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한적하다.
귀가에 닿는 건 오롯이 흩어지는 빗소리뿐. 너무 무리를 한 건지 몸에는 힘이 없고 눈꺼풀이 얼마나 무거운지 눈을 뜨는 일조차도 쉽지 않았다.
스윽-
병원 특유의 하얀 이불을 걷으며 몸을 일으켰다. 팔에는 치유액을 투입하기 위한 링거가 꽂혀 있었고 몸은 환자복이 입혀져 있었다.
“흠…….”
신하윤은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며 영문 모를 감탄을 흘렸다. 그 눈에 담긴 건 분함도 아니었고 슬픔도 아니었고 비참함도 아니었다.
굳이 그 감정을 단어로 정하자면 무감(無感)이 아닐까.
“결국 졌구나.”
그리고 뱉은 말은 어찌나 담백한지 신하윤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이혁은 그런 신하윤을 가만히 보았다. 이런 신하윤은 처음이었기에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었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했던 신하윤이 상심하는 모습에 자신은 왜 이토록 괴로운 감정이 드는 걸까.
“왜 표정이 그래?”
신하윤이 싱긋 웃었다.
반면 이혁의 표정은 상심한 게 본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낯빛이 어두웠다.
“하윤이 넌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구나. 너라면…….”
“길길이 날뛸 줄 알았어?”
그러나 진지함을 유지하던 이혁도 신하윤의 농담에 그만 표정이 풀어졌다.
“그렇지. 날뛸 줄 알았어.”
“그러네. 그게 맞을 텐데 왜일까.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
신하윤은 창가를 보았다.
닫힌 유리 너머에는 비를 피하기 위해 창틀에서 몸을 웅크린 달팽이가 보였다.
드륵-
신하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 달팽이 껍데기를 잡아보았다. 그리곤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에 그제야 깨달았다.
달팽이가 있었다고 생각한 건 자신의 착각이구나. 멀리서 볼 땐 몰랐지만 막상 들어본 달팽이의 껍데기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어쩌면 말이야. 실은 속이 텅 비어 있을지도 모르겠네.”
신하윤은 달팽이의 껍떼기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곰곰이 살펴보았다. 그리곤 흥미가 사라진 듯 툭- 다시 껍데기를 창가에 놓은 후 침대로 돌아왔다.
“이전을 흉내 내며 살아있는 척 굴어도……. 진짜 나는 그 검에 당한 순간 죽어버린 걸지도?”
이혁은 그런 신하윤의 모습에 말을 아꼈다. 이혁의 그런 묵묵한 성정은 신하윤이 높게 사는 점이었다. 아, 물론 이젠 이혁이 자신을 따를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었지만.
“그런데 넌 왜 여기 있어?”
신하윤의 질문은 정말 순수했다. 비꼬는 게 아닌, 정말 이혁이 왜 자신의 곁에 남았는지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껏 신하윤이 일어나기만을 기다렸던 이혁은 표정이 굳고 말았다.
“하윤이 너…….”
이혁은 점점 괴로운 표정이 되었지만 신하윤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너도 봤잖아. 내가 패배하는 모습을.”
그러나 당연한 일이었다.
신하윤은 지금껏 힘이 전부라 논했으니, 자신의 가치를 오직 힘이라는 잣대만으로 규정했다. 인간의 가치도 관계의 가치도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잣대대로라면 신하윤은 망가진 인간이고 패배한 인간이고 쓸모없는 인간이었다.
신오가문과 그녀 자신이 신유성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 또한 버려져야 마땅했다.
“몸 상태를 보니…… 예전의 마나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겠어. 한동안 일반인이나 다를 바 없겠지.”
신하윤은 류진의 검이 몸에 박힌 순간. 몸안의 깊은 곳에서 무언가 상실되는 게 느껴졌다. 그건 자신이 벨벳에게 한 짓과 다르지 않았다.
“……인과응보(因果應報). 말 그대로 뿌린 대로 거두게 되었네.”
