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제단은 힘을 분산시키기 위한 눈속임이다. 그러나 동시에 벨벳을 소중히 여기는 신유성의 마음을 생각한다면 무조건 성공하는 함정이었다.
“그러니…… 모든 제단에 정예를 세워둘 필요는 없죠. 제단에 힘을 분산시킨 이상, 이미 함정에 빠진 거니까요.”
S반의 1학년.
민성혁은 지루한 기다림이었다는 듯 상쾌한 기지개를 펴며 제단에서 일어났다. 민성혁은 아델라에게 평소처럼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사용했다. 그건 둘 사이 벌어진 거리감을 뜻했다.
“똑똑하신 줄 알았는데 실망이네요. 소꿉놀이에 취해 반장의 책무에도 무관심해지더니 이젠 헌터로서의 감도 잃은 겁니까?”
아델라 오르텐시아.
신유성이 오기 전 1학년의 유일한 절대자. 다른 반이 S반을 넘보지 못하는 건, 항상 아델라가 1학년 최강으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S반의 모든 학생이 A반보다 강한 건 아니다. 그러나 가온에서 최고의 1학년은 S반에 있다.
그건 S반의 자부심이자 일종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젠 이야기가 달랐다.
아델라는 F반의 신유성에게 패배했으며, 민성혁의 눈에는 이제 반장의 책무마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반장. 아니, 아델라. 이번 일이 끝나면 회장은 다음 S반의 반장 자리를 내게 주기로 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민성혁이 비웃음을 흘리자 아델라는 문답무용으로 손바닥을 세웠다. 더 이상 의미 없는 시간 낭비는 1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심산이었다.
“궁금하지 않습니다. 당신처럼 시시한 인간에겐 그 어떤 무엇도.”
“궁금해야 할 거야. 내 이야기가 아니라 회장의 이야기니까. 곧 회장이 3학년이 되면 가온은 새롭게 바뀔 거거든.”
“……그녀도 결국 일개 학생일 뿐입니다.”
“아니, 절대 아니지. 아델라 넌 정말 아카데미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한 치의 관심도 없구나?
외부적으로 가온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건, 단연 교장인 진병철이었다. 하지만 가온의 실상을 하나하나 파고들면 이야기는 다르다.
곧 3학년이 될 2학년과 아델라를 제외한 상급반 인원은 대부분 신하윤을 따르고 있었다.
신하윤은 수완이 좋고, 신오가문과 유수길드라는 배경도 가지고 있었다. 외부 길드는 물론 기업의 의뢰까지 받으며 헌터부를 키웠고, 학생들은 그런 신하윤을 따랐다.
신하윤은 무섭고 가혹한 책임자지만 그만큼 압도적인 능력 또한 가지고 있었다.
“지금 가온은 회장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아. 길드의 계약도 회장이 따냈고, 상급반 학생들도 회장을 따르지.”
강함만이 전부라면 누구도 신하윤을 두려워하지 않겠지. 그러나 신하윤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권력을 불릴 줄 알았다.
가온의 신예에서, 헌터부의 부장이 되었고, 배경과 연줄은 물론 타고난 수완을 통해 헌터부의 입지를 넓혔다.
신하윤은 언제 만족을 할까?
차기 회장 자리를 얻었고, 이제 곧 3학년이 되면 교장인 진병철조차 간섭 할 수 없는 가온의 전권을 위임 받는다.
아카데미를 졸업하면 신오가문과 유수길드의 비호 아래에서 헌터계 최고의 입지를 지니게 되겠지.
“회장은 우리와 달라. 훨씬 먼 곳을 보고 있다고. 신유성은 강하지만…… 회장의 수완에 비하면 그냥 일개 헌터에 불과하지.”
신하윤에겐 동료가 없다.
그녀는 항상 사람들 사이에 군림하니까, 하지만 믿을 수 있는 동료 대신 그녀의 수완과 카리스마에 복종하는 자들이 있었다.
“회장이 다른 아카데미로 떠나면 학생회와 헌터부의 학생들이 가온에 남을까, 아니면…… 회장을 따를까?”
민성혁이 차근차근 뱉어내는 건 꽤나 합리적인 이야기였다.
“학생들 입장에선 겨우 아카데미의 이름만 바뀔 뿐이야. 그러나 회장에겐 유수길드와 신오가문이 있어. 회장 밑에서 일한다면 졸업했을 땐 인생이 달라질걸?”
