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8화
모르간의 힘을 각성한 신하윤은 신유성의 기억을 5조각으로 나눴다. 그러니 신유성은 자아를 잃은 채 몽환이라는 파도 속을 부유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왜 나는 기억이 남아 있는 거지?”
심지어 신유성은 자신이 4번째 조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본래의 기억들과 합쳐져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여긴…….’
뗏목에 앉은 신유성은 주위를 살펴봤다. 크레파스로 그린 것 같은 엉성한 파도와 색연필로 칠한 듯 하늘에는 어색한 주황색 태양이 보였다.
“모르간의 힘으로 만든 유배지 같은 걸까?”
자신을 이렇게 벨벳이 그리다만 색칠놀이 같은 요상한 세계에 가두다니 신하윤에게 이런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건 아니고~ 벨벳이 그린 스케치북이라고 하던데요?”
신유성은 혼자 있는 뗏목에서 에이미의 목소리가 돌리자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뗏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저 여기 있어요! 바다에!”
에이미의 목소리가 들린 곳은 뗏목이 아닌 바다였다.
“에, 에이미?”
“……후, 놀라셨죠. 파티장님? 저도 이해합니다. 갑자기 텔레파시로 무작정 기억을 찾아야 한다고 했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아무리 여기가 꿈이라 하여도 수다스럽게 떠들며 어깨를 으쓱이는 걸 보면 에이미가 맞았다.
“이렇게 쾌활한 모습을 보니……. 에이미 넌 진짜가 맞나 보구나.”
“으엑, 겨우 이 정도로 믿어주시는 건가요?”
“감이라는 게 있거든. 물론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진 않지만.”
“흠 확실히 일단 설명이 먼저겠네요. 일단 그럼 뗏목으로…….”
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상황에 신유성이 이마를 짚으며 기억을 더듬자 에이미는 무언가를 밟고 끙끙거리며 뗏목으로 올라왔다.
“어휴, 파도가 높으니까. 뗏목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네요. 멀미가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에이미. 여기가 벨벳이 그린 스케치북 안이라는 건 무슨 말이야?”
“문자 그대로의 이야기죠! 파티장님의 기억을 보호해둔 사람이 있거든요. 아니…… 사람이라고 하긴 좀 그런가?”
하지만 신유성의 눈에 사람이 있을만한 장소는 없었다. 주위에 펼쳐진 건 크레파스로 그린 듯 엉성한 바다뿐인데 대체 어디에 사람이 있다는 걸까?
“너도 이제 올라와.”
에이미는 그런 신유성의 물음에 답하기로 하듯 바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을 잡은 건 다름 아닌 흰색과 검은색이 섞인 지느러미.
“오, 오르카? 그럼 내 기억을 이 장소에 보호해준 게…….”
“흐얍!”
짧은 지느러미를 가진 오르카는 팔다리를 가진 에이미보다 더욱 힘들게 뻘뻘거리며 뗏목으로 올라왔다.
“오르카……. 글래스하트에 숨어 우릴 기다렸구나?”
머릿속에서 모든 퍼즐이 맞아 떨어진 신유성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오르카는 벨벳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도움이 되려 애썼다. 결국 그 정신력으로 글래스하트에 숨어 이렇게 도움을 준 것이다.
“……오르카라는 인형을 통해 토이 월드 밖으로 나온 건! 그리고 작은 주인님을 만난 건 제 장난감 인생에서 최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전 그 보답을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오르카는 이런 상황에서도 감사를 표했다. 버림받은 장난감이었던 자신이 사랑 받는 장난감으로 최후를 맞이한 것에 진심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신유성은 더욱 할 말이 없었다. 그저 똑같이 감사를 표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고마워. 오르카…….”
범고래 인형 오르카는 김은아와 축제에서 얻게 된 상품이고 토이킹은 탑의 보스였으며 벨벳은 레드드래곤 사도닉스가 남긴 알에서 태어났다. 생각해보면 참 우연히 겹친 인연이었다.
그러나 신유성에게 닥친 지금의 상황은 마치 필연처럼 보였다. 인형에 불과했던 오르카는 인연의 실이 되어주었고, 적이었던 토이킹은 신유성의 기억을 구했으니까.
“넌…… 벨벳의 좋은 친구였어.”
오르카는 진심어린 신유성의 감사에 헤헤- 하고 머리를 긁적이더니 반대편 지느러미로 충분하다며 손사래를 쳤다.
“최고의 친구라니! 장난감인 저에겐 너무 과분하고 벅찬 단어네요. 물론 무척 기분이 좋지만요.”
“오르카……. 사람 찡하게-”
옆에서 지켜보던 에이미가 훌쩍훌쩍 눈물을 훔치자 오르카는 화제를 돌렸다.
“그것보다 참 멋진 바다죠?”
“바다? 바다라기엔 너무 대충 칠하다가 그만둔 느낌인데?”
솔직히 말하면 벨벳은 똑똑한 것치곤 그림솜씨가 좋진 않았다. 물론 세상에는 예술 감각이 좋은 드래곤도 있겠지만 벨벳은 예외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르카는 벨벳이 그린 그림이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흠, 전 진짜 바다를 본 적은 없지만 저에겐 이 장소가 최고의 바다에요. 작은 주인님과 약속도 했거든요.”
“약속? 무슨 약속?”
부모와 자식은 닮기 때문일까?
처음엔 어린 김은아의 허무맹랑한 꿈이었지만 그 바톤은 벨벳이 이어받게 되었다.
“작은 주인님은 저와 함께 태평양을 건너기로 했어요. 전 인형이지만 물에 뜨니까요.”
다만 그 꿈은 이제 이룰 수 없다.
