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조용한 병실. 신유성은 생각했다.
강유찬이 무언의 협박으로 신하윤의 일처리를 맡긴 순간부터.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예견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벨벳.”
신유성은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누워 있는 벨벳을 보았다. 벨벳은 드래곤하트에 남아 있던 마나를 대부분 가까이 빼앗기며 그 여파로 고열에 시달렸다.
지금은 벨벳이 만들어둔 마나석과 병원의 시설로 버티고 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인간의 기술력과 힘으로 드래곤하트에 저장된 엄청난 마력을 다시 채우는 건 불가능하다.
고장이 난 배관에서 수돗물이 새듯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벨벳의 불꽃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 사람…… 아빠한테 사과하고 싶다고 해써, 근데 다 거짓말이어써…….”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는 벨벳도 신하윤이 미운 듯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르카도 주겨써…… 내 소중한 친구인데…….”
벨벳의 말대로라면 오르카는 마나를 빼앗는 촉매를 움직이기 위해 직접 봉인되었다고 한다.
글래스하트 같은 마나흡수 촉매에한 번 끌려들어간 영혼이 빠져 나올 수 있을 리가 없다.
봉인된 오르카의 의식을 구하려면 결국 글래스하트를 깨트리는 수밖에 없다.
신유성은 벨벳의 손을 잡았다.
벨벳의 손은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워서 놓을 수 없었다. 신유성은 자신의 온기를 전하려 애썼다.
“아니, 벨벳. 오르카는 죽지 않았어. 내가 반드시 구할 거야.”
마나를 잃어 피곤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유성이 왔다는 사실에 안도했기 때문일까. 벨벳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캬으웅……. 응, 난, 아빠를 믿어”
신유성은 한동안 벨벳의 곁에서 손을 잡아주었다. 벨벳이 깊게 잠이 든 걸 확인하고 나서야 병실의 밖으로 걸어 나왔다.
벨벳의 앞에선 애써 본래의 감정을 유지하려 했지만 신유성은 이렇게 큰 분노를 느낀 적이 없었다.
스승님, 벨벳, 그리고 동료들.
지금 신유성이 동료와 만든 유대는 신오가문에게 버림받은 자신이 새롭게 만든 가족이었다.
‘……신하윤.’
신유성을 너무나 차가운 표정을 한 채 정면을 응시했다. 지금까지 신유성은 스승의 가르침대로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려 애썼다.
무투가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원망은 열의를 불태우지만 생각을 굳게 만든다. 분노는 힘을 키우지만 시야를 좁게 만든다. 슬픔은 감정을 고취시키지만 의욕을 지워버린다.
[마음이란 호수에 띄운 나뭇잎과 같아서 잔잔한 물결에도 요동치기 마련이다.]
심호흡을 한 신유성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떠올렸지만 머릿속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신유성은 지금 차가운 분노에 잠식됐다.
[캬항-! 아빠가 제일 좋아!]
[벨벳을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나와 행복은 멀다고 생각했지만 내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할 수는 있다고…….]
벨벳이 준 행복과 아델라의 유대는 이미 신하윤을 향한 복수의 연료로 바뀌어 있었다.
- 난 신하윤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무슨 목표를 가지고 있는지. 어디로 갈지. 모든 정보를 알고 있어. 남은 건 네 선택이지.
신유성의 귓가에 결단을 내리라던 유월의 목소리가 맴돈다. 유월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안다. 자신이 신하윤의 야망을 꺾어주길 원하고 있겠지.
하지만 벨벳이 이렇게 된 이상 선택지는 없었다.
‘내 두 손으로 되찾는 수밖에 없어…….’
신유성이 결의를 다지며 매서운 눈으로 주먹을 쥔 순간.
꾸욱-
누군가 신유성의 옷깃을 잡아 당겼다. 분노로 시야가 좁아졌기 때문일까 신유성은 옆으로 다가온 아델라조차 보지 못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아델라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시울이 주변이 붉었다. 너무나 위험한 일이지만 신유성은 혼자 하겠다는 건방진 말은 할 수 없었다.
이건 벨벳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지금은 모두가 힘을 모을 순간이었다. 지금 병실에 모인 파티원은 모두 생각이 일치했다.
“위험하다는 말은 하지 마. 나도 갈래. 무슨 짓을 해서라도 되찾아 올 거야.”
아주 심기가 나빠 보이는 김은아가 한 발 나섰다. 스미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랏빛 문양이 새겨진 손등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라플라스 님도 힘을 빌려주셨어요. 유성 씨, 저희 걱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사쿠라의 도장에서 언제 돌아왔는지 이시우도 팔을 걷어붙이며 신유성의 곁에 섰다. 게다가 일본팀이라는 든든한 지원군까지 신유성과 함께하기를 약속해주었다.
“우리 파티가 위험에 처했다고 하니까. 일본팀도 함께 와주겠대. 사쿠라도 잇신도 전부 찬성했어.”
“우리 파티가 위험에 처했다고 하니까. 일본팀도 함께 와주겠대. 사쿠라도 잇신도 전부 찬성했어.”
모든 단계가 준비 됐다. 이제 남은 건 신유성의 결단뿐.
“바로 움직이자.”
신유성의 결단에 파티원들은 함께 포탈존을 향해 걸어 나갔다.
* * *
탓- 타타타!
치트는 일반인은 엄두도 못 낼 빠른 속도로 타자를 치며 중간 중간 솜씨 좋게 입으로 과자를 집어넣었다.
“에르제와 유월이 준 정보가 맞았네. 신하윤이 이동하는 곳, 정말 천공섬이야. 보스 공략으로 원동력이던 부유의 구슬도 망가진 곳인데 말이야.”
