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꿈이란 무의식의 세계다.
일상에서 겪은 감정이나 기억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생리현상이며 대부분 지금의 상황이 꿈이라는 걸 인지하는 순간 잠에서 깨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벨벳의 경우는 달랐다.
지금 벨벳은 피곤한 몸을 회복하기 위해 잠이 든 것도 아니었으며, 수면 상태의 도움을 받아 미처 처리하지 못한 기억을 정리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캬항! 방이 엄청 많아!”
지금 벨벳은 아델라가 사용한 마나구름과 바쿠의 사탕 같은 아티팩트의 힘으로 꿈의 세계를 탐방하고 있었다.
끼익-
경첩 소리가 날 정도로 오래된 낡은 문을 여니 벨벳은 자신이 태어나던 순간이 보였다.
껍질을 깨고 알에서 태어난 벨벳과 그런 자신을 둘러싼 부실의 사람들의 모습. 심지어 벨벳은 태어나자마자 폴리모프를 사용하고 말을 했으니 정말 드래곤다운 비범한 탄생이었다.
“음음. 마자, 알에서 태어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어찌…….”
이 모든 게 꿈인 걸 알지만 방을 하나씩 둘러보는 건 꽤 재미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앨범이나 동영상을 확인하는 것과 비슷하지만 좀 더 생생하다고 할까?
“맞아 이런 일도 이썼지.”
참고로 벨벳이 여러 확인을 거쳐본 결과 문의 모양은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 주방에 달린 문과 비슷한 건 스미레에게 케이크를 배웠을 때 저장된 기억이고, 고풍스러운 목재로 만들어진 문은 에이타에서 시험을 본 기억이다.
물론 범고래가 그려진 문은 당연히 오르카와의 기억.
“오르캬…….”
한 순간에 시무룩한 표정이 된 벨벳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오르카는 범고래 친구들이 안 보고 싶어?”
“저는 범고래 인형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범고래보다 인형 쪽에 가깝죠! 진짜 범고래는 귀여워 보여도 극악무도한 사냥꾼이거든요. 상어의 간을 빼먹죠!”
“호엑-”
오르카는 7살에서 10살 정도의 지능을 가졌지만 의외로 박학다식했다. 하루종일 책을 읽는 벨벳도 모르는 지식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크…… 작은 주인님 영혼이란 무엇일까요.”
“……캬음, 인생이란 조은 거야.”
“작은 주인님! 그럼 인생이란 무엇일까요?”
“캬항! 인생이란! 스미레 엄마가 만든 케이크를 먹고 행복해 하는 거야!”
물론 오르카는 생긴 것과 걸맞지 않게 그 어렵다는 철학책을 좋아해서 벨벳이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떠들 때도 많았다.
“존재란 무엇일까요? 여기저기 장난감을 옮겨 다니는 저라는 존재의 영혼은 어디에 있을까요!? 아니 영혼이라는 게 존재하긴 하는 걸까요?”
꽤 긴 시간을 토이킹으로 살아온 오르카는 고뇌하는 장난감이었다. 뜬금없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거나, 영혼이 무엇인지 탐구하는 장난감이라니 오르카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유일한 범고래 인형이었다.
“작은 주인님이 케이크를 먹고 기뻐하는 건, 몸의 반응일까요? 아니면 영혼일까요!”
“맞지. 맞지. 케이크는 마싰어.”
그러나 오르카와 보낸 시간은 이제 모두 과거일 뿐이다.
“작은 주인님은 이렇게 돌을 많이 주워서 어디다 사용하실 겁니까?”
“돈을 잔뜩 벌 거야!”
“돈을 잔뜩 벌면 어디에 사용하실 건데요?”
“벨벳은 돈을 벌고 이쓰면 마음이 편해져…….”
“역시 이성보다는 드래곤의 본능이라거나 탐욕 같은…… 원초적인 접근인 걸까요?”
“마자. 그런 거지.”
“그럼 제가 돕겠습니다! 작은 주인님이 기뻐하시는 편이 저도 좋으니까요.”
