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퐁당.
비에 젖은 나뭇잎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녹음으로 가득한 산엔 특유의 향이 가득했고 조심스레 방문한 빛은 주변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흐읍!”
벨벳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강가를 노려보았다. 강물이 제법 거세게 흐르는 통에 어른이 건너기에도 위태위태한 돌다리였다. 벨벳의 짧은 다리로 건너기엔 무리처럼 보였다.
“읏챠-!”
하지만 벨벳은 짧은 다리로 점프를 해 돌다리를 잘도 넘어 다녔다.
벨벳은 여기가 어디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자신이 뭘 하러 왔는지는 알고 있었다.
통-
마지막 돌 위에서 반대편 강가 너머를 향해 벨벳은 점프했다. 아빠의 특훈 덕일까? 자신의 점프력이 이렇게 좋았을 줄이야. 스미레 엄마가 봤다면 위험하다며 깜짝 놀랐겠지.
찌이이- 칙- 찌르르르-
풀벌레들의 소리가 정겹다.
싱그러운 숲의 향기도 수풀에서 푸드득- 소리를 내며 도망치는 동물들도 귀여웠다. 생각보다 산은 재미있는 장소였다.
“으챠-!”
하지만 지금은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벨벳은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걸었다. 그런 벨벳의 모습에 어깨에 앉은 파랑새들이 지저귄다.
- 이제 조금은 쉬어도 되잖아.
- 이 정도면 충분히 했어.
산속에서 새롭게 사귄 친구들은 같이 놀고 싶은 모양이지만 벨벳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대!”
그래 지금은 안 된다.
분명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결국 잠만 자고 있을 테니까.
그래. 지금은 걷자. 수풀을 넘고. 돌다리를 건너. 산의 정상에 오를 때까지 계속해서 걷자.
뚜벅뚜벅.
벨벳은 어른들도 힘든 긴 거리를 쉬지 않고 걸었다. 지치지도 않고 계속 걸었다. 몸에선 땀이 흐르고 강가에 쉬어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단 1초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캬항!”
그 노력이 닿은 듯 어느새 정상이 보였다. 좀 더 걸어 전망대에 오르자 탁 트인 전경 아래로 산의 풍경이 지천에 깔렸다.
절레절레.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었다. 이렇게나 아름다운 산의 풍경도 벨벳이 쉬지 않고 정상까지 올라온 목적은 아니었다.
“캬항! 여기였구나!”
벨벳이 자리를 잡고 앉은 건 한적하고 조용한 나무 한 그루와 바로 밑동에 놓인 낡은 오리 인형 하나였다.
비록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알 수 있다. 어떤 모습으로 변해도 친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니까.
“안녕 오르카!”
해맑게 웃는 벨벳의 부름에도 오리는 대답이 없었다.
“너를 찾으러 오려고 쉬지 않고 걸어써. 그리고 캬항- 목도 엄청 말라…….”
벨벳은 평소처럼 투덜거렸다.
“근데 멈출 수 없어써, 네가 기다리고 있으니까!”
물론 낡은 오리 인형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벨벳은 뭘 기대한 건지 모르지만 오리 인형은 처음 그 모습 그대로 묵묵히 산 아래를 바라보았다.
하루. 일주일. 한 달. 1년. 5년.
그리고 10년.
밤과 낮이 바뀔 때면 꼬박꼬박 숫자를 셌다. 물론 틀릴지도 모른다. 10 이상의 숫자는 장난감에게 너무 어려웠다.
그럼에도 계속 포기하지 않고 기다린 건 약속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렇게 지켜보고 있어 어른이 되면 돌아올게.]
물론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아마 나 같은 낡은 오리 인형은 진작 잊어버렸겠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던 그 아이는 자신을 소중한 선물이라고 말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었고, 잠이 들 땐 나를 꼭 끌어안고 잠들었으니까.
물론 모두 과거의 이야기다.
낡은 장난감은 버려진다. 친구라 부르지만 결국 우리는 물건이다. 사용할 수 없게 된 물건이 버려지는 건 숙명이다.