흡혈의 에르제와 유월이 준 정보 덕분에 치트는 자신의 통신망을 이용해 계속 신하윤의 움직임을 추적을 하고 있었다.
그건 모두 대장인 네임리스가 말한 ‘신하윤이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언질 때문이었다.
“……그럼 신하윤이 매개체를 모두 모았다는 뜻인가?”
클로는 신하윤의 수완이 믿기지 않았다. 그 많던 제약을 뚫고 정보망까지 속이며 드래곤하트를, 혹은 그에 버금가는 마나엔진을 구해 왔다니 그건 리벨리온 같은 빌런 단체도 힘든 일이었다.
“예상보다 너무 빠르긴 하네~ 지금은 대장도 에르제도 없고.”
그렇다면 누구를 쓸까.
하지만 고민은 필요 없었다. 지금의 리벨리온에겐 새롭게 들어온 한 자루의 검이 있었다.
전설의 헌터 검신이 벼려내고 네임리스가 완성시킨 최강의 검이.
“류진. 다음 임무다.”
* * *
천공섬은 이름과 달리 하나의 거대한 섬과 십여 개의 작은 부지가 바다위에 떠있는 평범한 군도였다.
“알고 있어? 원래의 천공섬은 바다가 아닌…… 하늘 위에 떠있었다는 거.”
섬의 중심.
제단에 올라선 신하윤은 섬 전체를 내려다보았다. 이전 천공섬을 다스린 천제(天帝)라 불린 거대한 새는 ‘부유의 구슬’을 사용해 섬 전체를 하늘 위로 떠오르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하윤은 필요 없었다.
신하윤은 부유의 힘은 아니지만 염동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글래스하트에는 지금 드래곤하트에 버금가는 원동력이 있었다.
‘……정말 이 섬이 하늘위로 떠오를까?’
이혁은 좀처럼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7급 헌터도 힘든 일이지나 신하윤은 글래스하트를 쥔 채 미소를 지었다.
“천제의 명령 앞에 열두 고리는 하늘 위로 떠오르라.”
쿠궁- 쿠우웅!
마치 지진이 시작된 듯 땅이 흔들리며 섬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거대한 섬이 하늘 위로 떠오르게 만드는 건 인류의 기술력으로도 불가능한 일. 하지만 그게 헌터의 무서운 점이었다.
헌터의 특성은 인류의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난 힘. 신하윤의 염력과 글래스하트라는 마나엔진이 합쳐진 시너지는 상식을 부수는 힘이었다.
구구구구-
신하윤의 손짓에 따라 섬 전체가 떠올랐다. 흙이 쏟아지고 바깥쪽의 바위들은 바다로 굴러 떨어졌다.
아파트의 20층 높이가 50미터 언저리라면 지금 천공섬은 100미터 높이의 하늘 위에 떠올라 있었다.
“곧, 길이 떠오를 거야. 그럼 비석이 있는 섬으로 이동해.”
지금 신하윤이 있는 천공섬을 비롯해 12개의 섬을 잇는 다리가 떠오른다.
두웅-
그럼 섬을 지키는 비석은 안테나의 역할을 해줄 테고 신하윤은 아우로라와 촉매를 사용해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전 세계로 퍼트릴 생각이었다.
* * *
어두운 방.
강유찬은 유리 너머로 야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헌터 협회장이 된 이래, 아니 ‘탑의 진실’을 본 이래 강유찬은 누구보다 지금의 순간을 기다려왔다.
처음엔 탑이 보여준 진실을 의심한 적도 있었지만 다행히도 운명의 톱니바퀴는 착실히 굴러갔다.
“……내가 원한 길은, 그저 검술의 끝을 보고 싶다는 욕심뿐이었다. 넌 나보다 악취미를 가진 놈이군.”
얼핏 비난이 담긴 검신의 말에도 강유찬은 고개를 저었다.
“너도 나도 실패를 향해 죽어가는 늙은이일 뿐이다. 우리의 욕심은 모두 같다.”
정점을 향해 달려간 헌터가 몇 개 남지 않은 계단 앞에서 어찌 그 열망을 놓을 수 있을까, 강유찬은 아직 꿈을 포기하지 못한 등산가와 같았다.
“유원학과 넌……. 다른 이의 손에 그 욕심을 넘겼지만 난 아직 놓지 못한 것뿐이야.”
검신은 강유찬의 말이 이런 몸이 된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둘은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사이였고, 서로의 아픈 곳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고독(蠱毒)이라는 주술을 알고 있나?”
“고독?”
“처음 7급 보스에 도전 했을 때 나는 협회의 충술사에게 부탁한 적이 있지.”
검신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강유찬을 보며 웃었다.
“7급 보스를 약화시킨 아티팩트지만 만드는 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전 지역에서 강한 독을 가진 괴수들을 한 곳에 모아. 거대한 구멍 안에 집어넣는 거다.”
검신은 거대한 구멍 안에서 득실거리던 괴수들을 기억했다. 온갖 독을 뿜으며 지옥이 된 구덩이는 아직도 기억 속에서 생생했다.
“독수들은 독을 뿜고, 서로를 찢어발기며, 눈앞에 있는 모든 걸 집어 삼키지. 그럼…… 구덩이 안에는 단 하나의 독수만 살아남는다.”
검신의 말뜻을 이해한 강유찬은 심기 불편한 표정을 지었지만. 검신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건 이미 생물이 아닌, 무엇도 죽일 수 있는 저주……. 네가 원하는 결말과 비슷하지 않은가?”
강유찬은 검신의 도발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야경을 바라보며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강유찬은 너무나 작게 읊조렸다.
“……나는 그걸로 만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