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아카데미의 최강투신-379화 (378/434)

제379화

기억은 조각이다.

시원한 숲을 떠올리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을 느끼고, 타오르는 모닥불을 보며 투박한 요리 솜씨로 만들어 주신 스승님의 고기구이를 떠올리는 건 그게 정답이기 때문이리라.

‘그렇다면 내가 겪은 일들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서일까?’

신유성은 발걸음 하나마다 조각들이 퍼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발이 계단에 닿을 때면 자신의 감정이 고요한 호수에 번진 파장처럼 번져 나갔다.

저벅.

하나에 절망을.

둘에 슬픔을.

셋에 사랑을.

넷에 슬픔을.

다섯에 외로움을.

여섯에 후회를.

기억은 그저 존재할 뿐이다. 선악의 구별은 없다. 그렇지만 마치 날카로운 검과 같아서 때론 신유성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타인을 원망하기보다는 스스로를 변화시켜 맞서는 게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 노력은 타인을 바꿀 수 있다고, 악인이라 생각했던 이도 바뀔 수 있다고 믿었다.

저적- 적-

그렇다면 지금 벌어진 현재는 과거에 내린 오판 때문일까? 신유성은 하늘에 새겨진 붉은 육망성을 올려다보았다. 천공섬에서 비섬에 이르기까지 드넓게 펼쳐진 별 모양의 결계는 누가 보아도 벨벳의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벨벳의 마나…….’

신하윤의 판단에 자비는 없다.

신유성에게 글래스하트를 되찾을 힘이 없었다면 벨벳의 짧은 삶은 그걸로 끝이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다니 신유성의 상식으론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정해야 했다.

세상에는 그런 부류의 인간이 있으며 그게 다름 아닌 자신의 누나라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신유성의 갖은 감정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껴지는 건 순수한 분노.

“……유성이 너도 화를 내는 순간이 있구나?”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고지대에서나 볼 법한 하얀 물안개 속에서 신하윤은 미소를 지으며 걸어 나왔다.

벨벳과 오르카에게 그런 짓을 하고도 당당히 웃고 있는 신하윤의 모습을 본 신유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설령 분노하였어도 그 분노를 내비치는 건 오히려 내면이 흔들리는 일이다.

“글래스하트를, 벨벳의 마나를 돌려줘.”

하지만 차갑게 가라앉은 신유성의 목소리를 들은 신하윤은 그 낌새를 놓치지 않았다.

“벨벳이라~ 유성이 너도 참, 귀여운 구석이 있구나? 몬스터에게 정을 붙이고…… 이름까지 지어주다니.”

신하윤은 상대를 괴롭히는 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말 하나로 속을 긁어내고 가장 예민하게 반응할 곳을 후벼냈다.

“……몬스터?”

“유성이 너, 잊은 거야?”

사아아-

신하윤의 손 위에서 물안개가 아름답게 춤을 췄다. 그 움직임은 원래 신하윤이 지닌 특성인 [염력]처럼 보이지만 어딘가 달랐다.

물안개는 살아있는 생명처럼 합쳐졌고 움직이며 모습을 바꿨다.

살랑살랑- 귀여운 꼬리. 머리에는 뿔이 달린데다 사도닉스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귀여운 꼬마 아이.

“캬항-! 아빠!”

물안개가 벨벳의 모습으로 변해 신유성을 반기자 신하윤은 벨벳의 뿔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지금은 무해해 보이는 인간의 모습이라도 어디까지나 본질은 드래곤……. 공략해야 할 몬스터잖아?”

신유성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 하려 한다면 신하윤은 이미 한 수 위였다. 어떻게 해야 타인의 감정을 컨트롤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반응하게 만들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화아악-!

“난 헌터거든. 그런 위험한 몬스터를 처리하는 게 내 일인걸?”

벨벳의 심장에서 마나의 불길이 세찬 물줄기처럼 빠져 나왔다.

“캬, 캬욱-!”

순식간에 바닥에 쓰러진 벨벳은 괴로워하며 손을 뻗었다. 가엾게 손을 뻗은 벨벳은 서서히 물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이건 신하윤이 새롭게 각성한 몽환의 힘. 단순한 물안개일 뿐이다. 스스로를 그렇게 다짐했음에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 신유성을 감싸 안았다.

