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 아카데미의 최강투신-373화 (372/434)

제373화

12개의 섬에 숨겨진 여섯 제단.

이혁은 처음 이 작전을 들었을 때 신하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신유성의 파티가 정말 비국에 퍼진 제단을 찾으러 갈까? 만약 제단을 놔두고 파티 전체가 천공섬으로 올라온다면 어떻게 될까?

[아니, 걱정하지 마.]

그러나 신하윤은 이혁의 질문에 여유롭게 웃었다. 수십억이 움직이는 토벌 업무에 사인을 남기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그럴 일은 없어. 유성이는 그 꼬마를 구하러 갈 거야.]

딱 한순간.

정말 찰나에 불과한 시간 동안 이혁은 생각했다. 신하윤이 단언한 이유가 설마 가족의 감일까? 신유성의 어린 시절을 지켜보았기에 그 심정을 알아챈 걸까?

하지만 그건 반쪽짜리 추리였다.

[사람들은 주목받는 신예라며 치켜세우지만 내 눈에는 그의 본질이 보이거든.]

신하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이혁이 기대한 따뜻한 감상 따위가 아니었다.

[버림받고……. 패배감에 휩싸여 타인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하는 꼬마아이…….]

이혁은 알고 있었다. 이게 신하윤의 방식이라는 걸.

[기껏 얻은 사탕과 기껏 잡은 손을 놓을 용기가 있을까?]

타인의 약점과 아픈 부분을 손쉽게 찾아내고 목적을 위해선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리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반면 난 다르거든……. 난 다 버렸어.]

이건 강함의 문제가 아닌, 전쟁에 돌입하기 전 마음가짐의 차이였다.

저벅. 저벅. 저벅.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에 이혁은 검을 들었다.

“너희가 신유성의 파티를 도울 줄은 몰랐는데.”

검은 교복. 단정한 머리.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무표정한 표정에 자신처럼 허리춤에 검을 찬 헌터.

스릉-

차가운 금속 소리를 내며 검을 뽑은 헌터는 시선을 이혁이 아닌 바람이 부는 들판에 두었다.

아직 봄은 오지 않았다. 겨울의 바람은 너무 시렸고, 추위에 말라버린 잎은 활기가 없었다.

“그렇군.”

지금은 봄만을 기다리며 말라비틀어진 겨울. 그러나 관계는 계절이 아니다. 잇신은 이제 잠자코 기다린다고 봄이 오지 않는 걸 알고 있었다.

“……이런 오지랖은 확실히 내게 어울리지 않은 일이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 믿는 건,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정말 원하는 게 있다면, 정말 그 사람이 행복해지길 바란다면 행동해야 한다.

“그런데 운이 안 좋았군.”

비록 그 사람이 택한 게 자신의 곁이 아니더라도 잇신은 검을 드는 걸 택했다.

참 웃긴 일이다. 유치하다고 비웃었던 행동을 스스로 하고 있건만 잇신은 이게 옳은 해답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막 그런 사람이 되어보려 했거든.”

참 늦은 깨달음이었다.

유독 제비꽃을 바라보던 스미레에게 눈길이 남은 건 동정 때문이라 생각했고, 스미레가 떠났을 때 느낀 상실감은 원망에서 비롯된 분노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감정은 동정도, 연민도, 원망도, 분노도 아니었다. 그 간단한 해답을 찾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자리에서 스미레를 위해 검을 들게 되기까지 잇신은 많은 성찰이 필요했다.

그래. 중요한 건 하나다. 자신이 누군가를 위해 검을 들었다는 사실이다.

“……네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길 바랄게. 하윤이는 자신을 곤경에 빠트린 사람을 절대 잊지 않거든.”

이제야 정답을 찾은 잇신에게 이혁의 위협은 우스웠다. 지금의 자신에게 무엇이 두려울까?

실패가 두려울까, 후회가 두려울까, 죽음이 두려울까?

“너희를 향해 검을 들지 않는 게, 이빨을 세우지 않는 게……. 그게 정답이라고 말하는 건가?”

잇신은 조소했다.

이혁은 가온의 부회장. 얕잡아볼 마음은 없었다. 누가 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헌터였다.

그럼에도 잇신은 이혁을 비웃었다.

“부럽군. 그렇게 어중간한 마음으로 임할 수 있다니.”

자신은 지금 죽음보다 두려운 후회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다.

비가 오는 날, 화단 앞에 쭈그려 앉아 제비꽃을 바라보던 여자아이를 만났던 날을 후회하고, 그 유약한 마음으론 강한 헌터가 될 수 없다며 자질을 의심했던 마음을 후회했다.

왜 훨씬 먼저 발견했음에도 따뜻한 말을 건네준 게 자신이 될 순 없었을까? 왜 그 잠재력을 믿어준 게 자신이 될 순 없었을까?

안타깝지만 스미레를 다시 웃게 만든 것도, 스미레가 지닌 가능성을 믿어준 것도, 스미레의 선택을 받은 것도 모두 자신이 아니었다.

스미레의 선택은 신유성이다.

어쩌면 평생토록 바뀌지 않겠지, 그렇기에 검을 들었다. 이건 누군가를 돕겠다는 가벼운 마음 따위가 아니다. 후회를 떠나보내는 숭고한 의식이다.

“……난 검을 들 때는 항상 죽음을 각오했어.”

잇신이 쥔 검에 붉은 귀기(鬼氣)가 피어올랐다. 마음의 번뇌가 마나의 파도에 휩쓸렸다. 거친 파도는 흐트러진 모든 것들을 휩쓸어 버리고 계속 나아간다. 번뇌를 지우고 머릿속을 깨끗하게 무(無)로 되돌린다.

