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식사 시간.
어린 신유성이 본 아이들은 두 가지 부류로 나뉘었다. 식판을 들고 서로 떠들거나, 해맑게 웃으며 서로 장난을 칠 정도로 활발한 부류. 아니면 정반대로 축 처진 어깨를 한 채 마음을 닫아버린 부류.
신유성은 후자에 해당했다.
“유성이 넌 안 머거?”
여자아이 중 한 명이 식판을 들지 않은 신유성이 걱정이 된 듯 물었다.
“응…… 입맛이 업서.”
그러나 결국 힘없게 웃어 보인 신유성은 친구를 피해 멀찍이 떨어진 창가 자리에 홀로 앉았다. 신유성은 이 자리가 좋았다. 이렇게 동떨어진 곳에 앉으면 누구 하나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세상 다 산 듯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신유성의 곁에 누군가 앉았다.
“오늘은 식사할 기분이 아니신가 보네요?”
옆에 앉은 사람은 교사가 아닌 처음 보는 보라색 머리의 여자. 그러나 놀랄 건 없었다. 봉사활동을 온 학생을 본 게 처음은 아니었으니까.
“아까워라. 정말 맛있는데…….”
신유성이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면 “그렇구나.” 하고 자리를 피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계속 옆에 있어 주는 스미레의 행동에 신유성은 점점 마음을 열었다.
“……다음에는 머글게요.”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의 행동에 그저 싱긋 웃어 보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유는커녕 디저트로 나온 케이크를 접시에 한 조각 담아와 포크로 맛있게 먹어 보였다.
동생을 많이 돌본 스미레는 이럴 때 권유를 하면 오히려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권유보단 옆에서 맛있게 케이크를 먹어 보이는 게 오히려 아이들의 마음을 돌려놓는 법이었다.
흘깃.
그 증거로 어린 신유성이 흥미가 동했는지 눈을 흘기자 스미레는 포크를 내밀었다.
“한 번 드셔보실래요?”
어린 신유성은 동생만 3명을 돌본 스미레를 절대 이길 수 없었다.
“그럼…… 한 입만 머글래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안 좋다며 관심 없는 척을 하던 신유성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케이크를 ‘한 입’ 집어먹더니 방금 말했던 약속을 어기고 눈을 빛내며 몇 번은 더 케이크를 맛보았다.
“마, 맛있서…….”
맛보다 영양분이 고루 잡힌 식사만 해왔던 어린 신유성은 처음 먹는 달콤한 디저트의 맛에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럼, 이 녹차는 어떠세요? 입가심하기 정말 좋아요.”
신유성은 스미레가 준 케이크가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니 함께 권유한 녹차라는 음료도 무척 맛있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녹차를 마신 신유성은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쓰, 쓰고 맛없어…….”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의 반응에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케이크를 가리켰다.
“그럼 다시 케이크로 입가심을 해보시는 게 어때요?”
신유성은 녹차의 맛이 너무 씁쓸해서 이미 입맛을 버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케이크를 맛 봤을 땐 왜 스미레가 디저트에 녹차를 함께 마시는지 알 게 되었다.
“헉, 더, 맛있어…….”
녹차의 씁쓸한 맛이 입 안에 남아 있기에 오히려 케이크의 달콤한 맛이 더욱 강조됐다.
신유성은 기뻐하며 스미레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내려다보는 스미레의 표정은 어쩐지 너무나 슬퍼보였다.
“……저는 제가 참 싫었어요. 무슨 일이든 잘해내는 적이 없고 소심한데다. 조금만 나쁜 일이 생기면 항상 자책부터 했거든요.”
스미레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신유성을 보는 두 눈에 담긴 감정은 그렇지 않았다.
“유성 씨도 그런 적이 있나요? 스스로를 자책하고…… 슬퍼한 적이 있나요?”
어디선가 본 듯한 기억이 머릿속을 지나친다. 신유성은 스미레가 슬퍼하는 감정을 내비친 것만으로 가슴 깊은 곳이 아려왔다. 당장이라도 위로해주고 싶었는지 허겁지겁 일어나 스미레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으, 응! 엄청 슬퍼서…… 밥도 먹고 싶지 않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혼자 누우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올 때가 있어.”
자신을 내버려 두라던 신유성은 이제 스미레의 대화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네요. 좋은 일만 계속 이어지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날도 있으니까요.”
공감과 경청.
그 간단한 기술만으로 신유성은 오늘 처음 본 스미레에게 점점 마음을 열었다.
“응. 맞아. 좋은 날도 있지만 나쁜 날도 있어.”
“그리고~ 무척 나쁘다고 생각한 일이, 무척 좋은 일로 변하기도 해요!”
어린 신유성은 아직 자신의 머리론 이해하기 힘든 스미레의 말에 고개를 갸웃- 하고 움직였다.
“……정말?”
스미레는 그런 신유성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너무나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네. 정말.”
일본에서 도망쳐온 자신에게, 스스로를 믿지 못했던 자신에게 신유성은 변화를 안겨준 인물이었다.
지금은 기억 속을 헤매며 지금까지 벌어진 일도 자신의 모습마저 잊어버렸지만 상관없었다. 그 모든 일들은 스미레가 기억하고 있었다.
스미레는 어린 신유성을 보았다. 그리곤 방금 신유성이 먹었던 케이크를 가리켰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정하는 건 미래의 자신이에요. 제가 약속할게요. 그때의 유성 씨는 지금과 다를 거예요.”
