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2개의 섬.
하나의 제단.
분명 글래스하트가 있는 곳은 삼엄한 경비가 뒤따를 거라고 생각했건만, 제단을 지키고 있는 건 헌터 단 한 명뿐이었다.
“안녕! 오~ 우리 은아가 오늘은 보디가드도 비서도 없이 왔네? 이제 실력에 자신이 좀 있나 봐?”
빙긋빙긋 웃고 있는 건 S반의 이채현. 그래 저 빌어먹을 얼굴과 패주고 싶은 표정을 어떻게 잊을까?
“……미안한데 농담 따먹기 할 기분 아니야. 비켜.”
김은아는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차분한 어투로 물었다. 지금 걸린 건 벨벳의 안전인 이상 그때와 같은 실수를 할 순 없었다.
“왜 그렇게 싸늘해? 그때 일, 아직 기억하고 있는 거 아니지?”
먼저 이전 일을 꺼내는 이채현의 도발에도 김은아는 애써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기회에 그 불같은 성격 좀 고치자. 너 화나면 똑바로 능력도 못 쓰잖아~ 다~ 널 위한 거야. 알았지?]
시험에서 이기기 위해 자신을 좀 도발했으면 어떠한가?
[……그야, 고릴라처럼 날 뛰는 모습을 보면. 잘난 네 오빠가 싫어하지 않겠어? ……아! 맞다.]
[아직 혼수상태라고 했나? 잘됐다. 그럼 네 꼴은 못 보겠네.]
김은아의 가장 큰 상처를 서슴없이 건드리고 소금까지 뿌린다고 한들 어떠한가? 엄청 짜증나지만 그건 과거에 불과하고 김준혁은 이미 병실에서 일어났다.
지금 중요한 건 신하윤에게 마나를 빼앗기고 가쁜 숨을 그릉거리며 힘겹게 잠든 벨벳이었다.
“네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면서 신하윤을 돕는 거야?”
이채현은 그런 김은아의 반응이 흥미로웠다. 명확한 도발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을 설득부터 하려 하다니 겨우 1년 사이에 제법 성장한 모습이었다.
“몰라. 근데 이해관계가 일치했을 뿐이지. 나는 회장에게 잘 보이길 원하고 회장은 마침 손이 필요했으니까.”
아무리 그래도 신하윤에게 부탁 받은 이상 넘어가줄 순 없다. 이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이 아는 신하윤이라면 배신자는 절대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김은아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절대 넘어가줄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아는 고고한 재벌가의 아가씨라면 최후의 수단으로 신성그룹까지 들먹이며 협박할 테지만 이미 이채현의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회장 쪽이 훨씬 더 무서워.’
신하윤의 보복은 차원이 다르다.
학생회에서 신하윤의 살벌한 분위기를 본 사람이라면 모두 동감하겠지.
“난 너 같은 배경도 잘나가는 파티원도 없어. ……그러니 더더욱 회장 편에 붙어야 해. 네가 어떤 말로 구슬려도 협박해도…….”
그러나 그 다음 김은아가 보여준 행동은 이채현을 굳게 만들었다.
“……이렇게 부탁할게.”
그 김은아가 머리를 숙였다.
시험이 아닌 실전으로 싸운다면 이채현보다 강했고, 이채현에겐 없는 신성그룹이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언제나 재수 없는 공주님 같았던 그 김은아가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제단에 있는 물건을 돌려줘.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야.”
정말 진심을 담아 간절히 이채현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김은아. 너…….”
이채현은 당황했다.
아티팩트라곤 해도 기껏해야 마나가 담긴 유리 조각이 그 까짓게 뭐라고 신성그룹의 후계자가 간절한 얼굴로 머리를 숙인단 말인가?
“네, 네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이번에는 이채현이 물어볼 차례였다. 원하는 건 전부 얻을 수 있는 현대의 공주님이,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려도 절대 참지 못하던 그 성격을 굽히고 왜 머리를 숙일 수 있는지 물었다.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난, 나를 잘 알아.”
김은아는 고개를 들어 이채현을 보았다.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 내가 소중한 사람이 다치면 절대 웃으며 넘길 수 없어. 겉으론 괜찮은 척해도…… 계속 자책하고, 생각나겠지.”
생각도 못한 김은아의 태도에 이채현은 머쓱한 듯 볼을 긁적거렸다.
“……그러다 가끔, 울기도 하고?”
이건 그냥 던져본 장난이었는데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긴 하네……. 은아 네가 우는 모습.”
아까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막아보려 했건만 가슴 한 구석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이 미묘한 감정은 뭘까.
“아니 놀리는 게 아니고…… 뭔가 생각해보니 귀여울 거 같아서.”
“……줄 거야?”
이채현은 슬며시 김은아를 보았다. 얼마나 이번 일이 간절한 건지 손까지 모으고 있는 김은아를 보니 정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채현은 후우- 하고 긴 숨을 뱉었다. 그 김은아가 이렇게 나와 버리니 다른 의미로 강적이었다.
“……까칠한 고양이처럼 굴 줄 알았는데, 이렇게 나와 버리니. 거절할 기분이 들지 않잖아.”
제단에 올라간 이채현은 글래스하트를 빼냈다. 7가지의 조각으로 나뉘어서 그런지 마나는 크게 남아 있지 않았다.
“알고 있지? 가장 중요한 조각은 회장한테 있다는 거.”
“……응. 알아. 유성이가 갔어.”
글래스하트를 주려는 걸 눈치 챈 김은아가 총총 걸음으로 다가오자. 이채현은 검지를 들어 어허- 하고 김은아를 막아 세웠다.
