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사무실을 빙자한 직사각형의 공간. 하지만 세상이 온통 하얗다. 공간의 경계도 없으며 빛의 경계도 없다. 신유성이 눈을 뜬 곳은 오직 백(白)만이 가득한 하얗고 하얀 세상.
“참 이상한 공간이지?”
서서히 정신이 든 신유성은 이시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몽환의 힘을 개방한 신하윤을 앞두고 신유성을 구하러 온 심각한 상황임에도 이시우는 평소처럼 넌지시 물었다.
“안녕 유성아. 기억은 어때?”
그건 마치 어느 날의 아침인사와 다르지 않아서 신유성은 그만 웃고 말았다.
“……너희들 덕분에 괜찮아. 원래 가지고 있던 기억을 전부 되찾은 기분이야.”
“전부? 하긴 텔레파시에 의하면 4개나 찾았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네. 흠, 정말 다행인데…… 내가 괜히 온 건 아니지?”
능글맞게 웃으며 능청을 떤 이시우는 신유성에게 하얀 의자를 내밀었다. 하얀 세상. 하얀 테이블. 하얀 의자.
“일단 앉아. 유성아.”
“고마워.”
게다가 이렇게 서로를 마주보며 의자에 앉고 나니 신유성과 이시우는 마치 고민 상담사와 의뢰인 같았다.
스윽-
이시우는 갑자기 텅 빈 공간에서 서랍을 여는 시늉을 했다. 그리곤 정말 수납함처럼 네모난 공간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놀랐지? 여긴 시간이 마음대로더라고. 덕분에 익숙해질 시간이 있었어.”
그리곤 이시우는 정체불명의 종이를 보여주었다. 그 종이에는 무신산에서 하산하는 신유성의 모습이 찍혀 있었고 가온 아카데미에 입학하는 모습도 남겨져 있었다.
“이 공간에선 네 기억을 종이로 보관해 뒀나 봐. 이때였지? 네가 가온에 입학한 게?”
이시우가 처음으로 찾아온 건 신유성이 가온에 입학하던 날의 기억이었다. 그건 신유성이 무신산을 벗어나 사회에 발을 뻗은 첫날의 기억이자 이시우를 만난 날이기도 했다.
“전학 첫날부터 그 주하진을 때려눕히고……. 크, 진짜 장난이 아니었는데.”
이 정체불명의 공간에선 신유성에 관한 기억이라면 별게 다 기록되어 있었다.
“이건 스미레랑 만난 기억인가 봐. 유성이 넌 D반에서도 꼴찌를 다투던 스미레를 데리고 첫 시험부터 세븐넘버가 됐지…….”
물론 이시우가 기억하는 신유성의 기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게다가 네가 협회 대회를 스미레랑 간다고 했을 땐 다들 얼마나 놀랐는데? 학교가 뒤집어졌잖아.”
열등생인 스미레를 파트너로 정한 신유성의 판단에 가온의 교장 진병철조차 다시 생각해보라며 찾아올 정도였다.
“물론 유성이 네 눈이 맞았지만.”
하지만 지금 와서 보면 신유성이 내린 건 옳은 판단뿐이었다. 결국 신유성은 던전에서 더블 공략을 성공시켰고, 스미레는 힘을 각성해 1학년 중 손꼽히는 실력을 갖게 되었으니까.
“내가 대단한 게 아니야. 스미레는 자신감이 필요했었던 것뿐이니까. ……오히려 도움을 받은 건 내 쪽인걸.”
“아니. 그게 네 대단한 점이야.”
물론 그럼에도 신유성이 겸손한 반응을 보이자 이시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일만으로 벅차거든……. 음,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까?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고 해야 할까?”
언젠가 이시우가 신유성에게서 느낀 날카로운 관찰력은 아마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일 것이다.
“누군가를 응원하는 것도, 누군가의 장점을 알아채는 것도, 모두 사람을 사랑하고 관찰하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능력이야.”