몸의 감각이 온통 신하윤에게 집중 됐다. 당장이라도 힘으로 신하윤을 제압해 몸 안의 분노를 남김없이 쏟아내고 싶었다.

이건 명백한 분노겠지.

차갑고도 뜨거운 분노.

“……언젠가, 신하윤 너에게 연민을 느낀 적이 있었어.”

신유성은 더 이상 신하윤을 누나라고 부르지 않았다. 가족의 연을 기대한 적은 없다. 그런 감정은 이미 끊어버린 지 오래였다.

“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외롭고 쓸쓸한 길을 걸을 테니까.”

신유성은 유원학에게 받았던 머리끈을 벗었다. 첫 가르침과 함께 받았던 첫 선물은 참 각별한 기억이 깃들어 있었다.

힘의 무게.

고결한 용기.

인간에 대한 사랑.

신오가문에 있었던 이전까진 절대 알지 못했던 가치들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준에 불과했어. 넌 외롭지도 쓸쓸하지도 않을 거야.”

그 가르침이 옳다고 믿었다.

“넌 타인에 대한 존중도 공포도 사랑도 무엇도 없는 괴물이니까.”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그 가르침대로 최강의 투신이 되어 자신의 두 주먹을 옳은 길에 사용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스승의 가르침에 어긋나고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말을 조용히 읊조렸다.

“……넌 인간이 아니야. 이 세상에서 없어져야 할 몬스터는 벨벳이 아니라 너야.”

펄럭-

신유성의 손을 벗어난 머리끈은 바람을 타고 나부꼈다. 벗어던진 건 가르침일까, 신념일까.

신유성의 마나가 피어올랐다.

평소의 푸르른 기운이 아닌, 너무나 짙은 붉은 기운은 살기가 형상화 된 듯 보였다.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살기네. 너 그 도마뱀의 복수로 날 찢어 버리고 싶나 봐?”

신하윤이 큭큭- 거리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 순간. 시간을 잘게 쪼갠 찰나에 불과한 그 시간 동안 신유성의 손은 이미 신하윤의 몸을 꿰뚫었다.

퍼억-!

물리적인 힘이 수분을 터트리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신하윤은 물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너답지 않네.”

하나의 물안개가 미소를 지었고.

“힘 조절도 하지 않는 거니?”

“넌 방금 선을 넘었어.”

“그 도마뱀의 마나 덕분에 난 초월 했거든.”

신유성의 주위에서 솟아난 여러 분신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몽환의 힘과 염력을 2가지 특성을 가진 최초의 헌터.”

“태생부터 F급인 너에게 패배할 순 없지.”

물안개 속에서 몽환이 피어났다.

교복을 입은 분신들 사이에서 머리를 푼 신하윤은 드레스를 입은 채 신유성을 맞이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겠지. 그래서 난 단 한 번도 너희의 이해를 갈구 한 적이 없단다.”

태어난 순간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정답을 찾을 때까지 반복되는 삶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래. 평범한 인간은 절대 모를 테지. 기억의 조각이 때로는 사람을 죽이는 맹독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말을 하던 신하윤의 몸이 끈적이는 액체가 되어 녹아내렸다. 기분 나쁜 보랏빛 안개가 주변을 감싼다. 액체는 굳었고 색을 변화시켜 다른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다.

“인정해. 유성아. 넌 강해.”

7살의 모습으로 변한 신하윤은 뒷짐을 진 채 아이들 특유의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가주조차 알아채지 못했지만. 넌 선택 받은 인간이지.”

마치 버섯이 피어나듯 땅에서 분신이 하나 더 솟아올랐다. 어린 신하윤은 주변을 걸어 다니며 바닥에 핀 꽃의 향기를 맡았다.

“아름답고, 강하고, 너만의 곧은 신념이 있어.”

이번에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신하윤이 드레스를 입은 채로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신하윤의 달라진 외면은 머리를 풀었다거나 드레스를 입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호수처럼 깊은 보랏빛 눈은 신하윤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뭐든 할 수 있다고 믿었겠지?”

신하윤은 마치 신유성의 본질을 꿰뚫는 것처럼 말했다. 주먹으로 몸체를 타격해도 펑- 소리를 내며 구멍이 뚫린 몸에선 연기만 피어올랐다.

