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에르제는 신하윤이 준비한 멤버를 단숨에 처치할 정도로 강한 상대인데다 리벨리온의 멤버이기까지 했다.
아무리 눈에 띄게 강해진 스미레라도 부담되는 상대였다.
“거, 거래라면…….”
“오, 흥미가 있나 보구나? 적의 거래에 응해도 괜찮은 것이더냐? 난 악명이 자자한 리벨리온이거늘.”
“워, 원하시는 것부터 먼저 알려주세요!”
스미레는 어울리지도 않게 강한 어조로 나가느라 말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벨벳의 안전이 걸린 만큼 상대에게 얕보이지 않으려는 생각이었지만 에르제는 그 모습이 우스울 따름이었다.
“……너에겐 꽤 흥미가 돋아서 말이지. 마나의 향기가 하나가 아닌 둘인 느낌……. 이런 케이스는 오랜만이구나.”
본의 아니게 이야기를 엿듣던 클로는 에르제의 갑작스런 돌발행동에 미칠 지경이었다.
- 에르제! 적과 거래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다시 경고하겠습니다!
픽!
점점 커지는 클로의 목소리에 에르제는 시끄럽다는 얼굴로 통신을 꺼버렸다. 이제 방해꾼은 없다.
“우리 리벨리온이 원하는 건 마나를 품은 거대한 그릇. 온전한 드래곤 하트라면 모를까, 이렇게 여러 갈래로 쪼개진 경우라면…… 꼭 드래곤의 것일 필요는 없지.”
에르제는 스미레를 보며 손바닥 위에 핏빛 마나를 피워 올렸다. 프스스-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안개 같은 마나가 걷히자 드러난 건 붉은색의 유리 세공품.
“이건 네가 찾는 글래스하트와 비슷한 물건이니라. 마나를 봉인해 마도구처럼 만드는 아티팩트지.”
“……그럼, 벨벳을 구하려면 제가 대신 희생하라는 이야기인가요?”
에르제는 굳은 표정이 된 스미레의 모습에 와핫-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핫! 나도 그리 매정한 사람은 아니니라. 그런 거래는 계산이 맞지 않지. 내가 원하는 건 네 몸에 숨은 또 다른 존재…….”
에르제의 검지는 스미레를 가리켰지만 스미레를 지목한 게 아니다. 에르제는 누구의 편린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스미레의 몸에서 피어오르는 또 다른 마나를 지목했다.
“이 봉인구도 지금은 평범한 유리 조각에 불과하지만 그 조각을 담는다면 제법 품격 있는 수집품이 되겠지.”
이질적인 또 하나의 마나.
에르제가 지목하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의미는 명확했다. 에르제가 원하는 건 스미레의 몸에 깃든 라플라스의 인격이었다.
그러나 스미레에게 라플라스는 남과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언제나 자신의 편을 들어주는 존재이자 미숙한 자신을 이끌어주는 경험 많은 멘토였다.
“……제 몸에 깃든 건, 단순한 조각이나 마나 따위가 아니에요. 분명히 인격이 있고, 의지와 영혼이 있어요. 물건처럼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스미레는 단호했다.
자신의 친구인 라플라스를, 자아가 있는 라플라스를 물건 취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옅은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흐음, 편린에게 의지와 영혼이라……. 백번 양보해 네 말이 옳다고 하여도 대체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지?”
조각.
편린이란 기억의 파편이다. 원본의 생각과 성격을 100%에 가깝게 구현해 내지만 에르제는 그걸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인간을 흉내 낸다고 하여도 편린이란 결국 원본을 똑같이 구현해냈을 뿐인 가짜다. 인간이 아닌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지.”
원본의 삶을 기억하는데 스스로가 가짜인 걸 아는 삶이란 무엇일까? 이건 스미레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주제였다.
만약 이 이야기를 듣고 있다면 라플라스는 어떻게 답할까?
“그런 데이터 쪼가리를 친구라 생각했다면 참으로 유감이니라. 후훗, 멍청하다고 할지 가엽다고 할지…….”
스미레는 에르제가 자신을 바보 취급 하는 것보다 자신의 친구인 라플라스를 비웃는 게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 그게 뭐가 나쁘죠?”
같이 이야기할 수 있고, 감정을 나눌 수 있고,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다면 그게 인간이 아니고 뭘까, 친구가 아니고 뭘까?
“생각할 수 있는 자아가 있다면…….”
스미레는 라플라스를 위해 다시금 반박했지만 차마 말을 끝내기도 전에 에르제의 또 다른 반박에 막혔다.
“자아는 인간의 전유물이 아니야. 골렘이나 패밀리어처럼 하급 소환물조차 자아가 있지.”
“그, 그래도 기억이!”
스미레는 분한 마음에 소리쳤지만 에르제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건 네 상상 친구가 빈약한 데이터 쪼가리라는 증거니라. 생전의 기억이 있다고 인간은 아니다. 그게 컴퓨터 속 파일들과 하나도 다를 게 뭐지?”
오히려 조곤조곤 상대가 반박할 수 없도록 완벽하게 밟아놓았다.
“너에게 기생하는 일방적인 관계지 친구가 아니니라. 혼자라면 존재할 수 없는 데이터가 무슨 인간이란 말이더냐?”
스미레는 말없이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동요한 건지 손등의 문양은 보라색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금방 이해한 모양이군. 둔하게 생겨선 생각보다 머리가 좋구나.”
스미레는 에르제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의 뜻에 응했다고 생각한 에르제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스미레의 얼굴은 좀처럼 기분을 알 수 없었다.
사아아-
들판에 바람이 불었다.
스미레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와중에도 오롯이 에르제를 보았다.
“……당신 말이 맞아요.”