신하윤은 침대에 누워 책을 펼쳤다. 그건 헌터에 관한 것도, 모르간의 고서도 아닌, 환자를 위해 배치된 평범한 잡지였다.
신하윤은 그저 지루한 얼굴로 잡지의 페이지만 넘겼다. 여전히 자신을 떠나지 않는 이혁에게 이제 끝이라는 듯 힘없이 말했다.
“이제 난 힘도 자신감도 없어. 그리고 목표도…….”
신하윤의 한마디 한마디에 이혁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말을 끝마칠 즘엔 비통함마저 느껴졌다.
“……그래. 난 하윤이 네 그런 모습을 따랐지 강하고 자신감에 찬 널 동경했거든.”
진심을 담은 이혁의 말에도 신하윤은 잡지의 페이지만 넘겼다. 이혁도 신하윤과 더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신하윤처럼 될 수 없을 뿐이다.
신하윤이라면 분명 아무렇지 않게 자신과의 관계를 접어버릴 수 있겠지만.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
이혁은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이혁의 세상에서 신하윤은 거대했다. 신하윤의 실패에 좌절하고 힘없는 모습에 슬퍼했다. 여전히 이혁은 신하윤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이혁이 넌 바보구나.”
스륵-
머리를 푼 신하윤이 귓가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이렇게나 준비되지 않은 자신을, 무방비한 자신을 보여준 건 이혁이 처음이었다.
“모르겠니? 난 널 쓸모가 있어서 곁에 둔 거야. 만약 가치가 없어졌다면 자비 없이 버렸을 거야.”
둘의 관계는 처음부터 주종 관계였다. 기브 앤 테이크. 너무나 명확했던 관계의 선을 넘어버린 건 어디까지나 이혁이었고, 신하윤이 어울려줄 의무는 없었다.
“그러니 날 떠나. 난 아카데미도 그만 둘 생각이야. 회장 자리는 부회장인 네가 맡게 되겠지. 내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해 둬.”
뚝!
이혁은 신하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의 명찰을 뜯어냈다. 그리곤 가온의 학생을 상징하는 재킷과 함께 바닥에 내팽개쳤다.
가온의 학생회 출신이라는 지위와 교내의 권력이야말로 이혁이 신하윤의 밑에 들어온 이유였다.
이전의 패배로 모든 걸 잃은 신하윤의 앞에서 그걸 버리는 게 무슨 의미일까?
“그거, 무슨 뜻이야?
“네가 틀린 길을 걷고 있다는 걸 알았으면서 결국 널 돕고 말았으니까……. 지옥에 떨어진다면 같이 떨어져야겠지.”
이제 회장과 부회장도 아니며 주종관계도 아니다. 그러니 체면을 지킬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이혁은 터벅터벅 신하윤의 곁에 다가가 허락도 없이 바로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신하윤은 그런 이혁의 행동에 옅게 웃음을 터트리더니 턱을 괬다.
“풋, 지옥이라……. 마녀에게 어울리는 장소네. 근데 너는 좀 애매하지 않니?”
이혁은 신하윤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가온의 학생이길 포기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검을 버리지 않는 이유가 뭘까?
그건 자신의 검을 신하윤을 위해 쓰길 맹세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가 더 강하니까. 같이 갈 생각이야.”
“……뭐? 대체, 왜?”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신하윤의 반응에도 이혁은 고집을 버리지 않았다. 자신은 신하윤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었다.
이건 그래.
말하자면 저주 같은 것이다. 당해버린 순간 절대로 지울 수 없는 낙인 같아서 평생을 바쳐야 하는 마녀의 저주.
“널 지켜야 하니까.”
뻔뻔함을 넘어 이젠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이혁의 모습에 신하윤은 신유성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명 정도는 있었나 보네.]
그래. 오직 1명.
[누나를 위하는 사람이.]
아직 자신을 위하는 사람.
“내가 너에게 소중한 사람이니?”
신하윤은 담담하게 물었다.
“……응.”
이혁의 조용하고 슬픈 대답에도 신하윤은 아무런 감정 없이 짧게 답했다.