“내 쪽도 구제책은 있어야지. 회장은 배신자를 절대 용서하지 않아. 너한테 그냥 넘겨준 걸 알면 날 죽이려고 들걸?”
이채현은 또 한숨을 쉬었다. 시험에서 했던 도발의 빚을 갚는다기엔 참 리스크가 큰 일이다.
지금 이채현이 하려는 행동은 일종의 투자나 마찬가지로 신하윤 대신 신유성의 지분을 택하는 행위였다.
이 투자가 계산이 맞으려면 적어도 이번 싸움의 승자가 신하윤이 아닌 신유성이어야 말이 됐다.
“김은아 넌…… 정말, 신유성이 회장을 이길 수 있다고 믿어?”
이걸 파티원인 김은아에게 묻는 것도 웃긴 일이지만 이채현은 이미 기적을 보았다.
기적의 이름은 ‘김은아의 사과’와 한 명의 인간으로서 ‘김은아의 성장’이다.
신유성의 파티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벌어진 기적. 이런 기적을 보여준 신유성이라면 가능성이 있어보였다.
“얼음 마녀를 공략했단 이야기는 들었어. 하지만 회장은 그 이상이야.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곁에 있던 사람들조차 몰라.”
이채현의 말에 김은아는 살풋 웃었다.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라면 금방 까먹어버리는 김은아였지만 카페에서 들었던 신유성의 과거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했다.
“힘으로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 근데 유성이는 달라. 우리가 유성이의 곁에 남아 있는 건……. 진심으로 함께 있고 싶기 때문이야.”
흥미롭다는 듯 김은아를 바라보던 이채현은 손바닥에 올라간 유리조각에 시선을 옮겼다.
글래스하트에 남아 있는 건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엄청난 양의 마나다. 아티팩트처럼 사용한다면 김은아와 정면으로 맞서는 게 불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 이건 정말 자신의 선택이다. 신유성과 신하윤 둘 중 누가 이길지, 누구의 편에 붙을지.
다만 팽팽했던 저울은 김은아로 인해 기울었다. 죽일 듯 굴었던 사이지만 그래도 같은 학년과는 친하게 지내는 게 좋으니까.
“그건 마치, 고백 같네. 김은아 넌 신유성이 더 강하다고 생각하는 거지?”
“날 믿어. 난 이상할 정도로 감이 좋거든.”
김은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채현은 또 다시 긴 한숨을 뱉어냈다.
“자, 받아.”
휙-
이채현은 김은아에게 글래스하트를 넘겨주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사라더니 회장을 도우러 왔다가 이런 식으로 김은아와 화해하게 될 줄이야.
“배신자로 찍히긴 싫으니까. 날 네 전기로 쓰러트려.”
지금부터 맞아야 할 김은아의 전기 공격은 그 대가겠지. 이채현은 양손을 활짝 대(大)자로 펼쳤다.
“……고마워.”
글래스하트를 손에 쥔 김은아가 웃었다. 아까만 해도 죽을상이던 표정이 예쁘게 웃는 걸 보니 이채현은 한결 마음이 풀렸다.
“감사는 됐어. 내가 하고 싶은 건 유치한 우정 놀이가 아니라 투자니까.”
“응. 잊지 않을게.”
김은아는 검지를 총처럼 겨누며 자세를 잡았다. 절대 신하윤이 이채현을 배신자로 의심하지 못하도록, 최고로 강력한 기술을 사용하기로 했다.
“오르카-!”
시동을 건 김은아를 향해 번쩍-! 번개가 내려쳤다. 몸에서 흡수된 전기는 검지의 끝에서 뭉치며 탄환처럼 장전됐다.
“믿어줘서 고마워. 쉬고 있어!”
이채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냥 짜고 치는 연극처럼 적당히 전기만 쏘라는 의미였는데 김은아는 무슨 전력투구로 필살기를 장전하는 듯 보였다.
‘뭐지, 저거.’
왜 이 재벌집 아가씨는 ‘적당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걸까. 잔뜩 폼을 잡았는데 이쯤 와서 멈춰 달라는 것도 뭣하다.
“절대 의심하지 못할 거야!”
전기 범고래가 김은아의 검지에 내려앉는 모습을 보며 이채현은 생각했다.
‘그야 당연히 의심하지 않겠지. 그걸 맞으면 죽을 테니까.’
쿠르릉-!
이미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만들어진 건지 모를 먹구름이 김은아를 향해 한 발 더 번개를 내려주었다.
“풀충전-!”
기껏 화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앙금이 남은 걸까. 이채현은 김은아에게 물었다.
“……저기, 나를 죽이려는 거야?”
탕-!
하지만 문답무용으로 ‘오르카’라 불린 필살기를 검지 끝에서 발사하는 김은아. 노랗고 푸른 전기가 서로를 감싸며 인간은 도저히 반응할 수 없는 속도로 이채현의 옆을 스쳤다.
지이잉-! 쿵!
‘오르카’에 맞아 형체도 없이 지워진 제단을 보며 이채현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풀썩!
이채현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장. 지금의 김은아는 반대항전에서 패배한 김은아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열등생에서 세븐넘버가 된 스미레처럼 극적인 성장은 아니었지만 이채현이 안 본 사이 믿을 수 없는 성장을 거듭했다.
‘이, 이 녀석 이렇게 강했나…….’
이채현은 깔끔하게 지워진 제단을 보며 침을 삼켰다. 어쩌면 신하윤 대신 김은아와 신유성의 편을 든 건…….
‘이쪽이 정답일지도…….’
정답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