흔들림이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마음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선택에는 정답이 없지만 마음 속 하나의 잣대가 있다면 스스로의 감정을 믿는다면 최선은 있다. 스미레는 붉은색 유리 조각을 향해 서서히 손을 뻗으며 입을 열었다.
“인간은 참 바보 같고 나약해요”
그건 얼핏 들으면 에르제의 말에 동의하는 듯 보였다. 스스로를 바보라 부르며 자책하는 듯 보였다.
“들판에 핀 꽃에 의미를 부여하고, 솜으로 이루어진 인형에 이름을 붙여주곤 해요.”
그러나 에르제의 생각보다 스미레는 강인했다.
“하지만 들판의 꽃이 가치 있다고 믿고, 솜덩이에 불과한 인형을 친구라 믿을 수 있는 건.”
스미레는 흔들리지 않았고, 꺾이지도 않았다. 에르제는 라플라스를 원본의 기억을 가진 데이터 쪼가리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걸 친구라 불렀다.
“그 사랑이 저처럼 바보 같고 나약한 사람도…… 강해지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스미레의 손이 닿았다.
“당신이 바보처럼 여겨도 상관없어요. 무언가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건 가슴이 뛰는 사람이라는 증거에요.”
그러나 손이 닿은 건 유리가 아닌 에르제의 몸이었다.
“……다른 사람을 바보 취급하며 무엇 하나 사랑할 수 없는 당신에겐 절대 질 수 없어요. 벨벳도 라플라스 님도 절대 빼앗기지 않아요!”
스미레가 소리침과 동시에 화아악-! 소리를 내며 보라색 폭풍이 일었다.
“공간 결계. 역병의 땅.”
반전은 시작됐다.
“너어-!”
에르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에 분노하며 아까 쥐고 있던 글래스하트를 찾았다. 그러나 글래스하트는 에르제의 손에 없었다. 물론 달라진 건 소지품만이 아니었다.
“……여긴?”
에르제는 주변을 보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죽음의 냄새와 보랏빛 마나. 이 땅의 주인인 역병의 마녀는 너무나 간절히 에르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와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에르제는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 에르제를 기다린 건 왕좌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는 스미레의 얼굴.
“내 이름은 역병의 마녀. 라플라스. 네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한 ‘조각’이다.”
“……들어본 적 있는 이름이니라. 재앙의 마녀 중 하나로 원본의 위험도는 7급.”
리벨리온의 흡혈귀와 가온의 마녀가 서로를 마주했다.
기본적으로 스미레와 에르제는 모두 흑마술의 원리에 의거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촉매’의 영향을 짙게 받았다.
혈마법인 에르제는 피.
사령술사인 스미레는 사역마.
전투를 치른다면 소모전은 불가피하다. 최악의 경우 모아둔 피를 전부 잃거나 소중한 사역마가 전부 역소환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전(停戰)은 어느 한쪽이라도 뜻을 굽히는 사람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다.
“하지만 그건 원본의 이야기. 네 빈약한 그릇과 조각 따위가 원본을 흉내나 낼 수 있겠더냐?”
에르제는 라플라스를 비웃었고.
“음, 더 떠들어 보거라. 겁에 질린 개가 더욱 크게 짖는 법이지.”
라플라스는 그런 에르제를 비웃었다. 둘의 긴장된 분위기는 마치 시위를 놓기 전 팽팽한 활 같았다.
“……온몸에서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을 하는 군. 넌, 흡혈귀인가? 아니면 그저 혈마법을 다루는 인간인가?”
라플라스의 손짓에 죽음의 땅이 진동했다. 죽었지만 잠들지 못한 망령들은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고, 머리를 든 듀라한과 서큐버스 퀸 릴리스는 왕좌 옆에서 무릎을 꿇었다.
“인간이지만 흡혈을 즐기니, 양쪽 모두라고 해두지.”
그러나 사역마를 부리는 건 에르제도 마찬가지. 7급인 그녀는 지금까지 흡혈로 쌓아온 피를 이용해 대군을 일으켰다.
유월을 포함한 6급 헌터들과 검을 든 인간 형태의 보스몹도 보였다. 에르제는 흡혈한 상대의 힘을 분석해 다운그레이드지만 도플갱어를 만들 수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건 장미처럼 진홍빛의 비늘을 지닌 블러드 드래곤.
“정말 나와 싸울 생각이더냐?”
빙긋- 에르제가 여유롭게 미소를 지으며 묻자. 라플라스는 본드래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건 너의 선택이다. 네가 겁에 질려 도망간다면 붙잡지 않으마. 물론 글래스하트는 처음부터 우리의 것. 돌려줄 생각은 없다.”
“참, 건방져. ……가짜 주제에.”
“……마음대로 지껄이도록.”
양 진영은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다. 둘 중 하나가 신호만 내린다면 지금 서 있는 죽음의 땅은 정말 피와 죽음으로 뒤덮일 게 분명했다.
하지만 에르제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야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글래스하트는 스미레에겐 벨벳의 목숨이 걸린 중요한 일이지만 에르제에겐 그저 아티팩트 중 하나일 뿐이다.
에르제는 자신의 본대를 희생시키며 아티팩트를 구해올 정도로 리벨리온에게 충성하지 않았다.
“……뭐, 됐다. 흥이 식었으니. 오늘은 이쯤에서 물러나도록 하지.”
에르제가 돌아서자 결계가 펼쳐졌던 공간이 일순 무너지며 장소는 원래의 형태를 되찾았다.
피를 흘리며 전투하지도 않고 글래스하트를 되찾았으니 승리가 누구인지는 명백한 상황.
라플라스는 박쥐 떼로 변해 사라지는 에르제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띈 채 말했다.
“겁을 먹었다는 이야기를 참 거창하게도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