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어떻게 보면 작은 사회인 아카데미에서 소문은 빛보다 빠르다. 특히 그 대상이 학생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학생회장이라면 더욱 그랬다.
“소문 들었어? 학생회장이…….”
“아카데미를 자퇴했다는 그거?”
“부회장도 같이 나간 걸 보면 스카웃 당해서 옮기는 건가?”
“아니야. 전학 수속도 안 밟았대. 그냥 갑자기 나갔대!”
분수가 있는 가온의 정원에선 여학생 한 무리가 떠들었고 벤치에 앉은 이채현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학교의 분위기에 한숨을 쉬었다.
“……신유성 패거리가 정말 그 학생회장을 이기다니. 이걸 배팅을 성공했다고 해야 할지.”
“회장은 무슨 일을 벌였던 걸까? 그런 유망주가 자퇴했는데 교장 선생님도 헌터 협회도 침묵하는 걸 보면…… 심상치 않아.”
그러나 여전히 의문에 빠진 민성혁의 이채현은 고개를 저었다.
“아, 몰라~! 이제 머리 아픈 건 됐어. 게다가 난 잘나갈 친구한테 우정의 증표도 받았고~ 짜안!”
이채현이 윗옷을 살짝 들어 허리춤에 걸린 범고래 키링을 자랑하자 민성혁은 눈을 가렸다.
“야! 조심해! 배, 배꼽 보이잖아! 또 허리에 그 유치한 범고래 인형은 뭐고!”
이채현은 그런 민성혁의 이중적인 반응에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에휴…… 와중에 볼 건 또 다 봤네. 이 범고래 키링은 김은아와 나의 우정의 증표란 말씀.”
“언제는 서로 죽일 듯 굴더니?”
“어제의 적이, 오늘의 뭐 어쩌구저쩌구 있잖아. 뭐, 신성그룹은 은혜를 잊지 않는다나? 언젠가 김은아가 날 도와주기로 했어. 나름 줄타기를 한 거지.”
민성혁은 이채현의 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녀석은 손익 계산이 빠르구나.
“나는 아델라 때문에…… 3시간 동안 얼어붙었는데.”
“살아 있는 게 다행이네. 어떻게 아델라한테 까불 생각을 하냐?”
“큭…….”
이채현에게 한 방 먹어 고개를 돌리는 민성혁. S반의 두 콤비가 만담을 주고받는 동안 저 멀리에선 에이미가 행차하는 게 보였다.
“다들 안녕~ 가온의 차기 학생회장에 출마한 에이미입니다.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거기 A반! 둘! 모르는 척 지나가지 마! 같은 반이니까 나한테 투표할 거지?”
“네가 무슨 학생회장이야!”
“맞아~ 아직 1학년이면서!”
“어허! 내 뒤에는 파티장님이 있다고! 다들 무슨 말인지 알지!?”
어디서 구했는지 작은 트럭까지 대동한 에이미는 [기호 3번 에이미]라는 선거 띠까지 둘러매고 교내 부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뭐야, 에이미 쟤 학생회장으로 출마할 건가 본데?”
“미친 거지. 당연히 2학년 중에서 뽑히겠지. 부회장이 없어도 그 라인이 얼마나 쟁쟁한데.”
민성혁과 이채현이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이라고 평가하는 와중에도 에이미는 해맑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예 확성기까지 대동해 본격적으로 유세 활동을 했다.
[아아- 학생이 곧 별이다! 대스타를 만드는 가온 아카데미를 위해 기호 3번 에이미가 힘쓰겠습니다! 기호 3번이에요!]
권력의 대이동!
격변의 파도가 닥친 것이다.
* * *
가온 아카데미의 교장이라는 명예와 6급 헌터라는 위치까지 도달한 진병철이 국내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저, 저희…… 가온의 학생이 그런 짓을 벌였단 말이군요. 이 불미스러운 일을 교장으로서 어떻게…… 책임져야 할지…….”
하지만 진병철은 상대에게 상석을 양보하고 조심스레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피해를 금전적으로 산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건이 거대해지기 전에 이미 신유성 학생이 처리했으니까요.”
학원도시의 지부장인 메이린.