잇신은 그 파도에 몸을 맡긴 채 이렇게 읊조렸다.

“……피에 미친 백귀(百鬼)야.”

허접한 괴수를 베어낸 피로 전투에 임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전쟁을 다짐했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타인의 피가 아닌, 자신의 피를 흘릴 생각으로 싸워야 한다.

“내 피를 들이마시고.”

그래. 쏟아내자. 내 안에 있는 걸 모두 쏟아내자. 실력으로 이길 수 없다면 각오가 다르면 된다.

“나를 집어삼키고.”

피를 바치고, 살을 바치면 된다. 그러니 모든 걸 쏟아내라.

“하얀 불꽃을 피워 올려.”

잇신은 무언가 자신의 검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건 검기나 마나 따위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지금 검에 깃든 건 잇신의 모든 번뇌를 녹여낸 각오.

“……영원히 끝나지 않을 밤을 걸어라.”

잇신은 천천히 감았던 눈을 떴다. 얇은 눈꺼풀 틈새로 스며든 빛은 마치 어두운 밤의 달빛 같았다.

“백귀야행(百鬼夜行).”

잇신의 다짐처럼 하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러나 숭고한 마음과 달리 잇신에게 손을 건넨 건, 날개를 단 천사가 아닌 지독한 악귀의 손길.

“큭…….”

무언가가 몸 안을 꽈악- 붙잡는 끔찍한 느낌이 든 직후, 미소를 띤 잇신이 피를 뱉어냈다. 부릅뜬 눈에서도 조금씩 피가 흘렀지만 잇신이 쥔 검은 더욱 강렬한 빛을 발했다.

“너, 단단히 미쳤군.”

질려버린 듯 경멸 어린 이혁의 어투에도 잇신은 덤덤했다.

“말했잖아. 각오가 다르다고.”

탕-!

잇신의 몸이 탄환처럼 튀어나갔다. 주인의 순도 높은 피를 취한 귀신들은 기꺼이 금단의 힘을 빌려주었다.

그러나 이혁 또한 가온의 2학년 전체에서 근접전으론 단연 최강인데다 신하윤의 선택을 받아 부회장이 된 학생이었다.

“버텨내라. 도올(檮杌).”

이혁은 자신의 검에 중국 전역을 공포에 물들였던 사흉 중 하나의 이름을 빌었다.

끔찍한 백귀들이 잇신의 검에 깃들어 피를 취하려 했지만 거대한 멧돼지의 형상은 단단히 버텨냈다.

“강하군. 제대로 막아냈음에도 손이 떨려올 정도다……. 특성을 발휘하고도 이 정도로 몰아세워진 건 처음이군.”

그러나 이혁은 신하윤의 밑에서 수많은 아티팩트를 흡수했다. 잠재력은 6급 못지않았고, 경험도 모자라지 않았다.

일개 학생 수준을 한참 전에 뛰어 넘은 건 이혁도 마찬가지.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절박하다고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야.”

콰앙!

도올이 깃든 둔탁한 힘이 잇신의 검을 쳐냈다. 검을 통해 전해진 힘은 인간이 아닌 수십 톤의 무게를 지닌 괴수 같았다.

“……크윽!”

잇신은 힘의 파동이 만들어낸 끔찍한 진동에 맥없이 밀려났다. 제단은 눈으로 보이는 거리에 있었다. 이혁만 꺾으면 잇신은 스미레에게 글래스하트를 건네줄 수 있었다.

그럼 처음으로 잇신 덕에 행복해하는 스미레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이혁은 너무 강한 상대였다.

“찢어발겨라. 궁기(窮奇).”

이혁의 검을 빌어 하얀 날개와 검은색 털을 가진 괴수가 앞발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발톱은 세 줄기의 검격이 되어 잇신을 덮쳤다.

탓!

뒤로 물러난 잇신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괴수의 발톱이 자신의 몸을 스쳐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감이 좋군. 막았다면 다른 발톱에 몸이 찢어졌을 거야.”

물러난 잇신은 입가의 피를 닦았다. 백귀야행의 빛은 계속 강렬해지며 힘을 더하고 있지만 점점 몸 안의 피가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

“너, 그 힘은…….”

이혁은 옅게 웃었다. 귀신을 부리는 검사가 괴수를 부리는 검사에게 놀라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힘의 정수, 너도 들어 본 적 있겠지? 6급을 넘는 보스들은 공략이 되어도 그 힘이 쉽사리 사라지지 않지…….”

7급처럼 심한 경우는 그 일대 자체가 인간이 살 수 없는 황폐한 지역이 될 수도 있었으며, 혹은 사람이 살던 대도시가 한순간에 열대우림처럼 변해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모두 보스몹에 담긴 힘의 정수가 땅에 뿌리 내렸기 때문.

“나는 땅에 깃든 힘의 정수를 추출 할 수 있다.”

이혁의 친절한 설명을 절망을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자신과 잇신의 실력 차이가 얼마나 극심한지 뇌리에 새겨주기 위함이었다.

“……추출해둔 힘의 정수는 60종. 내가 사용한 건 이제 막 2종류에 불과하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이 말을 듣자마자 검을 내려놓고 포기를 선언하는 게 옳은 길이니까.

“포기해. 넌 나를 이길 수 없어.”

하지만 잇신은 그런 이혁을 보며 옅은 미소와 함께 검을 들었다. 그리곤 너무나 담담하게.

“……말했잖아. 이미 죽음을 각오했다고. 바뀐 건 없어.”

죽음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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