고 만 이수현은 이 위기를 넘겨야 했다.
“자,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회장님!”
“모야아! 너 어떻게 알고 왔어?”
쉿- 당황한 김은아는 숨죽인 채 말했다. 그러나 지금 급한 건 따로 있었다.
“아가씨이잇!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일단 숨겨요!”
“누굴? 아! 유성이!”
“으, 은아야?”
결국 신유성은 두 여인에게 떠밀며 갑작스레 드레스 룸에 갇혀버렸다. 크기가 좁은 건 아니었지만 여긴 김은아의 옷이 가득 차 있는 답답한 장소.
‘……왜 이렇게 된 거지.’
신유성의 순수했던 간병이 뭔가 잘못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