“허허, 이미 그 일은 유성이가 처리했으니 상관없다네! 오히려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우리 헌터 협회의 잘못이 크지!”
그리고 헌터 협회의 회장인 강유찬이었다.
“아. 여, 역시! 우리 유성이는 저희 가온 아카데미의 자랑이지요! 신하윤은……. 일을 잘 처리한다기에 놔뒀더니! 뒤에서 그런 흉악한 짓을…….”
무소불위의 절대 권력 앞에서 진병철이 굽힐 수밖에 없는 건 당연지사. 진병철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신유성에게 감사하며 슬쩍 물었다.
“그럼 회장님께서 가온을 찾아오신 건…….”
“이번 일은 대외적으로 우리가 처리하도록 할 테니 신하윤에 관한 건 묵과하도록 하게.”
진병철은 신하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정확히 듣지 못했다.
아주 위험한 아티팩트를 신고 절차 없이 숨기고 있었고, 그걸 사용해 피해자가 생길 뻔했다. 정도의 상투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진병철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다.
“아, 옛!”
오히려 충성을 보이듯 강유찬에게 경례까지 해 보였다. 유원학이 진병철이 막 현역 헌터가 됐을 때부터 선배라면 협회장인 강유찬은 상관 중의 상관.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군대를 방불케 하는 진병철의 깍듯한 답변에 메이린은 그제야 품에서 물건을 꺼냈다.
“……그리고 신유성 학생에겐 이 물건을 전해주시기 바랍니다. 협회장님의 선물이십니다.”
강유찬이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엄청난 선물인 걸까? 하지만 강유찬이 꺼낸 건 기껏해야 하얀 종이 한 장이었다. 물론 마나는 느껴졌지만 그 양도 미비했다.
“이, 이건?”
“그 종이의 주인에게 찾아간다면 지금의 고민을 해결할 수 있다. 딱 그 정도만 말해주게.”
“고민을…… 알겠습니다. 유성이에게 그대로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 * *
벨벳이 쓰러진 뒤 겨우 며칠에 불과한 일들이 신유성은 마치 긴 여행처럼 느껴졌다.
작은 발바닥이 카펫을 밟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헉, 아빠 아직도 안 자써?”
아직 덜 깬 눈을 귀엽게 비비며 물어온다.
“일어났구나.”
힘이란 뭘까?
힘이 없어 버림받았던 신유성은 결국 힘만을 추구한 신하윤에게 이기고 소중한 걸 지킬 수 있었다. 신하윤이 그토록 갈망했던 건 무엇일까? 그게 정말 힘일까?
더 강한 힘이란.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같다.
‘……최강.’
스승님이 말한 진정한 최강(最强)이란 무엇일까? 자신은 도달하지 못했다며 대신 걸어달라고 부탁한 그 길은 무엇일까?
모르간의 힘이 덮쳐온 절체절명의 순간 신유성을 지킨 건 몸 안에 담긴 마나나 신체의 근력이 아니었다.
스윽-
“아빠가 심각한 생각을 하고 이써 물론 그래두 잘 생겨찌만…….”
침대보다 오히려 팔이 편한 걸까? 신유성은 자신의 팔에 기댄 벨벳의 무게가 느껴졌다.
“미안. 벨벳 나도 모르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아니야. 그건…… 슬픈 기쁜 표정이야.”
“스, 슬픈 기쁜 표정?”
처음 듣는 단어에 당황한 신유성이 관심을 주며 되묻자 벨벳은 잠이 깬 듯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었다.
“응! 슬픈 표정! 벨벳은 알아!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울어야 하는데 아빠는 아무것도 안 하고 이써.”
설마 서재에 있는 그 수백 권의 책 중에 스미레가 동화가 아닌 철학책이라도 배치해둔 걸까.
벨벳은 세상에서 가장 철학적인 천재 드래곤 해츨링이었다.
“기쁜 일에는 웃고, 슬픈 일에는…….”
“울어야해! 벨벳도 오르카가 떠나서 엄청 울어써…….”
오르카의 이야기가 나오자 벨벳은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꼬리도 힘없이 축- 늘어진 걸 보아. 여간 슬픈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럼 아빠는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구나?”
“아니, 아빠는 일찍 어른이 된 사람이야!”
