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3화
거대한 연못과 정원.
외벽에는 지나치게 큰 나무가 서있어서 신오가문의 대저택은 조경이 환한 오후에도 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사박. 사박.
아델라는 물기 없는 잔디를 밟으며 신오가문의 곳곳을 둘러보았다. 계단이 놓인 입구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사자상과 신오가문의 선조들의 동상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 저택에는 사람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이곳에 있을 텐데…….’
저택에 들어선 아델라는 천천히 신유성의 흔적을 좇았다. 하지만 신유성의 방으로 보이는 장소에서 나온 건 간단한 짐을 담은 여행용 케이스와 몇 가지 옷 정도였다.
저택의 어디를 뒤져도 신유성은 나오지 않았다.
‘당신이 있을 만한 장소…….’
아델라는 곰곰이 생각했다. 저택을 다 뒤져도 보이지 않는다면 신유성은 이 드넓은 부지 어디에 있을까?
넓이가 넓이인 만큼 콕 짚어 장소를 예측하는 건 어렵다. 하지만 평소 신유성의 행동을 떠올린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신유성은 언제나 생각이 깊어질 때면 혼자 숲에 들어가 수련을 했다. 새벽에도 홀로 기숙사를 나가 숲에서 수련할 때가 있었다.
저업- 찹-
아델라는 나무가 퍼진 숲으로 들어서자 신발 너머로 수분을 머금은 잔디와 흙의 촉감이 느껴졌다.
이런 걸 예감이라고 하는 걸까?
아델라는 숲속에 널린 수많은 나무 사이에서 바위를 발견했다.
자박- 첩-
아델라는 천천히 걸었다. 고요한 숲에서 울려 퍼지는 건 자신의 발소리밖에 없다. 어떤 인기척도 없다. 그럼에도 아델라는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말을 걸었다.
“왜 당신은……. 여기 홀로 있나요?”
그러나 바위 뒤편에선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아델라는 좀 더 다가갔다.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아델라는 그게 신유성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해합니다. ……남과 이야기조차 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죠.”
아델라는 조심스레 신유성의 앞에 앉았다. 5살에 불과한 어린아이의 마음을 열게 하려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만약 벨벳이라면 간식을 주거나 동화책을 읽어주겠지만 상대는 신유성이었다.
그러나 길었던 고민과 달리 아델라의 해답은 간단했다.
“아, 당신! 어깨에…… 벌레가 있습니다.”
진지한 어투였던 아델라가 놀라자 신유성은 화들짝 놀라 자신의 어깨를 돌아보았다.
푹-
하지만 그건 아델라의 장난. 아델라의 검지는 신유성의 볼을 부드럽게 찔렀다.
“소, 속아써…….”
벨벳에게 당했었던 기술을 이렇게 유용하게 써먹다니. 만족한 아델라가 후훗- 하고 웃자. 신유성은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이건 조금은 신유성의 마음이 열렸다는 증거.
“저와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요?”
아델라가 조심스레 묻자. 신유성은 어린아이에겐 어울리지 않는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그래써……. 나 같은 건 불량품이라 필요 없다구…….”
기어들어가는 신유성의 목소리를 들으며 아델라는 수많은 감정이 교차했다.
“그래서…… 슬펐습니까?”
“응, 슬펐어.”
아델라는 벨벳과 지냈던 경험 덕분인지 어린 신유성에게도 친구처럼 다가갔다.
“왜 슬펐습니까?”
“내가, 모두를 실망시킨 거 같아서…… 그리고…….”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순수하다. 감정을 숨기는 데 능숙하지 못하고 한 번 물꼬가 터진 이야기는 순조롭게 이어졌다.
“이제…… 못 보니까.”
“가족들을 좋아했습니까?”
“응.”
“당신을 버렸어도?”
신유성이 끄덕끄덕- 세차게 고개를 움직이자 아델라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군요.”
아델라는 늦게나마 깨달았다.
자신이 알고 있는 신유성이라는 존재는 우연히 탄생한 자연의 산물 같은 게 아니다. 그 경험이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그 기억은 신유성의 것이며, 지금의 신유성을 만들고 있었다.
“……당신은, 집을 떠나 혼자가 되는 게 무서운 거군요?”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 정확한 아델라의 말에 신유성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중한 17세의 신유성에겐 상상도 못할 모습이지만 어린 시절의 모습만 보자면 영락없이 벨벳과 닮아 있었다.
미소를 지은 아델라는 손바닥 위에 얼음 꽃을 피웠다.
“그러네요. 홀로 남는 건 겨울과 같으니까요. 당신 같은 어린 아이에겐 가혹한 추위겠죠.”
벨벳에게 동화를 읽어준 덕분일까. 아델라는 냉기를 통해 동화의 한 장면처럼 세찬 겨울에 맞서는 어린 신유성의 모습을 만들었고, 나쁜 마녀의 모습도 만들어냈다. 어린 신유성이 신기해하며 눈이 커질수록 벨벳이 누구를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왜 신유성과 벨벳을 기쁘게 하는 방법이 다르다고 생각했을까?