물론 최후의 순간 오르카는 기뻐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게 아닌, 주인을 구하기 위한 최후였으니 장난감으로선 최고의 호상이었다.
그러나 벨벳에게 오르카는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친구였다.
살랑살랑-
이곳, 저곳 범고래가 그려진 문을 찾아다니며 즐겁게 기억을 엿보던 벨벳은 우뚝- 자리에 멈췄다.
더 이상 오르카를 볼 수 없을지 모른다는 현실을 깨달았기 때문일까?
“오르캬…….”
벨벳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그 순간 포탈이 열리듯 신기하게 생긴 문이 꿈의 복도에 나타났다.
“캬, 캬항?”
꿈의 복도는 정리된 기억을 다시 확인할 뿐이니 잠들어 있는 벨벳에게 새로운 방이 생길 리 없다.
그러니 이건 새롭게 생겼다가 아닌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다.’로 보는 게 옳았다.
종종-
참새처럼 뜀걸음을 뛴 벨벳은 이리저리 문을 둘러보았다. 지금까지 벨벳이 열었던 문은 평범한 방문들 같다면, 방금 나타난 문은 잘 가꿔진 화단처럼 초록색 잎 위에 잔뜩 꽃이 피어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벨벳은 빼꼼- 문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벨벳에게 보이는 건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꽃밭과 눕기 좋게 잔디가 깔린 초록의 숲.
“여긴 어디지…… 벨벳도 업써!”
이 방이 특이한 점은 또 있었다.
지금까지 열었던 ‘기억의 방’은 모두 과거에 벌어진 일을 회상하기에 벨벳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곳엔 벨벳이 없었다.
포근해 보이는 초록빛 잔디에서 기다리고 있는 건 벨벳처럼 뿔이 달린 붉은 머리의 미녀.
“안녕?”
붉은 머리 여자는 싱긋 웃으며 미소를 지었지만, 벨벳은 낯선 사람을 조심하라는 스미레의 말을 기억했는지 아니면 신하윤에게 겪은 일 때문인지 의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벨벳처럼 뿔이 있네…….”
반면 붉은 머리 여자는 벨벳이 신기한지 이리저리 꼼꼼히도 살펴보았다.
“음, 개구쟁이 같은 게 날 닮은 거 같기도 하고……. 타루를 닮은 거 같기도 하고…….”
“캬흠, 너는 누구야?”
벨벳이 좀처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자 붉은 머리 여자는 자신의 뿔을 가리키며 웃었다.
“너랑 닮은 뿔이 있고 붉은 머리인 걸 보면…… 같은 레드 드래곤이 아닐까?”
“허걱, 벨벳이 레드 드래곤이야? 그냥 드래곤인지 아라써.”
“뭐~ 상관없지 않을까?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니까.”
신하윤에게 당한지 얼마 되지 않았으면서 상대의 태도에 벨벳은 서서히 의심을 풀어갔다. 이런 걸 보면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벨벳은 어쩔 수 없는 어린아이였다.
“그나저나 벨벳이라니. 귀여운 이름이네? 타루가 지었을까?”
“아니야. 벨벳은 그런 사람 몰라. 벨벳의 이름은 스미레 엄마가 지어써!”
스미레 ‘엄마’라는 호칭에 붉은 머리 여자는 짐짓 놀라더니 이내 담담해졌다.
“그렇구나…….”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드래곤에게 인간의 삶은 짧고 강렬하다. 신유성이 정말 그녀가 찾던 타루라면 새로운 인생을 응원할 것이고, 그녀가 아는 타루가 아니더라도 만족할 수 있었다.
자신은 그토록 갈구하던 안식을 얻고 구원받았으니까.
“캬흠, 근데 누구야? 벨벳이 모르는 사람이야.”
“나? 음…… 내가 누군지가 중요할까? 어차피 나의 이야기는 끝이 났거든. 그것보다 중요한 건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아니겠니?”
그러나 벨벳은 붉은 머리 여자의 담담한 답변에도 만족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름은 알아야 해!”