“그렇구나.”
어떻게 해야 자신이 저 감정을 이해 할 수 있을까? 어떻게 라플라스는 같은 마녀면서 인간을 이해 할 수 있었을까?
[인간의 시간은 짧으니 부디 솔직하거라!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어도 된다. 인간의 삶은 완벽 할 수 없기에 소중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고.
[그야…… 난 이미 만족했느니라. 더 이상의 여한은 없다.]
인간을 위하고.
[그러니 비록 그 대가가 진정한 소멸이라 하여도……. 나는 기쁘게 웃을 수 있느니라.]
사랑할 수 있었을까?
툭-
신하윤은 갑자기 이혁의 손을 잡았다.
“이혁. 넌 나를 사랑하고 있니?”
그리곤 프러포즈 같은 말을 점심 메뉴처럼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하, 하윤아!?”
“나도 확인 해보고 싶긴 한데…….”
당황한 이혁은 뱀을 만난 개구리처럼 뻣뻣하게 몸이 굳어버렸지만 신하윤은 손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손을 잡아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네.”
역시 무리였던 걸까. 자신도 라플라스나 이혁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순 없었던 걸까?
“하, 하윤아……. 내가 말한 건 이런 게 아니라.”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니? 당연히 이성으로서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같은 자매지만 신하윤은 신유성과 달랐다. 신유성이 무신산에서 살며 아무것도 모를지언정, 신하윤은 이미 마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그건 맞지만……. 하윤아, 순서라는 게…….”
언제나 차갑고 무서운 선배로 통하던 이혁이 얼굴을 붉힌 모습을 보면 다른 학생들은 뭐라 생각할까?
위잉!
신하윤은 얼마 없는 마나로 이혁을 자신이 누운 침대. 그것도 코앞까지 데려왔다. 그리곤 얼굴과 반응을 찬찬히 살피며 확인했다.
“……호흡도 가빠지고. 얼굴도 붉고, 이건 동조했다는 뜻. 확실히 이혁 넌 나를 좋아하는가 봐.”
물건의 상태를 살펴보듯 정확하고 냉철한 판단을 내린 신하윤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읊조렸다.
“난 전혀 아니지만. 그래도 다음 단계는 확인해봐야겠지.”
다음 단계?
차마 의문을 표할 생각도 없이 신하윤은 이혁을 잡아당겼다. 둘의 입술이 겹쳤다. 신하윤의 성격만큼이나 독재적인 입맞춤이지만 이혁은 묵묵히 눈을 감았다.
째각- 째각- 째각- 째각-
4년 같은, 아니 영원 같은 4초가 지났다. 그 침묵을 깬 건 신하윤의 목소리였다.
“……알겠니?”
신하윤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혁은 여전히 바보처럼 입을 벌린 채 침대에 머물러 있지만 신하윤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나를 향한 네 감정은 일방통행일 뿐이야. 그마저도 그릇이 없어 담기지 않고 흩어지지.”
아무런 동요 없이 따박따박- 조리 있게 이혁의 심장을 찌르는 그 목소리는.
“넌 보상 받지 못할 거야. 아무리 갈망해도…… 내가 너에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겠지. 참, 허망하지 않니?”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차가운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자신이 동경한 신하윤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이혁은 일어났다.
입술에는 여전히 아까의 열기가 남아 있지만 애써 옷매무새를 추스르며 감정을 숨겼다.
신하윤의 말이 가슴을 철렁이게 만들고 무엇보다 사무쳤지만 그럼에도 담담하게 뱉어냈다.
“아니.”
사랑에 승자와 패자가 없다는 건 거짓말이다. 이혁은 알고 있었다. 이것도 실은 전투와 다르지 않다는 걸.
결국 패자가 승자를 따를 수밖에 없다. 먼저 상대에게 반해버린 사람이 상대를 따를 수밖에 없다.
“이미 예상한 일이야.”
그게 아무리 뜨거운 지옥불이라 하여도 마치 불나방처럼 뛰어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