분명 케이크를 주면 기뻐할 테고, 동화를 읽어주면 귀를 쫑긋- 거리겠지.
“하지만 겨울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봄이 찾아오고. 다른 소중한 이들이 당신 곁을 채우겠죠.”
신유성을 닮은 냉기는 마녀를 이기고 겨울을 버텨낸 끝에 손바닥 위에서 만세를 했다.
기뻐하는 신유성의 곁은 익숙한 파티원의 얼굴들이 채웠다.
“그날이 되면…… 당신은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 다른 이의 추위에 공감하며 손을 뻗어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되겠죠.”
동화는 끝났다.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지 그 희망의 열쇠는 신유성이 지니고 있었다. 만약 떠올리지 못한다면 아델라와 신유성은 이 세계를 영원히 나갈 수 없었다.
끝없는 몽환 속을 헤엄치며 자신을 잃는 결말밖에 남지 않았다.
“따뜻한 사람…….”
신유성은 아델라를 보며 그저 웃었다. 착각일까, 원래 신유성의 모습이 겹쳐 보인 그 순간.
화악-
어린 신유성은 아델라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동화책을 읽는 솜씨가 많이 늘었는 걸…… 아델라?”
아델라는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기억을 되찾은 증거처럼 신유성은 어린아이가 아닌, 원래의 몸으로 부서져라 아델라를 껴안고 있었다.
* * *
라플라스가 스미레의 동료들에게 이야기를 전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그 순간.
- 믿기지 않는 속도구나. 네 동료 중 하나가 벌써 기억 조각을 찾아냈느니라.
라플라스는 뜬금없는 승전보를 알렸다.
“네? 라, 라플라스 님이 텔레파시를 사용하신지 몇 초도 지나지 않았는데요?”
- 그건 현실의 시간일 뿐, 몽환 속에서 시간은 자유롭단다. 절대적인 규칙을 두고 움직이지 않지. 물론 그걸 감안해도 빠르다만…….
스미레는 라플라스의 설명에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주의 모습을 한 공간 속에서 자리를 잡고 있던 행성 중 하나가 정말 사라져 있었다.
“그렇다면 저도 얼른!”
- 잠깐 아이야. 섣불리 선택하지 말거라. 5개의 기억 중 오직 너만이 해결할 수 있는 행성이 존재할 수도 있느니라.
신유성의 기억을 조각낸 5개의 행성은 각자 담은 경험이 다르다. 몇몇 기억들은 각자의 개성이나 경험이 존재하지 않으면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라플라스 님은 기억을 선택하지 않고도 미리 내용을 알 수 있다는 이야기신가요?”
- 그래. 꿈이라는 게 어찌 작동하는지 원리를 알고 그 원리에 의거해 몽환의 힘을 분석한다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이건 겸손이라 말해도 되는 걸까? 라플라스는 인류가 아직 발끝에도 닿지 못한 지식을 별 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꾸, 꿈의 원리요?”
- 꿈은 인간의 뇌가 기억을 재가공하는 순간 생기는 처리 과정이니라. 흠, 음식으로 치자면 소화 과정이라 할 수 있지.
그러나 라플라스의 지식은 필기시험은 모범생인 스미레에게도 너무 어려운 지식이었다.
“아, 네…… 소화 과정!”
- 무슨 음식을 먹을지 정하는 건 쉽지만…… 그렇다고 모든 소화과정을 컨트롤 하는 건 아니지.
좀처럼 스미레가 갈피를 잡지 못하자 정확한 비유가 떠오른 라플라스는 질색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 아무리 모르간이라도 소화기관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조정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 손이 많이 가는 데다 역겹기도 하고…….
“아…….”
모르간이 테마와 메뉴를 정할 순 있지만 조각이 되어 흩어진 순간 신유성은 손을 떠난 상태였다.
- 그렇기에 모르간은 근거를 만들었지. 그게 오감과 감정이라는 토대…….
이렇게까지 정보가 있다면 남은 선택지를 통해 신유성의 기억을 구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 남은 4명의 신유성 중에선 오직 스미레 너만이 구원 할 수 있는 신유성도 있을 거란 이야기니라. 그러니 한 번 찾아 보거라.
스미레는 라플라스가 일러준 신유성의 기억을 토대 삼아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졌다.
라플라스의 말처럼 자신만이 구해줄 수 있는 신유성의 기억은 무엇이고, 자신만이 줄 수 있는 희망의 씨앗은 무엇일까?
물론 차이점은 있었다.
스미레는 신유성과 함께 신오가문을 찾아간 유일한 파티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닐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 중요한 건, 자신만이 신유성에게 줄 수 있는 즐거움.
“……정했어요.”
엄숙한 표정으로 결단을 내린 스미레는 라플라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촤악-!
선택을 마친 스미레는 손을 뻗었다. 행성이 가진 중력에 마치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탓, 쏴아아아-!
그렇게 스미레가 착지한 곳은 다름 아닌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밤이었고, 검은색 차를 마중 나온 교사가 보이는 한 고아원이었다.
“여기가…….”
스미레는 선택을 내렸다.
여기엔 오직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는 신유성이 있다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