그 아이는 내가 싫어졌겠지. 아니 어쩌면 아버지가 싫어진 걸지도 모른다.
“오르카. 나랑 얘기 안 하 꺼야?”
빼꼼- 고개를 내민 벨벳의 얼굴이 보였다.
“캬항……. 벨벳 목마른데.”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벨벳의 목소리가 들렸다.
“……작은 주인님. 오르카가 아니라 토이킹입니다. 물론 지금은 범고래도 아니고 오리 인형이고요. 아이 러브 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판매됐죠.”
그저 10년 넘게 같은 곳만 바라보던 오리 인형이 말했다.
“여긴 어떻게 찾으셨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기억도 시간도 뒤죽박죽이네요. 오리 인형이던 시절에는 전 말을 못 했던 걸요.”
“친구가 있는 곳은 알 수 이써! 캬항! 오르카는 계속 뭘 기다리고 이써?”
벨벳의 질문에 자칭 오리 인형은 토이킹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요.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었는데. 이젠 이름도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네요.”
“친구가 여기 온다고 해써?”
“네. ……어른이 되면 돌아오겠다고. 했습니다. 근데 어른들은 바쁘니까요. 저 같은 낡은 인형은 진작 잊어버렸겠죠.”
“그, 그렇구나!”
벨벳은 팔장을 낀 채 심각한 표정으로 토이킹을 보았다.
“크, 큰일 나써…… 벨벳도 약속을 하러 왔는데…….”
“무슨 약속이십니까?”
“안대, 안 알려줘.”
“전 이미 뭔지 알 거 같은데요.”
“헉, 아직 말 안했는데?”
“저흰 친구니까요. 친구끼린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요. 그러니 약속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토이킹은 여전히 산 아래를 보았다.
그래. 이 장난감 저 장난감을 떠다니며 한동안 자신의 진짜 모습을 잊어버렸었다. 하지만 이게 자신의 과거였다. 누구도 찾지 않는, 버림받고 낡은 인형.
“작은 주인님은 돌아갈 곳이 있는 걸요. 꿈에서 깨면 소중한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았다.
그 수많은 장난감들을 돌고 돌아 오리 인형으로 되돌아온 건, 이 장소로 되돌아온 건 ‘탑의 기적’이 준 기회일지도 몰랐다.
“저는 그 아이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을 구하고 나서야 알게 되었어요.”
“음, 먼데?”
방긋 웃는 벨벳의 모습에서 토이킹은 누군가의 모습이 비쳐 보였다.
“분명…… 돌아오지 못할 이유가 있었겠죠. 그 아이는 몸이 좋지 않은 아이였어요. 수술도 받기 전 이었으니까요.”
토이킹은 자신을 내려두던 그 아이의 손길이 떠올랐다. 그 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꼭 기다려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목소리만은 선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참 슬픈 목소리였다.
“……어른이 되면 돌아온다고 약속했지만. 어른이 되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그 아이가 저를 버렸다고만 생각한 건…….”
“벨벳도 알고 이써……. 그건 엄청 슬프기 때문이자나…….”
토이킹은 만약 자신이 오르카의 몸이라면 고개를 끄덕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 낡은 인형의 몸으론 그럴 수가 없는 게 아쉬웠다.
“그렇게 생각해보니 차라리 저를 버린 게 맞았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제 생각이 바뀔 수 있었던 건 탑의 기적 덕분이고 작은 주인님과 만난 덕분이에요.”
“그럼 오르카는 벨벳이랑은 약속하지 않을 거야?”
“약속은 무서워요.”
벨벳은 나무 밑동에 있던 토이킹을 꺼내 들었다. 그리곤 오리 인형인 토이킹을 물웅덩이에 띄웠다.
“벨벳은 오르카를 데리러 돌아올 거야.”
“그럼 계속 기다리게 될 거에요.”
“벨벳은 오르카를 데리러 돌아올 거야-!”