“그렇다면 정말 달라졌을까?”

신하윤은 자신의 말처럼 초월했고 마녀가 되었다. 힘의 근간인 아우로라는 양분이 되어 몸에 흡수됐다.

“모르간의 힘을 되찾은 지금의 난 뭐든 알 수 있거든. ……네 마음과 기억까지도. 너흰 실패한 거야.”

신유성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았다.

- 또, 내가 망쳤어…….

거기엔 절망한 채로 고개를 숙인 스미레가 있었고.

- 내가 부탁할게……. 제발……. 우리 오빠 좀 구해줘…….

눈물을 흘리며 쓰러진 김은아가 있었다. 분명 어디선가 본 풍경이다. 이건 절대로 신하윤이 알 리가 없는 기억이다. 신하윤은 귀여운 새끼 동물에게 그러하듯 스미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성아. 난 네 마음을 알아.”

공기를 타고 전달되는 게 아닌, 바로 뇌리에 박히듯 다가온 신하윤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달콤하다.

“좌절하는 여자아이에게 희망을 주고, 누군가를 구하며 잠깐은 행복했겠지. ……네 존재를 인정받았으니까.”

환각 때문일까.

아니면 주위를 감싼 보랏빛 안개 때문일까. 신하윤의 분신들이 자신을 에워싸자 신유성은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나를 안다는 듯. 말하지 마.”

입으론 부정했지만 모르간이 아무런 정보도 없이 떠드는 건 아니겠지. 모르간은 이 몽환의 세상에서 규칙을 만드는 존재니까.

“부정해도 의미 없어. 나를 속이는 건 가능하지만, 유성이 널 스스로 속일 순 없으니까.”

신하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신유성은 주먹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졌다. 단단하게 지탱되던 땅이 늪처럼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사실 너도 알고 있잖아. 네가 몬스터 따위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건, ……우리에게 버림받은 기억 때문이라는 걸.”

마녀는 강하다.

크로노스의 희생이 없었다면 겨울의 마녀 루이스를 이길 수 있었을까? 온전히 자신의 실력만으로 압도 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혼자 신하윤을 찾아온 건 오만이 아닐까?

몽환의 세계에선 감정이 증폭된다. 평소라면 들지 않을 의심과 절망이 손쉽게 피어올랐다.

“가여운 유성이.”

신하윤의 몸은 천공섬보다 거대해졌다. 하늘에 닿은 거대한 신하윤은 정말 가엾다는 듯 안타까운 얼굴로 속삭였다.

“정말 모르는 거니? 그 도마뱀과 파티원은 절대 네 가족이 될 수 없다는 걸.”

거대해진 신하윤의 손가락이 쓰러진 김은아를 짓눌렀다. 김은아는 찢어질 듯 비명을 질렀지만 이 모든 건 환각에 불과했다.

“유성 씨-!”

스미레가 애타게 소리쳐도.

“흐갸악, 파티장님!”

놀란 에이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명을 질러도.

“쿨럭, 난 괜찮아 유성아!”

이시우가 입가에 피를 흘리며 올려다보아도.

“당신 부디…….”

아델라가 절망에 찬 단말마를 질러도 신유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화악-!

몸이 짓눌리는 풍압과 함께 거대한 신하윤의 발이 동료들의 몸을 짓밟았을 때도 신유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에도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게. 알겠지 유성아?”

자신을 절망케 한 신하윤이 또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도발했지만 신유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건 정신을 흐리는 환각과 나른한 절망 속에서도 신유성의 마음속에 피어난 한 가지 감정 때문이었다.

화아아-

신유성의 호수처럼 깊은 눈이 신하윤을 직시했다. 그 눈에 담긴 마음은 너무도 고요해서 얼핏 보면 감정이 없는 듯 보였다.

동료까지 들먹인 신하윤의 도발은 평소의 신유성이라면 휘둘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신유성은 이미 가르침을 버렸고, 신념을 버렸다. 머리끈이 풀린 머리카락은 바람에 흩날렸다.

감정이 덧없어진 마음으로 본 창은 무색의 세상 같았다. 초라해진 색감은 사물의 본질을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

신유성은 오래된 악연인 신하윤을 보며 조소했다.

“겁에 질린 건 네 쪽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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