단순한 자본의 논리지만 그렇기에 더욱 강력하다. 사과 1개와 사과 2개 중 무엇을 택할지 묻고 있었으니까. 이 문제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회장은 원한다면 언제든 너희를 압박할 수 있어. 그럼 가온에서 누가 너희 편을 들까?”
민성혁은 검지와 엄지를 맞대 따악-! 하고 소리를 냈다. 제단 주위의 바닥에 그어진 마나 회로는 일순간 빛을 내며 준비된 결계를 작동시켰다.
“그러니, 나는 회장이 올 때까지 시간만 끌면 된다는 말씀.”
처음은 민성혁의 몸이 투명하게 번져갔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몸에만 사용이 가능하다면 B급 특성에서 그쳤겠지.
“너도 알다시피 내 능력은 ‘투명화’. 하지만 그 능력에도 단계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
투명(透明).
흐리지 않고 그 안속까지 비춰 보이는 것, 민성혁의 ‘투명화’란 대상의 인지를 건드린다.
“처음으로 1단계.”
1단계.
민성혁이나 사물의 몸이 비춰 보이며 위치를 인지할 수 없어진다. 아델라는 민성혁의 몸이 사라짐과 동시에 기척조차 느낄 수 없었다.
“위치를 숨기는 정도로. 저를 이길 순 없습니다.”
아델라가 손바닥을 움켜쥐자 민성혁이 있던 자리에 병장기의 형태가 된 얼음이 쇄도했다.
처처척-!
그러나 얼음은 무의미하게 바닥에 꽂힐 뿐, 투명화한 민성혁을 잡아낼 순 없었다.
“그렇겠지. 하지만 말했잖아. 내 역할은 시간을 끄는 게 전부라고. 자! 잘 봐!”
2단계.
아델라가 딛고 서 있던 바닥이 뻥 뚫린 듯 사라졌다. 본디에 ‘투명’이란 사물이 빛을 통과시키기에 발생한다. 사물에 가려졌어야 할 뒤쪽의 시각 정보를 방해받지 않고 전달받을 수 있기에 발생한다.
“방금, 우리가 서 있던 장소를 투명화시켰어. 위치란 상대적인 거야. 장소의 시각 정보를 알 수 없다면 나의 위치도 너의 위치도 알 수 없지.”
하늘의 구름처럼 창공 위에 떠있는 느낌. 장소가 없기에,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델라에게 주어진 시각 정보는 기껏해야 이곳이 하늘 위라는 정도였다.
‘……이곳이 하늘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주춤-
딛고 있는 땅도 자신의 몸도 보이지 않으니 아델라는 걷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조차 끝이 아니었다. S급 특성을 가진 민성혁에겐 필살기나 다름없는 마지막 3단계가 있었다.
“그리고 이게…… 내 최선.”
민성혁의 그 말을 끝으로 아델라는 시각을 상실했다.
‘……아?’
일순간 칠흑 같은 심해에 빠진 느낌이었다. 눈꺼풀을 닫은 듯 시야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온통 깜깜했다.
“자, 이제 그만 포기해. 난 너를 이길 수 없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이게 바로 민성혁의 3단계인 공간의 투명화.
“아까 결계로 닫아둔 이 공간 전체를 투명하게 만들었다. 시각이란 사물이 빛을 반사하기에 볼 수 있는 거야. 공간 전체의 모든 사물이 투명하다면 무엇도 볼 수 없지.”
바깥에서 전달된 정보는 차단되고 결계 안쪽은 모든 사물이 투명해졌다. 민성혁이 3단계를 발휘한 공간에서 빛은 무의미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어떻게 나를 잡을 거지?”
상급 헌터들은 일종의 결전 병기였다. S급 중 특출 난 몇몇은 세계의 상식을 부술 힘이 있었다.
학년 랭킹 1위였던 아델라가 대표적인 예였지만 그건 S반인 민성혁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한 헌터라도 싸워주지 않으면 강함은 소용없어. 내 세상에선 모두가 평등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공간 전체의 빛이 사라졌다는 건 단순히 눈을 감은 느낌이 아니었다. 주변의 데이터를 얻을 수 없고, 더 나아가 내가 이 장소에 존재하는지도 알 수 없다.