그래. 누군가의 장점을 발견한다는 건, 누군가를 관심 있게 지켜본다는 이야기이며, 그건 곧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난 천리안으로 아무리 먼 곳이라도 볼 수 있지만. 사람의 장점 같은 건 잘 못 보겠어. 누군가를 응원해줄 따뜻한 마음도 없어.”
신유성은 그 마음을 쉽게 이야기했지만 아쉽게도 이시우에겐 그런 마음이 없었다. 자신의 일을 처리하는 것도 벅차서 아버지에게 반기를 들고 가온으로 도망치다시피 온 탈주자였다.
자신조차 관찰하지 못한 남자가 어찌 타인을 관찰할 수 있을까?
타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재앙의 마녀 중 최흉(最凶)이라는 모르간의 공격에도 신유성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던 건 우연이 아니었다.
“그래. 사실 유성이 너를 구한 건 우리가 아니야.”
다시 서랍에 집어넣은 이시우는 기억이 기록된 종이를 하나씩 꺼내 테이블에 올렸다.
하나둘, 동료들의 모습이 담긴 종이들을 지나치자 신유성은 이시우의 의도를 이해했다.
“나도, 스미레도, 은아도, 에이미도, 벨벳도, 쵸텐 애들도.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유성이 네가 좋아서 모였거든.”
이 공간에는 거짓이 없다.
여기 기록된 기억은 오롯이 신유성이 만들어 낸 길이었다. 그리고 이시우는 그 모든 여정을 처음부터 곁에서 지켜본 사람이었다.
“정리하자면……. 결국 지금의 상황을 만든 건, 유성이 네가 걸어온 길이라는 거지.”
언제나 곧은 길은 아니었다.
때론 수풀이 있었으며 강을 건너야 할 때도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에 휘말리고, 무언가를 뉘우치며,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길의 가치를 평가하는 건 이른 일이다. 평가가 허락되는 건 언제나 여행의 마지막이다.
고된 여행이라고 나쁜 여행일까. 꾸불꾸불 고르지 못한 길이라고 그게 나쁜 길일까.
“……신하윤이 그런 말을 했어. 나는 여전히 버림받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꼬마라고.”
이시우의 말에 무언가를 느낀 신유성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그거참 대단한 악담이네…….”
“괜찮아. 틀린 말은 아니거든.”
아델라는 신오가문의 연못 옆에 숨어있던 그 날로 찾아와. 어린아이였던 자신을 위로해주었다.
“나를 버린 신오가문을 원망하던 마음도.”
무신산에 입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승에게 인정받기 위해 무리한 행동으로 다친 그 날.
“나를 거두어 주신 스승님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도.”
김은아는 바로 그날로 찾아와 스승에게 꾸중을 들은 신유성을 위해 여행을 함께 했다.
같은 5살의 몸이 된 건 의외였지만 참 즐거운 여행이었다.
“아무런 목표도 희망이 없던 그날의 기억도.”
스미레는 즐거움이라곤 찾을 수 없던 고아원의 생활에 찾아와 맛있는 케이크가 있다는 걸 알려주었다. 달콤한 케이크는 씁쓸한 녹차의 맛이 있기에 더욱 빛났다.
식사가 끝난 뒤 케이크와 녹차가 좋은 디저트인지 나쁜 디저트인지 정하는 건 신유성의 몫이었다.
[네. 정말.]
자신에게 밝은 미래가 있다고 믿을 수 있었던 건 아직 입에 남은 디저트의 황홀한 맛 때문이었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정하는 건 미래의 자신이에요. 제가 약속할게요. 그때의 유성 씨는 지금과 다를 거예요.]
이제 와 자신에게서 그 기억 중 무얼 뺄 수 있을까? 지금의 나를 만드는 건 과거의 나다.
“전부 지금의 나를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을 테니까.”
신오가문이 버린 5살의 신유성도 신하윤이 애정을 갈망하는 어린아이라 비웃었던 신유성도 모두 자신이다. 떼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우야. 난…… 아픔을 아는 사람만이 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고, 버림받은 인간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이라는 게 있다고 믿어.”
물론 이시우는 신유성의 생각도 못 한 대답 덕분에 멍한 얼굴로 한동안 말을 잃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역시 유성이 너는 대단해.”
