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0화
혈액은 인간의 몸에서 산소를 운반한다. 10%를 잃으면 무기력함과 신체의 이상을 호소하고 20%를 잃으면 심각한 위험을 초래하며 30% 이상은 대개 죽음에 이른다. 몬스터와의 전투로 헌터가 과다 출혈의 위험에 빠지는 건 너무 흔한 경우였다.
아무리 헌터라 하여도 인간의 몸은 이렇게나 연약하다. 신체의 혈액이 모자라는 것만으로 심각한 이상을 초래한다.
그렇다면 드래곤은 어떠한가?
최강의 생물이라는 이름처럼 드래곤은 혈액이 부족한 것 정도로 죽지 않는다. 드래곤의 마나는 체내에 머물며 모자란 요소를 생성해낸다.
혈액이 부족하더라도, 음식을 먹지 않아 열량이 부족하더라도, 공기 중의 산소가 모자라더라도, 드래곤의 마나는 그 어떤 경우에도 놀라울 정도의 효율로 신체가 필요한 요소를 변환한다.
인간과는 신체가 다르며 엔진이 다르다. 만능 물질이라 불리는 마나를 스킬이나 특성의 도움 없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그렇다면 드래곤 슬레이어가 드래곤을 잡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 방법은 실천하기엔 너무나 어렵지만 실로 간단하다.
드래곤 하트를 봉인하거나 베어내고 종전에는 체내에 깃든 모든 마나를 소모하게 하는 것, 그렇게 마나를 모두 소모한 드래곤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얼마나 괴로웠나요?”
침대 앞에 무릎을 꿇은 아델라는 벨벳의 손을 잡은 채 물었다. 하지만 그렇게나 좋아하는 아델라의 방문에도 벨벳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신하윤에게 마나를 빼앗긴 채 그저 악몽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캬우…… 오르카…….”
드래곤인 벨벳은 악몽으로 찾아와 직접 아델라를 구해줬음에도, 아델라는 그럴 수 없었다. 지금 아델라가 할 수 있는 건 괴로워하는 벨벳의 손을 잡아주는 것뿐.
“……벨벳.”
분노, 그리고 또 분노했지만 아델라는 애써 눈을 감았다. 그렇지 않고선 마음속에서 요동치는 감정을 갈무리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델라가 해야 할 일은 신하윤을 저지하는 일이었고.
“……당신이 일어나기 전에 이 모든 일을 끝내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행복한 꿈을…….”
지금 아델라가 벨벳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덴이 남긴 아티팩트의 힘을 빌리는 정도였다.
<천신룡의 마나구름> 유니크
정보 - 천신룡의 주위를 둘러싼 마나구름의 조각으로 용신의 마나가 겹겹이 응축되어 있다.
상세 - 마나구름은 주위의 대기 마나 농도를 짙게 만든다. 호흡으로 흡수가 가능하며 작은 조각도 10시간 이상 유지된다.
비록 벨벳이 잃어버린 마나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겠지만 천신룡의 마나구름은 임시방편 정돈 되었다.
<요괴 바쿠의 꿈사탕> 유니크
정보 - 꿈을 먹는 요괴 바쿠가 행복한 꿈을 모아 만들어낸 사탕이다. 특이하게도 무색무취의 사탕이다.
상세 - 입안에 머금은 채로 잠에 들면 반드시 행복한 꿈을 꾸게 된다.
유니크 아티팩트는 그 희귀성 때문에 효과와 사용처를 불문하고 최소 억을 호가한다. 아델라는 그런 고급품을 벨벳에게 좋은 꿈을 선물하기 위해 기꺼이 사용했다.
사아아-
아델라는 가습기에 구름 조각을 넣고 벨벳의 입안에 꿈사탕을 입 안에 넣어주었다.
“후으음……. 냠.”
그 후, 벨벳의 표정이 한결 나아진 걸 확인한 아델라는 머리카락을 걷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이제 아델라에게 남은 임무는 오직 하나. 신하윤을 처리하고 글래스하트의 마나를 돌려받는 것.
“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벨벳을 잘 부탁해.”
아델라는 벨벳의 품에 곰인형 론을 안겨주었다. 냉철한 마음을 위해 분노를 식히며 신유성이 찍어준 좌표를 향해 포탈을 열었다.
* * *
졸졸졸-
귓가를 간질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벨벳은 생각했다. 이상하다. 분명 내가 잠든 곳은 병원이었는데 이 소리는 뭘까?
그러나 슬며시 눈을 뜬 벨벳을 반기는 건 병원의 천장이 아닌 블록 장난감으로 이루어진 숲이었다.
“캬항? 여긴 어디지……. 꿈인 거 같은데 깨지도 않아!”
