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2화
권선징악.
악한 자에게는 벌을, 선한 자에게는 상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신유성은 알고 있었다. 헌터의 재능과 강함은 천성을 따르는 게 아니었으며 힘에는 절대로 선악이 없다는 걸.
선함은 강함을 이길 수 없다.
비단 헌터의 세계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으며, 비단 무력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야생에서 현실에 이르기까지 모두들 이름은 다르지만 각자의 ‘힘’을 사용한다.
그러나 자신을 아직도 두려움에 떨던 어린아이로 본다면 그건 크나큰 착각이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놓는다. 특히 어린아이는 더욱 그렇다. 하루하루 강물처럼 느릿하게 흘러간 10년도 용암이 터져 오르듯 격정적인 하루도 모두 착실하게 쌓이기 마련이다. 그건 가치관을 바꾸고 삶을 바꾸며 운명을 바꾼다.
신유성은 달라졌다.
5살의 어린 아이였던 신유성에게 주어진 시간은 이제 힘이 되었다.
‘……결국에는 이런 결말인가.’
신유성은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가장 잊고 싶었던 건 신오가문의 핏줄이란 사실이었다. 유원학의 가르침 속에서 자신은 유원학과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의 스승님은…… 내가 우쭐할까, 칭찬에 박하셨지만 그게 사물이든 사람이든 곧잘 장점을 알아채는 분이었어.”
무감정하게 보일 정도로 가라앉은 신유성의 말은 동료들도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신유성의 감정이 어떠한지 유추할 필요는 없었다.
소중한 존재가 누군가에게 위해를 받았다는 건, 누구나 분노하고 슬퍼하는 보편적인 감성이었다.
다만 느끼는 감정의 차이와 표출하는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신유성은 어떠할까.
“굳이 말을 하지 않으셔도 동료의 장점을, 제자인 나의 좋은 면을 누구보다 알아주신 분이었지.”
신유성은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그렇기에 쉽사리 저건 분노라고, 저건 슬픔이라고 확정할 수 없었다. 지금 신유성은 감정을 갈무리하고 있었다. 감상에 빠질 여력이 있다면 그 힘을 벨벳을 구하는데 써야 했다.
“내가 그런 스승님처럼 될 수 있다는 건 순전히 착각이었어.”
“유성 씨……. 유성 씨는…….”
처음보는 신유성의 모습에 스미레는 괴로운 듯 말을 삼켰지만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스미레. 위로할 필요 없어. 사실이니까.”
신유성은 스미레에게 평소처럼 자상한 미소가 아닌, 굳은 얼굴과 무감한 목소리로 답했다.
“……신하윤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벨벳의 드래곤하트에서 마나를 빼앗아 갔어, 절대로 자연히 회복할 수 있는 양이 아니지.”
그러나 그것도 힘들어져 왔다. 점점 결론에 도달한 신유성의 목소리는 어느새 뚜렷한 분노가 깃들어 있었다.
“신하윤은 벨벳이 죽는다는 걸 알면서 그런 선택을 내린 거야.”
신유성에게 신하윤은 인간에 대한 사랑도, 따뜻한 마음도, 연민도 무엇 하나 느낄 것 같지 않은 괴물이었다. 자신이 필요하다면 누가 되었든 목덜미를 깨물어 희생시킬 짐승이었다.
그 어떤 이유를 붙여도 이해 할 수 없었다.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 하여도 용서 할 수 없었다. 좋은 점이라곤 찾아낼 수 없었다.
“난 신하윤에게서 어떤 좋은 점도 볼 수 없어. 신하윤의 방식을 막거나,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 건 내 착각일 뿐이야.”
아델라는 분노와 슬픔과 결의가 뒤섞여 주먹을 꽉 쥐었다. 김은아는 머리가 아픈 듯 이마에 손을 짚었다. 에이미는 말없이 벨벳과 찍은 사진을 바라보았고, 이시우는 긴 한숨을 뱉어냈다.