자신은 과거의 기억을.
아버지를 원망한 그 기억들을 나쁜 것이라 이름 쓰고 네모난 금고에 굳게 가둬뒀건만.
“보통은 그게 나쁜 기억이라 정해두면 다시 열어볼 생각 같은 건 하지 않거든.”
신유성은 이미 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유성이 너는 그 기억마저 네 것으로 만들었구나.”
신유성의 이야기에 감화된 이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을 인정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이시우도 묘한 감정이 솟았던 게 사실이었다.
어쩌면 좋고 나쁨을 정하기엔 시기가 일렀을지도 몰랐다.
“그래. 아무리 싫은 기억이라도 그걸 떼어놓고 자신을 설명할 순 없겠지.”
끼익-
테이블에서 의자를 밀며 일어난 이시우는 신유성을 마주 보았다.
“참 이상한 일이지? 나는 너를 구해주러 왔는데. 오히려 도움을 받아버렸으니까.”
이시우는 언제 꺼냈는지 아까 종이와 함께 있던 물건을 신유성에게 던졌다.
턱!
신유성의 손아귀에 쥐어진 건 마음이 헤질 때면 언제나 단단하게 손을 묶을 때 쓰던 그 붕대였다.
“……이건?”
“종이랑, 그리고 머리끈이랑 같이 있었어. 사실 머리끈도 같이 주려고 했는데 이미 누군가 메준 거 같아서.”
신유성은 천천히 손에 붕대를 감았다. 강하게 손을 압박해주고 단단하게 고정시킨 붕대를 보니 마지막 남은 조각이 완성된 기분이 들었다.
“이겨서 돌아와!”
신유성은 이시우의 응원에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쥐었다. 다음 행동은 이미 붕대를 감던 그 순간부터 정해져 있었다.
투신류의 가장 기본인 0장.
하지만 미숙했던 자신을 완성시키고 F급 특성을 가진 불량품 아닌 자랑스러운 권왕의 제자로서 인정받은 그 날의 투신류.
척-!
신유성은 자세를 잡았다.
하얀 세상을 바라보며 지금 신유성이 부수고 싶은 건 무엇일까?
화악-!
신유성은 손을 뻗었다.
그날처럼 경건한 마음으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어린 날의 초심으로 마나를 실었다.
투신류 폭룡암쇄장(暴龍巖碎掌)
와장창-!
귀가 찢어질 듯한 폭음이었고, 유리로 이루어진 건물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모든 기억을 되찾은 신유성에게 몽환의 세상은 허상에 불과했다.
“응. 꼭, 이겨서 돌아올게!”
완전해진 도형은 더 이상 미숙했던 조각이 아니었다.
쾅-!
세상이 완벽하게 반전됐다.
하얀 공간은 형체를 잃었고, 하늘섬의 전경이 모습을 되찾았다. 세상의 경계가 명확해지고 숨어있던 신하윤의 모습이 또렷이 보였다.
“너…….”
순식간에 결계를 부수고 나타난 신유성의 등장에 신하윤이 말끝을 흐렸다.
“어떻게-!”
분노와 노여움이 가득한 그 얼굴로도 차마 신하윤이 숨기지 못한 감정이 무엇인지 신유성은 손쉽게 알아챘다.
“처음 봐. 그렇게 놀란 얼굴은.”
신유성은 붕대에 묻은 조각들을 아무렇지 않게 털어냈다.
“큭! 너…….”
지금 신하윤의 얼굴에 깃든 감정은 당혹스러움과 공포였다. 신유성이 단 한 번도 신하윤의 얼굴에서 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언제나 타인에게 군림하던 신하윤은 더 이상 여유롭지 못했다. 신유성의 고요한 마음과 동요로 일렁이는 신하윤의 마음은 극명한 대비가 되었다.
마녀의 힘이니, 세계의 정복이니 그렇게 떠들었지만.
“신하윤. ……이제 악연에 종지부를 찍을 시간이야.”
결국 자신의 누나도 한낱 인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