“작은 주인님이 돌아오지 못하면 걱정하게 될 거에요.”
“벨벳은…….”
뚝뚝-
마치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참 신기한 일이다. 빗물이 겨우 두 방울만 떨어지는 건 본적이 없었다.
비록 뒤를 돌아 벨벳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오르카는 자신의 친구가 어떤 표정일지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작은 주인님.”
그때 갑자기 화창한 하늘에선 벨벳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치료는 완료했습니다. 마나가 돌아왔으니 조만간 의식을…….
- 정말 괜찮은 거야 최고의 의사를 불렀는데 왜 눈도 못 떠?
- 벨벳…….
어딘가 화난 김은아의 짜증도 들려왔고 아델라의 간절한 읊조림도 들려왔다.
“오르카가 약속을 하지 않으면 벨벳은 가지 않을 거야.”
하지만 그럼에도 벨벳은 고집을 부렸다. 오르카는 벨벳의 고집을 잘 알았다. 타협해주지 않으면 절대로 굽히지 않겠지.
“……알겠습니다.”
“캬항! 정말!?”
울먹이던 벨벳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그래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네. 대신 그럼 시간을 정하죠. 일주일! 그 이상은 아무리 작은 주인님이라도 안 됩니다.”
“응!”
토이킹은 떠나는 벨벳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물웅덩이에 몸을 맡겼다. 바람의 인도에 따라 둥실둥실- 기분 좋게 유영하고 있자니 언젠가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산 다음은…… 바다인가.”
벨벳과 함께 망망대해를 여행하겠다던 그 약속이.
* * *
신유성. 아델라. 김은아. 이시우. 에이미를 비롯한 가온의 파티원들은 물론이고 의사와 협회의 사람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오직 벨벳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의 바람처럼 벨벳은 늦잠을 잔 어느 날처럼 기지개를 펴며 일어났다.
“캬항, 아빠~! 엄마!”
짧고도 긴 며칠의 시간 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이거 보십시오! 은아 아씨! 회복되지 않았습니까! 제 솜씨는 메트로 시티에서도 일류…….”
“자자~ 따라 오세요. 이번 일은 회장님께서도 정말 높이 사실 겁니다.”
혹시나 벨벳이 잘못될까 가슴을 졸이던 의사는 이수현 비서에 의해 끌려 나가고.
“……돌아왔구나. 벨벳. 정말 힘들었지? 이런 일에 휘말려서.”
슬픈 표정의 신유성을 도도도- 짧은 다리로 걸어와 단숨에 껴안았다.
“……벨벳은 아무렇지 않아써. 무섭지도 외롭지도 않았어! 엄마랑 아빠가 와줄 거니까!”
“장하다. 벨벳……. 흑, 흑, 진짜 괜찮은 거지? 다 나은 거 맞지?”
울보인 에이미가 눈물을 훌쩍이며 걱정하자 벨벳은 건강함을 뽐내듯 기쁨의 불 뿜기를 자랑했다.
화아아-!
아델라는 그런 벨벳의 모습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박수쳤다. 벨벳이 불 뿜기를 할 때면 언제나 박수를 쳐주던 아델라다웠다.
“정말……. 다행입니다. 벨벳.”
“약속할게. 벨벳. 이제 절대 네가 위험한 일에 휘말리게 두지 않을 거야. 내가 할아버지한테 말해서라도 어떻게든 지켜줄게.”
“맞아요. 벨벳을 위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절대로 저희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 에요.”
김은아와 스미레. 거기다 뒤늦게 온 아델라의 포옹까지 받자 벨벳은 숨이 막힌 듯 켁켁- 거렸다.
아무리 보고 싶었어도 이제 막 회복에 접어든 드래곤에게 이런 살인적인 포옹이라니.
하지만 그럼에도 도망치기는커녕 끝까지 포옹을 버텨낸 벨벳은 모두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벨벳은 엄마 아빠한테 부탁이 이써…….”
그리곤 정말 가능한 일인지도 모를 아주 어려운 부탁을 했다.
“오르카를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