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1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신하윤의 몸이 검에 꿰뚫렸다. 류진의 특성으로 속력이 더해진 일격은 5급 괴수도 단번에 즉사시킬 힘이었다.
콰악!
하지만 끔찍한 소리와 함께 흩뿌려진 건 신하윤의 피가 아니었다. 아름다운 은월검을 타고 신하윤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건 칠흑처럼 검은 마나였다.
“하악, 학! 커헉!”
신하윤은 그 과정이 얼마나 괴로운지 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비참하게 헐떡였다.
더 이상 지켜볼 수 없던 신유성이 몸을 움직이려 하자 류진은 싸늘하게 경고했다.
“……더 이상 움직이면 이 여자를 죽이겠다.”
날카로운 감각을 가진 신유성은 허세와 진짜 살기를 구분할 수 있었다. 류진의 경고는 절대 허세가 아니었다.
자신만의 신념으로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는 당장이라도 신하윤을 베어버릴 듯 날카로웠다.
“왜, 이런 짓을 하지?”
신유성은 류진이 리벨리온에 들어간 사실은 알았지만 신하윤의 몸에 검을 꽂은 이유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원수라고 들었다만. 기뻐하지 않는군. 그래도 혈육이라는 건가?”
촤악!
차갑게 조소한 류진은 신하윤의 몸에서 은월검을 뽑았다. 류진의 은월검은 신하윤의 몸에서 한 톨도 남기지 않고 검은 마나를 흡수했다. 7급 헌터인 로쟈의 몸에 단검을 박아 넣었던 날처럼 신하윤의 몸에서 원하는 걸 취했다.
“……안심해라. 죽일 생각은 없으니. 네임리스가 원하는 건 마녀의 정기일 뿐이다.”
류진은 지금까지 신하윤이 무방비해지길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신하윤은 모든 마녀의 힘을 잃은 채 땅에 머리를 처박고 괴로워했다.
류진은 쓰러진 신하윤을 뒤로한 채 미련 없이 떠나버렸다.
인과응보.
신하윤은 자신이 벨벳에게 했던 짓을 그대로 돌려받았다.
“……비참한 꼴이네. 누나.”
신유성은 그런 신하윤을 내려다보았다. 신하윤은 몸을 일으킬 힘도 없어 흙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그건 참으로 비참했다. 그건 가온의 회장이자 신오가문의 후계자의 모습이 아니었다.
언제나 신하윤이 비웃던 패배자의 모습이었다.
“큭, 큭! 이제야……. 나한테, 하. 누나라고…… 부르는구나?”
모든 걸 잃었음에도 신하윤은 신유성에게 자비를 구걸하지 않았다. 그저 지금은 신유성이 자신을 누나라 불렀다는 사실에 영문 모를 웃음만 흘렸다.
“네가, 이겼어. 이제 나를…… 어떻게 할래? 협회도 네 말에 따라 움직일 테니…… 범죄자로 취급해 감옥에 넣을 수도 있을 거야.”
신하윤은 이미 마음을 정리한 듯 보였다. 자신이 했던 말처럼 최악의 최악을 상정하며 신유성이라는 승자에게 굴복했다.
“아니면, 네…… 마음이 풀릴 때까지 두들겨 팰래?”
자신의 처우를 신유성에게 맡겼다. 당연한 일이다. 그게 약육강식의 법칙이고 강자가 약자를 제 입맛대로 처분하는 건 늘 신하윤이 말하던 권리였으니까.
“지금은 마나도 쓸 수 없으니…… 반항도 못 해. 더 이상 너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 않아…….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이젠 지쳤어.
신하윤은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신유성에게 모든 운명을 맡긴 채 반항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흙바닥에 얼굴을 묻고 거친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탓. 탓. 타다. 타다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졌다.
마치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게…… 전부야?”
둘의 입장은 바뀌었다.
겁먹었던 아이는 소년이 되었고, 공포의 존재였던 누나는 비참한 꼴로 쓰러져 있었다.
“그래 끝이야. 더 이상, 무슨…… 대답이 필요해?”
신하윤은 모든 목적을 잃었다.
모르간으로서의 목표도 잃었으며 신오가문의 후계자인 신하윤으로서의 긍지도 잃었다.
이젠 더 이상 뭘 해야 할지, 어떤 이유로 살아가야 할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은 이 모든 게 의미 없이 느껴졌다. 이렇게 눈을 감고 다시는 뜨고 싶지 않았다.
“……누나가 마나를 훔친 날. 벨벳도 같은 고통을 느꼈겠지.”
그러니 신하윤은 신유성의 말에 좀처럼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벨벳은 마지막 순간에 오르카를 걱정했어.”
자신을 추궁하는 신유성의 목소리에도 옅게 웃으며 그저 힘없이 고개를 움직였다.
“미안, 그렇게 말해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 죄책감도 없고 슬픔도 없어. 그냥…… 무기력할 뿐이야.”
이건 승자인 신유성을 도발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정말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라플라스의 말처럼 누군가를 소중히 여길 수 있다면, 사랑할 수 있다면 조금은 달랐을까?
자신이 신유성을 이겼을까?
“……유성아. 넌 어떻게 도마뱀한테도, 장난감한테도 정을 줄 수 있니? 왜 같은 피를 나누고 같은 가문에서 자랐는데……. 너만 다른 걸까?”