벨벳은 심각한 표정으로 팔짱을 낀 채 주위를 보았다. 아까 들었던 시냇물 소리는 아무래도 초콜릿 강이 흐르는…….
“캬향! 초콜릿 강!”
이곳은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눈이 돌아갈 이상향의 세계. 강은 초콜릿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흙은 초코 스펀지케이크로 되어 있었으며, 기어 다니는 벌레는 젤리였다.
벨벳은 배가 고프지도 않았지만 일단 초콜릿 강에 입을 가져다댔다. 덕분에 혀가 아린, 폭력적인 달콤함에 눈이 크게 떠질 지경이었다.
“휴르릅- 여긴 강이 초콜릿이야! 흙은 전부 케이크! 캬항!”
벨벳의 기분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드는 건, 이 과자들은 아무리 먹어도 절대 배가 부르지 않다는 점이었다. 하루종일 간식을 만끽하며 행복을 누리는 것도 가능했다.
“캬하앙! 게다가 바위는 쿠키야!”
벨벳은 행복한 표정으로 주위의 모든 과자를 음미하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토이월드의 룰을 어기고 말았다.
그건 바로 아무리 맛있어도 남의 집을 먹으면 안 된다는 규칙.
“냠냠, 지붕은 비스킷이야…….”
결국 자는 사이 지붕을 전부 뜯어 먹힌 토이월드의 장난감 병정은 문밖으로 뛰어나와 소리를 쳤다.
“이 녀석! 안 돼! 남의 집을 다 먹으려고 하다니! 토이월드의 규칙을 어기는 거야?”
“누가 규칙을 어겨?”
“저 녀석이야?”
장난감 병정의 목소리에 오두막에 살던 인형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오자 벨벳은 머쓱한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캬항……. 미안 너무 맛있어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러나 벨벳의 모습을 확인한 장난감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벙 찐 표정으로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저 꼬리!”
“저 뿔!”
“캬항-!을 붙이는 말투까지!”
“화, 확실해 저분은…… 바로!”
“장난감들의 왕!”
“토이월드가 기다린! 버림받은 장난감들의 진정한 주인!”
와아아-
장난감들은 기쁨의 함성과 함께 벨벳을 헹가래 치며 들어 올렸다.
“뭐지, 벨벳이 진정한 주인-!? 역시 벨벳은 대단해!”
벨벳을 필두로 한 장난감들의 행진은 점점 거대해졌다. 처음에는 다섯 정도였지만 숲이 아닌 성이 있는 곳으로 향하자. 장난감들의 숫자는 끝도 없이 불어났다.
“우리들의 주인님!”
“저희들은 이 순간만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토이킹 님이 기뻐하실 거야!”
“주인님과 함께 국왕이 계신 성을 향해서 행진이다!”
벨벳과 장난감들의 행진은 점점 거대해지며 토이성을 향해 나아갔다. 이쯤 되니 벨벳은 장난감들이 말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왕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캬항, 엄청난 환대야~ 대체 누가 이렇게 벨벳을 기다린 걸까?”
성문을 넘어, 구불구불한 복도를 넘어 어느새 도착한 토이월드의 왕좌. 그러나 벨벳의 눈앞에 보이는 건 블록으로 이루어진 왕자뿐, 장난감들이 말한 국왕은 어디에도 없었다.
“머지, 아무도 업는데…….”
갸웃-
고개를 갸웃거린 벨벳은 이상하다는 듯 왕좌 주변을 살피기 위해 이곳저곳을 확인했다. 슬그머니 내밀어진 흰색 무늬가 새겨진 매끈한 머리와 검은색 꼬리.
“호걱, 설마…… 오, 오르카!?”
벨벳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이름을 부르자 오르카는 조심스레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후후, 정답입니다! 잊지 않으셨군요! 저는 계속 작은 주인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캬하앙! 당연하지!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나써!”
“그러네요. 원래 꿈의 세계란 그런 것이겠지요! 여긴 하루가 1년 같고, 1년이 하루 같은 세계니까요. 물론 저도 이렇게 금방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르카와 감격의 포옹을 한 벨벳이 세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마치 기쁜 일이 생긴 강아지처럼 아주 세찬 꼬리질이었다.
“드릴 말씀이 많습니다! 보여 드릴 곳도 많고요!”
벨벳과 오르카는 유니콘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라냐를 피해 무지개를 건너 여러 왕국을 구경했다.
그 중에는 예쁜 공주님 인형들이 모인 성도 있었고, 공룡 모형들이 모인 쥬라기섬도 있었다.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그 벨벳마저 이젠 어느 편한 곳에 앉아 쉬고 싶을 지경이었다.