“난 스승님과 달라.”
신유성의 몸에서 칠흑 같은 검은색의 마나와 적색의 마나가 스며져 나왔다.
평범한 인간의 심상은 내면에만 머무르지만 헌터는 마나라는 존재를 통해 내면의 심상을 외부로 표출할 수 있었다.
신유성의 주위를 감도는 건 평소의 청명한 푸른색이 아닌, 분노와 악의가 뒤섞인 검붉은 마나였다.
“……힘을 써서 벨벳의 마나를 되찾아 올 거야. 필요하다면 신하윤이 재기할 수 없도록 짓밟는 한이 있어도 내 평화를 지킬 거야.”
신유성이 힘을 기른 방식은 유원학의 것이라 하여도 ‘힘’을 이용하는 방식은 결국 신오가문에 것에 가까웠다.
어쩌면, 스승님의 가르침을 백분 이해했다면 분명 더 나은 선택지가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부분은…….’
그러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신유성은 누군가의 기척에 말을 삼킨 채 고개를 돌렸다.
“너는 싫어할 이야기지만. 이렇게 보니…… 확실히 그 눈, 넌 하윤이와 닮았군.”
이혁은 빈정거리는 게 아니었다. 신유성과의 첫 대면 때는 전혀 둘의 접점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 신유성의 분위기는 몹시 신하윤과 닮아 있었다.
“당신은…….”
이혁을 본 스미레는 카페에서 있었던 만남을 떠올렸다. 그제야 스미레는 이혁이 자신에게 했던 제안과 벨벳의 일이 하나의 퍼즐로 맞아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기억하고 있나 보네, 난 지금의 상황을 막기 위해 네가 있는 일본까지 찾아간 거다. 널 탓할 생각은 없다만 안타까운 일이지.”
“그런…….”
벨벳에게 일어난 일이 모든 게 자신의 탓처럼 느껴진 스미레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뭐야 당신, 스미레한테도 수작을 부린 거야!?”
“협박해도 소용없어. 이건 진짜 몸도 아니니까.”
결국 화를 주체하지 못한 김은아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기가 깃든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지만 이혁은 자신의 검조차 꺼내지 않았다.
“수작이라니. 스카웃이라고 하지. 게다가 나쁜 제안도 아니었다. 하윤이가 아니라면 어디서도 그런 거금은 받을 수 없어.”
그러나 지금 신유성은 이혁의 페이스에 어울려 줄 여유가 없었기에 손을 들어 일축했다.
“……홀로 우리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본론부터인가? 좋네.”
이혁은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마치 긴 등대처럼 하늘까지 이어진 백색 기둥의 이름은 천상탑. 포탈을 제외하면 천공섬은 물론 여타 다른 섬들을 이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나는 이 천상탑에 오르기 전에 너희가 분명히 선택해야 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거든.”
“……선택?”
김은아는 이혁을 향한 적개심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혁을 향해 화풀이를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었다.
지금 대면하고 있는 이혁의 몸은 설명을 위해 만들어낸 아티팩트에 불과했다. 진짜 몸은 하늘에 떠오른 섬 중 하나에 숨어 있었다.
“그래, 선택. 모두 택하려는 욕심쟁이는 모두 잃기 마련이야. 그러니…… 너희가 하고 싶은 게 하윤이를 향한 복수인지, 아니면 그 아이를 구하는 일인지 하나만 택하라는 거야.”
비릿하게 웃은 이혁은 천공섬이 자리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러자 엄청난 마나를 담은 6개의 빛의 조각이 유성 같은 꼬리를 늘어트리며 각기 다른 섬을 향해 흩어졌다.
“방금 날아간 게 뭔지 알고 있어?”
“세공품에 담긴 거대한 마나 덩어리……. 당신 무슨 생각이야? 저건 누가 봐도…….”