결국 붉은 머리 여자는 졌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이런 부분까지 자신을 닮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사도닉스. 내 이름은 사도닉스야. 정말 특이한 이름이지?”
상대의 이름을 들은 벨벳은 끼고 있던 팔짱을 풀었다.
“나는 벨벳이야!”
“그건 알고 있어.”
“그래도 소개해야 해! 벨벳은 알아 자기소개는 엄청 중요한 거야.”
모든 드래곤이 그렇지만 사도닉스는 헤츨링이던 어린 시절부터 금화라면 사족을 못 쓰는 탐욕적인 드래곤이었다.
또 모험을 좋아해서 몰래 레어를 빠져나와 인간 세계에 가기도 했고,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드래곤 로드의 서재를 제집처럼 드나들었을 정도였다.
“후훗, 그렇구나.”
그 자유분방한 드래곤 헤츨링을 이렇게 예의 바르게 키운 걸 보니 이제 사도닉스는 걱정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벨벳. 너는 내가 왜 여기에 왔는지 알고 있니?”
절레절레.
벨벳이 고개를 젓자 사도닉스는 자세를 낮춰 쭈그려 앉아 벨벳과 시선을 맞췄다.
“난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거든. 그래서 너에게 아주 큰 도움이 필요할 때 나타나기로 했어.”
“헉, 마자…… 벨벳은 도움이 필요해!”
“뭐든 말해봐. 벨벳. 네가 원하는 건 어떻게든 이루어 줄게.
사도닉스는 사라지는 순간 벨벳의 알에 자신의 의식을 일부분 남겼다. 거기다 위험한 순간 도움이 되기 위해 다량의 마나까지 봉인진에 걸어두었다.
무려 레드 드래곤 로드가 죽기 전 만든 술식이다. 그 힘으로 이루지 못할게 무엇이 있을까?
“벨벳의 친구가 주거써…… 살려죠…….”
그러나 벨벳이 요청한 건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다.
“음…… 미안. 아무리 나라도 죽은 사람을 살릴 순 없어.”
“오르카는 친구지만 사람은 아니야! 오르카는 범고래 인형이야.”
그러나 서로 말을 할수록 이야기는 미궁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그러니까 인형이 죽었는데 살려달라는 이야기인 걸까? 그렇다면 오르카라는 그 인형은 자아가 있는 골렘을 말하는 걸까?
“그러니까, 자아가 있는 인형이 파괴 되었고…… 넌 그걸 되살리길 원한다는 거야?”
“헉, 응! 마자!”
“정말 골렘에 담긴 의식이 휘발되어 버렸다면 문제지만. 촉매에 기억만 제대로 저장되어 있다면 복구는 어려운 일이 아니야.”
아무리 천재인 벨벳이라도 드래곤 로드의 지식을 알아 들을 순 없었다. 지금 벨벳에게 중요한 건 오르카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
“그 오르카란 골렘이 파괴되기까지의 정황을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어?”
벨벳은 눈이 커졌다.
오르카를 부활시키기 위한 사도닉스의 물음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캬항! 그래서 타다다-! 벨벳을 덮쳐써-!”
“흐음…….”
“그리곤 마나 내놔! 해써!”
“헤츨링의 마나를 노리다니……. 고전적인 방법이지.”
“그래서 오르카가 안대하고! 이동해써!”
“사물에 빙의라. 나도 몇 번 보지 못한 특별한 능력이네.”
“그래서 벨벳이 돌려죠…….”
“오르카는 참 충성심이 깊은 골렘이었구나. 네가 슬퍼하는 것도 이해가 가.”
이걸 해결하려면 한 가지 지식만으론 모자라다. ‘영혼’에서 ‘골렘학’에 이르기까지 사령술과 소환술을 비롯한 방대한 학문을 섭렵해야 했다. 그러나 다행인 점은 사도닉스는 지식에 편식이 없는.
“내가 방법을 알아. 그 유리조각만 찾는다면 벨벳 네 친구를 되살릴 수 있을 거야.”
모든 학문에 뛰어난 드래곤이라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