“아…….”
아델라는 시각이 무너졌기에, 청각에 의존하려 입으로 소리를 내보았다. 그러나 시각과 청각은 상호보완적인 관계다. 서로 얻은 데이터를 토대로 시각은 청각의 빈 정보를 대체하고, 청각은 시각의 빈 정보를 대체한다.
아델라는 자신이 뱉어낸 목소리가 몸이 아닌, 텅 빈 우주를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다른 오감도 무너지기 시작했군요. 전 익숙하지만, 이런 공간에선 다들 금방 미쳐버리기 마련이죠.”
그러나 민성혁의 생각과 달리 아델라는 힘없이 웃었다.
“시각이 차단된 세상에서 스스로 무너트린다. 제가 만난 환각 특성 중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무서운 능력이군요.”
민성혁의 말처럼 이런 세상에서 며칠이고 방치되면 서서히 정신이 붕괴하여 미쳐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위험은 아델라에게 새로울 게 없었다. 민성혁은 1등이 짊어진 왕관의 무게를 몰랐고, 아델라는 알았다.
이 승부는 바로 그 차이에서 갈렸다.
“……저를 이기기 위해 작전을 준비해온 건, 당신이 처음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위협에도 제가 가온의 1등으로 군림한 건…….”
그들의 능력에 대비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도 아니며, 뛰어난 전략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졌기 때문.”
얼핏 보면 헌터들의 전투는 가위바위보로 보인다. 비슷한 전투력을 가졌을 때는 훌륭한 전략이 우위를 가지게 해주니까.
그러나 헌터들의 힘이란 대칭되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힘의 무게가 기울어진 저울은 전략 따위로 돌이킬 수 없습니다.”
[눈의 오페라]
“Intermezzo(간주곡).”
무색의 세상에 하얀 겨울의 꽃이 피어난다. 모든 것이 투명한 세상에서 꽃은 형태도 향취도 없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아델라는 자신의 손끝에서 퍼져나가는 눈꽃의 서늘함이 느껴졌다. 차가운 냉기로 주변이 얼어붙는 게 느껴졌다.
“Aria(아리아).”
그래, 달라진 건 없었다.
겨울은 원래 조용하다. 세상은 눈보라 속에서 형태 없이 잠기고 세상은 적막과 고요만이 가득하다.
화아아악-!
“이건 단순한 힘겨루기……. 당신의 공간이 제 연주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작은 머그컵에 숨길 수 있는 건 계란 정도가 한계다. 커다란 수박을 숨길 순 없다.
“Finale(피날레).”
아델라는 지휘자처럼 양손을 이용해 간결한 피날레를 연주했다.
“마나가, 결계를…….”
민성혁은 미리 바닥에 그려둔 아티팩트의 도움을 받았지만 이게 한계였다. 민성혁의 힘으로 결계 밖으로 터져 나가는 아델라의 마나를 정면으로 막을 순 없었다.
쐐애애액-!
칠흑 같던 무(無)의 세상에 눈꽃이 피어난다. 눈의 폭풍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며 어둠을 걷어내고 주변을 밝혔다.
“끝났군요.”
결계가 부서짐과 동시에 세상은 원복 되었다. 고고한 눈의 여왕은 무릎 꿇은 민성혁을 무감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힘의 차이.
절대 이길 수 없다는 절망.
“내, 내, 패배다…….”
아델라는 민성혁에게 일말의 관심도 없다는 듯 제단에서 벨벳의 글래스하트를 꺼냈다.
“……날 이겨도 바뀌는 건 없어. 회장은 성을 만들었고, 너흰 그 성에 고립된 거야.”
마지막 자존심으로 뱉어낸 민성혁의 도발에 아델라는 걸음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런 고립된 삶이 자발적인 노예보단 나으니까.”
노예를 자처한 민성혁과 달리 아델라는 신하윤이란 폭군을 모시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지금, 내 역할은…… 벨벳을 구하는 것…….’
폭군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는 건 아델라의 역할이 아니었다. 모두의 짐을 짊어진 단 한 명의 반군을 자처한 건 신유성의 역할이었다.
글래스하트를 쥔 아델라는 눈을 감았다. 무감해 보이기만 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너무나 간절하게 기도했다.
‘믿을게요. 당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