“캬하앙, 하루종일 구경해써…… 근데도 안 끝나써, 장난감이 엄청 많아…….”
벨벳과 오르카는 장난감 성의 외각에 둘러앉았다. 토이월드의 전경이 한 눈에 보였지만 그럼에도 장난감 세상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평생 둘러봐도 모자랄 겁니다. 토이 월드에는 다양한 장난감들이 있죠. 하지만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캬항? 그게 뭔데?”
고개를 갸웃거린 벨벳의 물음에 오르카는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평소처럼 말했다.
“그건…… 토이월드의 장난감들은 모두 버림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모두 나이를 먹기 마련이고, 어른이 된 인간들은 더 이상 오래된 장난감을 찾지 않으니까요.”
마치, 동화 속 한 장면이 변하듯 화창했던 날이 저물었다. 해는 저편으로 사라졌고, 네모난 달이 떠올랐다. 아름답게 하늘을 수놓은 건 토이월드답게 별이 아닌, 별모양의 모빌.
“……전부?”
어딘가 걱정스러운 벨벳의 물음에도 오르카는 그저 웃었다.
“……저는 원래의 모습이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되고 낡은 장난감이었습니다.”
그래. 그건 너무 오래된 기억이라 이제 기억조차 희미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꺼내놓을 수 있게 되다니 이건 분명한 성장이다. 인간으로 치자면 어른이 된 것과 같았다.
“원래의 전 얼마나 재미가 없는 장난감이었던 걸까요. 여러 어린 아이의 손을 거쳤지만…… 항상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버림받았죠.”
“오, 오르카를 버려써!? 꼬리도 있고 이러케 귀여운데!?”
그때도 이런 아름다운 유선형 몸과 검은색 꼬리가 있었다면 버림 받지 않았을까? 오르카는 범고래의 울음소리를 몰랐기에 그저 캬캬캬- 하고 웃고 말았다.
“그러네요. 그때도 이런 꼬리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그렇게 버림받은 장난감은 토이킹이 되었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백분 활용하여 이곳저곳 장난감의 몸을 옮겨 다녔다.
언젠간 인간 세상을 정복하고 자신을 버렸던 어린 아이들을 지배하겠다는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오르카의 몸에 정착할 수 있었던 건 토이킹에게 너무나 큰 행운이자, 행복이었다.
“……작은 주인님. 저는 작은 주인님을 만나, 소중하게 여겨진다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벨벳과 오르카는 달을 보았다.
네모난 달은 빛을 내뿜으며 벨벳과 오르카를 반겨주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모양의 달은 햇살을 내뿜는 현실의 태양보다 더 푸근했다.
“나도 오르카랑 만나서 조아써.”
벨벳의 말에 오르카는 숨을 참았다. 어쩌면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진짜 소망은 세계 정복 같은 거창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저 한 명의 어린아이가 해준 짧은 대답 정도면 충분했다.
“벨벳은…… 아직 오르카랑 헤어지고 싶지 않아.”
벨벳의 자그마한 중얼거림에 오르카는 대답을 참았다. 지금은 감사를 표할 순간이라고 생각했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는 건 쉽지 않았다.
“벨벳은…… 평생 오르카를 기억할 거야.”
오르카는 슬퍼하는 벨벳의 등에 손을 얹었다.
“평생이라……. 정말 좋은 울림입니다. 장난감에게 이보다 멋진 인생이 있을까요?”
이건 벨벳과 오르카에게 허락된 마지막 꿈이자. 최고의 꿈. 오르카는 이 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기에 동그란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면서도 벨벳이 듣지 못하게 울음을 참았다.
“오르카……. 동그란 달한테 소원을 빌면 꼭 이루어진대. 네모난 달도…… 그러까?”
코를 훌쩍인 벨벳의 물음에 오르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분명 이루어질 겁니다.”
약간의 침묵.
눈을 뜬 벨벳은 소원이 이루어지길 믿어 의심치 않는다는 듯 한결 나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벨벳은…… 오르카랑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빌어써.”
“저는…….”
아직 빌지 않았지만 오르카의 소원도 같았다. 하지만 똑같은 소원을 빌어서야 의미가 없었다.
결국 오르카는 토이킹의 능력을 얻었던 그 날처럼 다시 한번 소망할 수밖에 없었다.
오르카는 소원을 빌었다.
너무나 과분한 꿈이지만 만약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번에는 장난감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나 작은 주인님의 친구가 되고 싶다고 그렇게 소원을 빌었다.
물론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꿈만 같아서 오르카는 곧이곧대로 말하지 않았다.
“네. 저도 그렇게 소원을 빌었습니다! 다시 작은 주인님과 만나고 싶다고요!”
벨벳이 슬퍼할 테니 처음으로 착한 거짓말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