이제 자신은 오르카가 아닌 토이킹이었고 글래스하트에 숨느라 이미 영혼은 분리되었다. 더 이상은 돌아갈 곳도 친구로 남을 수도 없었다. 이미 오르카는 평범한 인형이 되었겠지.
“물론 이제 그 약속은 마님과 주인님이 대신 이뤄주셔야겠네요.”
“정말 그걸로 만족해?”
신유성은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췄다. 이건 소중한 이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장난감에게 보내는 존경과 감사였다.
“주인님의 꿈이 곧 제 꿈이니까요. 원래 제 목표는 훨씬 형편이 없었거든요.”
오르카는 토이킹이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장난감 왕국의 외로운 왕이었던 자신을 떠올렸다. 그저 일개 장난감이던 자신이 어떻게 탑의 보스가 되었는지 떠올렸다.
“아무리 멋진 장난감도 아무리 귀여운 인형도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어 아이였던 인간이 어른이 되어버리면 버림을 받죠. 토이 월드는…… 버림받은 장난감이 모이는 왕국입니다.”
오르카는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다. 그 끝에는 어린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도 장난감들을 버리지 못하도록 토이월드에서 평생 놀 수 있도록 만들고 싶었다.
“자신을 버린 인간들을 미워하는 장난감들이 가득한 곳……. 전 그런 토이월드의 왕이었습니다. 인간들이 다시는 우리를 버리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그 복수가 저희들의 꿈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르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역시 인간을 미워하는 건 의미가 없었어요. 전 장난감이니까요.”
장난감에게 인간과 함께 노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이 있을까?
심지어 이번에는 결말도 다르다. 오르카는 벨벳에게 버림받는 게 아니었다.
“게다가 전…… 버림받은 게 아닌 친구를 위한 최후를 맞이했죠! 저보다 행복한 장난감은 없겠죠.”
오르카에게 여한은 없었다.
“다만, 마지막 부탁이 있다면.”
펄럭-!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풍경이 변했다. 스케치북의 페이지가 넘어간 걸까? 엉성한 바다와 태양이 있던 세상은 이제 오르카와 벨벳이 동화를 읽으며 웃고 있는 장면이 되었다.
“작은 주인님을 구해주세요-!”
바다가 있던 장소에선 검은색과 흰색으로 그린 오르카와 낙서 같은 벨벳이 행복하게 놀고 있었다.
“그리고…… 비록 대답은 할 수 없지만 전 언제나 범고래 인형 오르카니까! 저에게 말을 한다면 계속 듣고 있겠다고…….”
오르카는 웃으며 범고래의 지느러미를 흔들었다. 스케치북의 페이지가 넘어가고 몸이 사라지는 와중에도 지느러미를 흔드는 걸 멈추지 않았다.
“계속 친구라고!”
삐뚤삐뚤.
난잡한 선으로 그려진 정체불명의 섬. 하늘색 크레파스로 그은 직선 하나로 묘사된 태평양. 벨벳을 태운 채 행복해하는 오르카를 끝으로 신유성의 정신은 멀어졌다.
‘그저 돌아갈 뿐이야.’
나머지 기억이 있는 원래의 자신으로 현실의 세계로 그렇게 돌아갈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진 게 없을까?
신유성은 자신이 걸어온 길로 하여금 모르간의 공격을 막아냈다. 벨벳을 구해달라는 오르카의 의지를 움켜쥐었다.
* * *
모르간이 떠난 이후 스미레와 라플라스는 비교적 안전한 내면의 성에서 나머지 기억을 되찾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
신유성이 대부분의 기억을 되찾은 이상 라플라스는 마지막을 위한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벌써 5개 중 4개를 되찾다니 네 반려도 동료들도 꽤 유능한 모양이구나.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해야겠구나.”
“네? 준비라고 하시면…….”
다만 라플라스는 지금의 상황을 스미레에게 어찌 설명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스미레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질색이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도 라플라스의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이야. 너는 좋아하는 것에 우위를 매겨 본적이 있느냐?”
그렇기에 라플라스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했다.
“순위 말씀이신가요?”
“그래 아무리 소중한 것이라 하여도 우위란 있는 법이고. 그 선택의 순간은 원할 때만 찾아오는 손님이 아니란다. 말하자면 불청객에 가깝지.”
이제 겨우 한 발짝 남았다.
스미레는 신유성이 기억만 되찾는다면 신하윤을 저지하고 이 지긋지긋한 상황을 끝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왜 라플라스가 지금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설마 라플라스 님…….”
무언가 이상을 눈치 챈 스미레가 말을 이으려 하자 라플라스는 검지에 입술을 대며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지금은 눈앞의 일이 먼저지 않느냐?”
그리곤 라플라스는 스미레에게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며 마지막 가르침을 속삭였다.
“바보처럼 무엇이 중요한지 잊은 건 아니겠지?
“저를…… 떠나시려는 건가요?”
탑의 기록에 따른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는 손가락질 받는 악녀였지만 적어도 스미레에 한해선 이야기가 달랐다. 스미레에게 라플라스는 자신을 부모처럼 아껴준 은인이었다.
“정을 주지 않았다면 좋았으련만 후회는 없구나. 너에겐 긴 시간이었을지 모르나, 나에겐 짧은 춘몽(春夢)이었느니라.”
하지만 라플라스는 그런 존재인 스미레에게도 지금부터 벌어질 일을 설명해주진 않았다.
“이 정도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만남도 이별도 한 장의 종이 같아서 그리 다를 바가 없지.”
그저 마지막 가르침을 위해 소중한 것에도 순서가 있으며.
“……그러니 상관없다. 아이야. 나를 잊어라. 너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이를 지키려무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법을 가르쳐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