신하윤은 자조적인지, 비꼬는 건지 모를 말을 하며 웃었다. 빗물에 머리카락과 옷이 젖어 갔지만 신하윤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꽈악-
신하윤은 손을 움켜쥐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은 패배자였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기억들을 반복하고 새로운 기회까지 얻었음에도 무엇 하나 제대로 움켜쥔 게 없었다.
차라리 마녀가 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모르간의 기억이 없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환생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은지는 자신이 선택하는 거니까.”
신하윤이 느낀 신유성의 목소리는 무감정하고 차가웠다. 그럼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측은함이라는 감정이 얼핏 엿보였다.
저게 라플라스가 말한 인간의 힘이자 숭고함일까? 자신은 절대 흉내 낼 수 없는 ‘다름’일까?
“……그래?”
수백, 수천 년을 외면했던 사실이다. 마녀라 불리기 이전부터 비웃었던 것들이며 절대로 인정하기 싫었던 가치였다.
하지만 진정한 끝에 다다른 신하윤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진심을 뱉고 말았다.
“참…… 부럽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가지지 못한 것을 향한 열등감이었다. 행복해 보이는 인간들을 향한 끝없는 적개심의 근간은 추악한 질투였다.
결국 힘이 전부라 칭한 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게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겠지. 그래. 자신까지 속일 필요는 없었다.
신유성에게서 동료들을 떼어놓으려 한 것도. 자신만의 가족을 만든 신유성의 관계를 소꿉장난이라 비웃은 것도.
‘그래. 같은 이유겠지.’
그건 신하윤이 평생토록 느낄 수 없는 것들이다. 모르간이라는 마녀가 용사의 검에 죽는 순간까지도 몰랐던 가치였다.
그러니 억울할 것도 없다.
“결국……. 네가 옳았구나…….”
몸이 점점 차가워짐에 따라 신하윤은 크게 숨을 내쉬었다. 으슬으슬한 걸 보니 단순한 몸살로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쿵- 쿠궁!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천공섬 전체가 힘없이 비틀거렸다. 원동력을 잃은 탓이었다.
물론 천공섬에 있는 건 대부분 헌터들이니 목숨이 걸린 위험은 아니었지만 이대로 바다에 떨어진다면 무사할 순 없었다.
“잠깐.”
그러니 한시바삐 천공섬을 빠져나가야 하는 상황에서 신하윤은 신유성을 멈춰 세웠다.
비틀.
몸조차 제대로 누이지 못하는 상태였지만 힘겹게 고개를 든 신하윤은 신유성에게 여유롭게 웃어 보였다.
“이건 사과가 아닌…… 보상 정도라고 생각해 둬. 응. 처음으로 누나를 이긴 상 같은……. 그런 거.”
신하윤은 쏟아지는 빗속에서 양손을 움켜쥐었다. 바다를 향해 낙하하던 천공섬은 이내 안정된 속도로 육지를 향해 움직였다.
“설마…….”
지금 신하윤이 사용하고 있는 건 마나가 아니었다. 신하윤은 마나를 대신해 자신의 생명력을 지불하고 있었다.
“놀랄 거 없어. 기껏해야 몇 달 정도의 시간이니까……. 어차피 난 이미 질리도록 살아봤거든.”
“전부. 포기한 거야?”
“그렇게 물어도……. 나도 답 같은 건 몰라. 그저…… 이젠 원하는 게 없다고 해야겠지?”
마나는 물론 생명력까지 사용한 탓일까? 신하윤은 귓가에 들리던 빗소리가 점점 흐려졌다. 죽음마저 감내한 그 순간.
“하윤아-!”
신하윤은 익숙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자신의 몸을 들어 올리는 게 느껴졌다.
“……너구나.”
눈을 감았음에도 신하윤은 이혁의 목소리를 알아보았다. 신하윤은 눈꺼풀이 무겁지만 눈을 떴다. 흙투성이인 자신을 보며 이혁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자신의 꼴을 비웃을지 알았건만 그렇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신하윤이 느낀 이혁의 표정은 울상에 가까웠다.
분한 건지 슬픈 건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얼굴. 쏟아지는 소나기 탓에 얼굴에 흐르는 게 눈물인지 빗물인지 알 수 없었다.
“졌어.”
“알아…….”
이혁은 품에 안은 채 몸을 돌려 신유성을 마주했다. 이혁이 느낀 신유성의 위압감은 사신 같았다. 신하윤조차 이기지 못한 괴물이며 자신 따위는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결국 이혁이 택한 방법은 간절한 부탁이었다. 엉망이 된 신하윤을 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절박하게 부탁했다.
“……지금은 보내줘. 다신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 어떤 죗값이라도 치르겠다. 그러니 지금은 하윤이를 병원에…….”
신하윤은 그런 이혁의 행동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신하윤 자신조차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몸을 위해, 굳이 자존심을 팔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대로 도망가면 될 걸 왜 굳이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신하윤은 절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자신에겐 아무런 목표도 힘도 없다. 그러니 잘 보여도 좋을 게 없는 썩은 동아줄일 텐데 대체 왜…….
“제발, 부탁한다.”
이혁은 일말의 자존심까지 모두 버린 채 고개를 숙였다. 그건 오직 신하윤을 위한 행동이었다.
“……누나에게도.”
이혁의 부탁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선택일까?
“한 명 정도는 있었나 보네.”
신유성은 몸을 돌렸다. 악연의 종지부를 찍은 지금. 신하윤의 처우는 신유성에 손에 있었지만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를 택하진 않았다.
신유성은 분노로 얼룩진 감정이 얼마나 허무한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나를 위하는 사람이.”
벨벳을 안아줘야 할 손을 더럽힐 순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