신기하게도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벨벳은 신유성이 가진 고민의 정답을 아는 듯 보였다.
“이, 일찍 어른이 된 사람이라. 어려운 이야기네…….”
물론 그럼에도 신유성이 자신의 지식을 따라오지 못하자 벨벳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려운 이야기를 풀어 말했다.
“캬항……. 흐움, 그건 마치, 달걀이 닭이 된 거야!”
“달걀은 병아리가 되고 걷는 법도 배우고 지렁이 먹는 법도 배워야 하는데! 아빠는…… 알에서 닭이 대써!”
비록 신유성을 병아리와 닭에 비유하긴 했지만 벨벳의 주장은 알 듯 말 듯 한 이야기였다. 어린아이치곤 주장에 나름의 철학과 통찰이 있었다.
“어른은 케이크를 두 개 먹으면, 내일은 하나일까 봐 걱정해! 케이크를 머거도 기뻐하지 않아!”
“흠…… 하지만 벨벳 난 케이크를 먹으면 기뻐하는걸?”
“호곡!”
귀여운 벨벳의 반응에 신유성은 미소를 지었다. 괜히 장난을 쳤지만 오히려 어린아이의 시선이 정답일 수 있었다.
자신은 너무 힘든 길을 걸으려 한 게 아닐까? 스승님이 말한 최강의 길이란 생각처럼 가시밭길이 아닐지 몰랐다.
‘그 길의 해답은 스승님의 말에서 힌트가 있겠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던 스승님과 동료들은 ‘탑의 진실’을 마주했고, 결국 탑의 등반을 포기했다.
오직 스승님과 동료들만이 알고 있는 공개 되지 않은 진실은 뭘까? 그게 아마 이 질문의 해답이겠지.
‘최강의 자리에 오르신 스승님께서 나에게 맡기고 싶은 길…….’
생각을 정리한 신유성은 어느새 무릎에서 잠든 벨벳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신하윤은 왜 나에게…….’
[13일. 21시, 푸른 청 바다, 등대 위. 기다릴게.]
신유성은 신하윤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보았다. 하지만 지금 우선순위는 신하윤이 아니었다.
지금은 벨벳과 한 약속을 지키는 게 먼저였다.
“캬우응…… 오르까, 곧 내가 찾으러 가께…….”
우물우물.
신유성은 잠든 사이에도 엄지를 우물거리며 오르카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벨벳을 보았다.
벨벳에겐 3명이나 되는 어머니가 있었지만 오르카는 하나뿐인 친구였다.
[벨벳은 엄마 아빠한테 부탁이 이써…….]
신유성은 기운을 되찾은 벨벳이 처음으로 했던 말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오르카를 살려줘!]
신하윤은 신유성과 벨벳의 관계를 비웃었지만. 신유성은 단순히 피가 섞인 남이 아닌, 스미레가 말한 의지 할 수 있는 가족의 가치를 믿었다. 그러니 누가 뭐라 해도 벨벳은 자신의 딸이었다.
그런데 딸의 하나뿐인 소중한 친구도 구하지 못한다면 이 힘은 무엇을 위해 존재할까?
“……걱정 마 벨벳.”
신유성은 벨벳의 이마를 쓸어내렸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손수 정리해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내가 꼭 오르카를 구해줄게.”
물론 절대로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다. 신유성이 지금 손에 쥔 건 강유찬이 보낸 선물이라는 정체불명의 하얀 종이.
처음에는 이 물건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마나를 머금곤 있지만 미비한 것이 아티팩트도 아니었다.
“……해가 뜨는군.”
하지만 신유성이 창가에 비친 햇살에 종이를 비추자 이야기는 달라졌다. 하얀 종이는 점점 여러 가지 색으로 물들었다.
“역시 생각대로인가.”
종이의 정체는 사진이었다.
물론 뚜렷하진 않고 흐릿하지만 신유성은 사진에 담긴 인물들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맨 왼쪽의 근육질에 호탕한 남자는 스승인 유원학. 예리한 외모로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강유찬. 그리고 맨 오른쪽에 서있는 미모의 여자는…….
로렐라이의 스승이자.
유원학의 동료인 전설의 헌터.
“……이 사람은.”
마녀 아리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