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이혁이 검격을 휘두를 때마다 거대한 나무 기둥이 대지에서 솟아올라 잇신을 덮치고, 그린 드래곤의 브레스가 몰아쳤다.
이건 피할 수 있는 공격이 아니며 막아낼 수 있는 공격은 더더욱 아니다. 잇신의 몸에 누적된 데미지를 생각한다면 이미 쓰러져도 진작 쓰러져야 했다.
“마치 언데드 같군.”
이혁은 그런 잇신을 향해 ‘언데드’라는 간결한 평가를 내렸다. 죽음을 각오했다는 말은 허세가 아니었다. 온몸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생명을 장작 삼아 하얀 불꽃을 피워 올린 잇신은 이혁의 눈에 진정한 백귀로 보였다.
“하지만 네 묘비는 이곳이 아니다. 그러니…… 나와 내기를 하는 게 어때?”
6급 보스 사흉과 천년 고목 엔트에서, 그린 드래곤 데르타스에 이르기까지 이혁은 10개나 되는 힘의 정수를 사용했다.
“……쿨럭! 내기?”
이미 잇신의 몸은 걸레짝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신에게 승산이 없다는 건 진즉에 알고 있었다.
피에 미친 백귀들은 계약자를 신경 쓰지 않는다. 계약자가 아무리 난처한 상황에 빠져도 약속한 대가를 착실하게 앗아간다.
걸레짝이 된 채 상처에서 피를 질질 흘리는 지금의 상태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너라면 언제든 나를 쓰러트릴 수 있다. 그런데 왜 내기가…… 필요하지?”
“네 각오는 알았다. 이대로라면 넌 죽는다고 해도 절대 물러나지 않겠지. 그렇다고…… 널 내 손으로 죽이고 싶진 않다. 넌 지금 죽기엔 아까운 헌터니까.”
이혁은 신하윤을 따르지만 신하윤과 달랐다. 목적 때문에 사람을 죽이고 싶진 않았다. 겁쟁이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이렇게 긍지 높은 헌터라면 더더욱 그랬다.
“……나를 동정하는 건가?”
“아니, 어떤 면에선 패배를 인정한 거다. 타인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다니…… 나는 너보다 강하지만 네 광기를 감당할 수는 없다.”
이혁의 말에 잇신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지금 상태로 이혁을 이기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내기에 응한다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었다.
어느 때처럼 자신의 기분에 삼켜지면 안 된다. 힘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바보처럼 죽거나, 내기에 응해 실낱같은 가능성에라도 걸어보는 것 중 어느 쪽이 스미레를 위한 일일까?
“네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지?”
“상대를 믿을 수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야. 내기를 인정하지 않고 떼를 쓰면 곤란하거든. 하지만 나도 하윤이 밑에 있으며 배운 게 하나 있거든…….”
푸욱!
이혁을 자신의 검을 마른 땅에 박아 넣었다. 이건 잇신이 내기에 응할 것이라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건 바로 사람을 보는 눈이다. 나는 잇신 네 긍지를 믿는다. 넌 죽을지언정…… 신념을 굽힐 거짓말쟁이는 아니다.”
이혁의 말에 잇신은 핏기없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서서히 죽어가는 이 손바닥에 자신이 움켜쥐고 싶었던 건 무엇일까?
“아니, 이건 네 말처럼 숭고한 긍지도…… 신념도 아니야.”
푸욱!
잇신은 이혁처럼 자신의 검을 마른 땅에 박아 넣었다. 이혁의 내기에 응하겠다는 뜻이었다.
“지금까지 원하는 건 모두 누렸기에…… 가지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어린아이의 유치한 오기다.
헌터 출신인 부모님의 지원과 사랑. 뛰어난 재능과 배경을 바탕으로 한 엄청난 성장. 잇신은 주변의 관심을 받으며 성공 가도를 달렸다.
가지지 못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잇신은 원하는 인간관계는 모두 이룰 수 있었다. 다른 사람으로 그 빈자리를 대체할 마음이 있었다면 얼마든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잇신은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남아 검을 든 자신의 마음을 집착이라 표현했다.
“그래?”
이혁은 그제야 잇신이 물러서지 않는 이유를 깨달았다. 이혁은 잇신이 용맹한 사자라 생각했지만 그건 틀린 판단이었다.
이혁과 잇신은 어찌 보면 같았다.
어리석어 보일지 모르지만 누군가를 향한 맹목적이고 순수한 마음에는 검이 통하지 않는다.
“멋지군.”
이혁은 검지를 들어올렸다. 곧 아름답게 피어오른 불꽃은 어느새 보랏빛 보석으로 변했다.
이혁은 그 정수를 움켜쥐었다. 손톱은 검게 물들었고, 주변의 마나농도는 짙게 변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를 죽이는 일에는 흥미가 없다. 이 공격을 맞더라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 아무런 상처도 남지 않겠지.”
그러나 이혁의 말과 달리 손톱에선 흉흉한 검은색 마기가 피어올랐다.
“하지만 넌 절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을 거다.”
“……왜지?”
“알고 있나? 자잘한 생채기부터 인간의 정신력으로는 참을 수 없는 작열통까지…… 고통에는 척도가 있다.”
이혁은 웃었다. 겁을 줄 생각은 아니지만 이 설명을 듣고도 잇신이 내기에 응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물론 지금 포기하더라도 실망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이 현실에서 느낄 수 있는 신체의 고통이다. ……지금 내 손에 깃든 힘은 고통의 마왕 베리알의 정수.”