이건 무책임한 위로가 아니었다.
언제나 곁에서 신유성을 지켜본 스미레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유성 씨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곁에 있고, 맛있는 밥을 먹으며 행복하게 웃으실 거예요.”
확신에 가득 찬 스미레의 장담에 어린 신유성은 조심스레 손을 뻗으며 물었다.
“……진짜?”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두려움이 가득했던 건 스미레만이 아니었다. 강인해 보이던 신유성에게도 이런 순간은 있었다.
그러니 이번에는 스미레의 차례였다. 언젠가 신유성이 자신의 손을 잡아준 것처럼 스미레도 어린 신유성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가…… 기억하고 있는 걸요?”
이미 스미레와 신유성이 있는 공간은 고아원이 아니었다. 무한한 공간 속 기억의 파편이 빠른 속도로 지나치는 걸보며 신유성은 말했다.
“……고마워 스미레.”
우주처럼 드넓은 공간 속에서 울려 퍼지는 진중한 목소리. 등을 돌린 신유성은 힘껏 스미레를 껴안았다.
“……정말 맛있는 케이크였어. 잃어버린 정신을 되찾을 정도였어.”
“유성 씨…….”
5개 중 2개.
아직 현실에선 1분도 흐르지 않았지만 정신의 조각 중 두 개를 되찾았다. 파훼가 불가능하다고 일컬어지던 모르간이 가진 최강의 기술을 상대로 엄청난 선전을 거둔 것이다.
* * *
천장에서 쏟아지는 밝은 빛.
정신을 잃었던 어린 신유성은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읍, 눈부셔…….”
신유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자신이 가진 마지막 기억은 1급 괴수인 아기 블루베어를 노렸다가, 2급 괴수인 어미 블루베어에게 쫒기는 장면이 마지막이었다.
“……여긴?”
무신산에 입산한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무리하게 괴수에게 덤빈 게 문제였을까? 정신을 잃었던 신유성이 머리를 긁적이자 뒤편에선 한숨이 들려왔다.
“실망이구나.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했거늘.”
신유성은 그제야 자신의 뒤에 앉아 있던 스승님을 발견했다. 상처투성이인 자신의 몸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옆에는 따뜻한 모닥불을 피워져 있었다.
‘내가 졌구나…….’
처음 있는 실수는 아니었다.
무신산에 갓 들어왔을 때와 비교하자면 오히려 실수 자체는 줄었다. 다만 이렇게 패배라고 인정할 만한 전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스승님…….”
무신산은 위험한 곳이다.
5살의 어린아이에겐 가혹할 정도의 환경인데다 괴수들이 득실거렸다. 언제 위험에 빠져도 이상하지 않은 장소다. 하지만 유원학은 그렇기에 무신산을 택했다.
“……전투의 위험을 무시하는 자는 절대 좋은 헌터가 될 수 없다. 스스로는 물론이고 동료들마저 위험에 빠트리지.”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알아야 존경을 알고 방심하지 않을 테니까. 헌터에게 생존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막 무신산에 들어온 신유성이 하늘 같은 스승의 철칙을 깨트렸다.
위험한 도전은 절대 하지 말라는 유원학의 명령을 어기고 예정에도 없던 괴수에게 덤벼들었다.
“대체, 왜 그랬느냐?”
동굴을 가득 울리는 근엄한 유원학의 목소리에도 신유성은 고개를 푹 떨어트리고 힘없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유원학은 어느 때보다 매서운 눈빛으로 턱을 괸 채 신유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유원학은 신유성의 행동이 어떤 마음에 의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고치지 않는다면 추후에 자신의 제자가 더 큰 위험에 빠질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계속 말해 보거라. 왜 내 명령을 어기고, 훨씬 위험한 블루베어와 전투를 했지?”
한참 생각하던 신유성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제가…… 괴물 곰을 이겨서, 스승님을 기쁘게 하고 싶었습니다.”
신유성이 보인 돌발 행동은 유원학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였고 자신을 택한 스승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렇군. 겨우 그까짓 것 때문에, 내 가르침을 어기고 네 목숨을 걸었느냐?”
어린 신유성은 유원학이 왜 화났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블루베어에게 패배했고 그 때문에 스승님이 실망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유원학이 동굴을 나가는 순간에도 어린 신유성은 그저 힘없이 모닥불을 보았다.
자신을 택해준 스승님을 실망시켰다는 생각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스승님을 실망시켰어.’
이건 어린 시절 한동안 신유성을 슬픔에 묶어둔 기억이었다.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계기기도 했지만 조각난 5개의 기억 중 하나가 된 것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역시 난…….’
물론 흔한 이야기다. 감정 표현에 서툰 스승과 상처받은 제자의 이야기는 원래대로라면 이렇게 오해로 끝을 마쳐야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원본의 기억에 없었던 등장인물이, 절대 나타날 수 없는 인물이 신유성이 있는 동굴을 찾아와.
“야-!”
신유성과 똑같이 어려진 몸을 하고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그게 아니쟈냐-!”
무신산에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여자아이가 있었다니?
방금의 충격은 새카맣게 잊어버린 신유성은 여자아이를 보며 놀란 얼굴로 물었다.
“너, 너는 누구야?”
신유성의 물음에 무신산에 어울리지 않은 하얀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허리춤에 손을 얹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나? 김은아! 이제부터라도 기억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