천리안을 가진 이시우가 진실을 눈치채고 혈색이 창백해지자 이혁은 하늘에 떠오른 섬을 올려다보며 질문을 던졌다.
“천공섬의 유래를 알고 있나?”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이혁이 갑자기 던진 의문의 질문에 답변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그러나 이건 지금의 상황을 설명하려면 필요한 이야기였다.
“천제의 힘으로 하늘에 떠오른 천공섬과 그 힘에 영향을 받아 떠오른 12개의 섬. 사람들은 그 모습이 마치 하늘이 다스리는 12개의 나라 같다고 하여 비국(飛國)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비국은 천공섬을 지키는 형세로 보였지만 전혀 관계없는 땅이다. 신하윤을 제압하기를 원한다면 바로 천공섬을 향해 나아가면 될 일이었다.
“하윤이가 있는 곳은 가장 높이 떠 있는 천공섬. 나머지 12개의 비국은……. 원래 너희에게 의미가 없는 장소겠지.”
하지만 그래서야 재미가 없었다.
신하윤은 이 거대한 의식을 일찍이 준비했고, 진즉에 마련해둔 안배가 있었다.
“하지만 너희가 찾는 물건이 비국에 흩어져 있다면 어떨까?”
“흐엑, 설마! 그럼 방금 흩어진 게 벨벳의…….”
놀란 에이미가 입을 가렸다. 혹여 글래스하트에 담긴 마나가 빠져나온다면 벨벳을 회복시키는 건 영영 불가능했다.
“그래. 비국의 제단에 있다. 6개의 꼭짓점은 거대한 마법진을 형성하고 있지. ……다른 염려는 하지 않아도 좋아. 우리도 글래스하트에 담긴 마나를 술식에 사용해야 하니까.”
천공섬을 향할 사람과 6개의 제단에 사용된 글래스하트를 빼어내려면 인원은 7개의 파티로 쪼개져야 한다. 곧 합류할 일본 파티를 합치더라도 하나의 제단에 할당되는 인원은 1명에서 기껏해야 2명이었다.
“하윤이가 있는 천공섬에 향하는 인원이 많을수록. 그 꼬마를 구할 확률은 떨어질 거야. 물론 하윤이도 한 조각을 가지고 있으니, 어쩌면 아예 꼬마를 버리는 것도 방법이겠군.”
이건 이혁의 명백한 도발이자, 파티를 와해시키기 위한 신하윤의 유희였다. 신하윤은 선택이라는 이름을 통해 신유성의 관계를 파괴하는 가학적인 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지금까지 준비를 해온 신하윤을 저지하고 벨벳을 지키려면 6개의 제단에서 모두 승리한 채, 동시에 신하윤을 꺾어야 했다.
“하윤이는 네가 홀로 천공섬에 올 거라 말했다. 그 욕심 때문에 패배할 테니 내게 진실을 알려주라 일렀다. 물론…… 어떤 선택을 할지는 네 마음이지만.”
이야기를 전달한 이혁의 분신체는 몸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건 이혁의 말처럼 오직 신유성의 선택뿐, 그러나 신하윤의 예측처럼 벨벳을 구한다는 선택지는 바꿀 수가 없었다.
“……곧 일본팀이 도움을 주러 올 거야. 인원은 새롭게 파티원이 된 한설아를 비롯해 4명. 그럼 6개의 파티로 충분히 나뉠 수 있어.”
신하윤을 저지해야 한다.
그러면서 벨벳을 구해야 한다.
신하윤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이 모순된 선택지 속에서 신유성이 느낄 고통을 상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하윤의 예측과 달리 신유성의 고민은 짧았다.
‘정답은 하나뿐이야.’
신하윤은 강하다. 그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얼마나 많은 힘을 축적했을지 상상조차가지 않았다.
하지만 이건 선택지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건 남에게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벨벳을 구하기 위한 최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천공섬에는 나 혼자 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