마족들이 지닌 마기는 제각기 상징성이 있다.
그 릴리스마저도 ‘매혹’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었으니, 마왕이라면 오죽할까.
“베리알의 마기는 고통을 상징한다. 잠깐 닿기만 해도 느끼는 통증은…… 작열통 이상이지. 신체를 넘어 정신을 파괴하는 아득한 통증이다.”
내기의 룰은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했다. 베리알의 마기를 버텨내고 그 자리에 서있을 수 있다면 잇신의 승리.
“포기하고 싶다면 지금이라…….”
“바로 시작해라.”
이혁은 마지막 기회를 주려 했건만 잇신은 말을 끊고 양팔을 펼치며 담담하게 응했다.
오히려 소란을 떠는 건 잇신이 아닌, 백귀들이었다.
-정말 죽을 생각이야?
-그러지 마. 저런 고통에 당하면 뇌가 녹아버릴걸?
-너희 왜 말리는 거야? 재밌는 구경이잖아.
-계약자가 바보가 되면 우리도 곤란하다고.
계약자가 죽을 지경이라도 착실하게 피를 가져가는 녀석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잇신의 몸에서 하얀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동시에 주변의 시끄러운 목소리도 함께 잦아들었다.
점점 한계가 찾아온 잇신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뭘 망설이지? 빨리 시작해.”
이혁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헌신한다고 해도 신하윤이 자신을 돌아봐 줄 일은 없을 것이다. 바보 같지만 이혁은 그럼에도 신하윤을 떠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신하윤의 유일한 편이라고 되새기며 끝까지 곁에 남았다.
“넌 끔찍할 정도로 나와 닮았군.”
이혁의 손톱이 바람을 갈랐다.
검은색의 흉측한 마기는 3갈래의 검기가 되어 잇신의 몸에 그대로 적중했다.
촤악-!
마치 차가운 물을 뿌린 듯한 소리와 함께 잇신은 어금니가 부서져라 이를 꽉 깨물었다.
* * *
리벨리온의 멤버.
진조의 흡혈귀 에르제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기절한 학생을 내려다보았다.
“신하윤도 소문처럼 발이 넓진 않나보구나. 제단에 이딴 헌터를 준비해뒀다니……. 아 정말이지, 입맛만 버렸구나.”
오랜만의 외출이었다. 작전에 투입 된 것까진 좋았지만 에르제는 자신의 상대가 이런 잔챙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맛있기로는 유월의 피가 참 맛있었는데……. 그래! 나는 신유성 그 아이와 만나고 싶었느니라!”
에르제에게 순도 높은 마나를 가진 헌터의 피를 마시는 건 식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녀가 원하는 나이로 모습을 바꾸며 젊음을 유지하는 건 어디까지나 ‘흡혈’의 힘 덕분이니까.
“클로. 이젠 대꾸도 하지 않는 것이냐? 누구를 닮은 건지 원.”
-회수가 끝났다면 아지트로 돌아오십시오.
하지만 언제나 작전이 우선인 클로는 투덜거림은 받아주지 않았다. 리벨리온 중에서도 ‘정예’인 에르제를 투입한 건 이번 작전의 중요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쯧, 귀염성 없기는. 점점 네 주인과 하는 짓이 닮아가는구나.”
제단에 박힌 글래스하트를 떼어낸 에르제는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 천상의 탑을 통해 아지트로 복귀하면 작전은 끝.
하지만 지금 에르제의 눈앞에는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던 학생이 서 있었다.
“……흠 너는?”
처음 보는 보랏빛 머리와 동물로 치자면 토끼나 젖소 같은 초식 동물처럼 무해하게 생긴 모습.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분명 작전 보고서에서 본 얼굴이었다.
“아, 기억이 났느니라! 넌 분명!”
에르제는 끝까지 ‘스미레’의 이름을 기억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스미레가 신유성의 파티원 이라는 건 떠올릴 수 있었다.
“돌려주세요.”
스미레는 에르제가 쥔 글래스하트를 향해 손을 뻗으며 여태 본 적 없는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돌려달라니 무슨? 아~ 이것 말이냐?”
에르제는 그런 스미레의 요구에 능청스럽게 반응했다.
“저런. 이건 나도 필요한 물건이라…… 돌려줄 수 없겠구나. 아니면 이걸 쪼개서 반씩 가지지 않겠느냐?”
비웃음을 흘리며 에르제가 글래스하트를 쪼개려는 시늉을 하자. 스미레는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 그만두세요!”
손바닥 위에서 글래스하트를 이리저리 굴리며 장난을 치던 에르제는 스미레의 목덜미를 보았다.
신유성이나 유월만큼은 아니었지만 스미레는 방금 먹었던 학생의 피보단 괜찮은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 유리 조각을 원하느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은 에르제의 물음에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간 에르제가 글래스하트에 무슨 짓을 벌일지 몰랐기에 둘은 긴장감 속에 대치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와 거래하는 건 어떠하더냐?”
에르제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먼저 반응을 한 건 스미레가 아닌 클로였다.
-에르제! 당신 설마!
같은 리벨리온의 멤버지만 에르제는 네임리스에 충성하지 않으며 어디로 튈지 모르고 변덕스러운 사람이었다. 대장도 아닌 클로의 손으로는 더더욱 통제가 불가능한 멤버였다.
에르제는 스미레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윽하게 피어오르는 피의 향기는 주변을 서서히 덮어씌우고 있었다.
“너라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