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누군가의 말소리가 들려온다. 새의 아름다운 지저귐이 들려온다. 아델라가 깨어난 곳은 차가운 얼음성이 아닌 따스함이 감도는 숲속 같았다.
감긴 눈 틈으로 눈부신 햇살이 스며든다. 오늘처럼 눈꺼풀이 무겁게 느껴진 적이 있을까?
“아…….”
아델라는 숨을 뱉어내며 힘겹게 눈을 떴다. 아델라는 아까부터 자신의 차가운 몸을 받쳐 따뜻하게 데워준 건 신유성의 손이 내뿜고 있던 온기라는 걸 깨달았다.
아델라는 부서진 루인성의 천장으로 숲의 전경이 볼 수 있었다. 그녀는 마녀가 쓰러지며 겨울이 물러간 숲의 생기를 보았다.
“당신…….”
아델라는 마주한 신유성을 얼굴을 자신의 두 눈에 똑똑히 새겼다. 겨울이 걷힌 세상의 전경을 가슴에 새겼다.
언젠가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내면에 잠든 불안을 모두 해결한 자신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그때 느끼는 감정은 공허함일까? 후련함일까? 아니면 그 이상의 무언가일까?
그러나 정답은 너무나 심플했다.
지금 아델라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은 그런 자잘한 감상이 아닌 감동이었으니까.
아델라는 신유성을 보았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얼어붙은 성에서 마녀를 물리치고, 승리의 기쁨도 없이 조마조마한 마음속에서 자신을 끌어안은 채 힘겨운 시간을 기다려준 사람이었다. 그 감정이 무엇이냐 누군가 묻는다면 마음 같아선 모른다고 답하고 싶지만 아델라는 이미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돌아왔구나. 아델라.”
뒤늦게 안도한 신유성이 웃었다.
아델라는 즉각적인 대답 대신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해보더니 조금은 장난스럽게 물었다.
“저를, 기다리셨습니까?”
이건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겠지. 신유성이 그런 일에 당한다면 자신이라도 그렇게 행동하겠지.
신유성이 입을 열었다.
조밀하게 움직이는 입은 무언가를 말하려 했다. 하지만 아델라는 신유성이 말을 하지 않아도 신유성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신유성이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제가 깨어나지 못할까, 걱정하셨습니까?”
이제 아델라는 소중한 사람이, 돌아오지 못한다는 게, 다시 보지 못한다는 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마주 보고 싶었던 과거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따스한 햇살이 느껴집니다. 무척, 빠르게 가슴이 뜁니다. ……이 감정이 무엇인지, 이전의 저라면 알지 못했겠지만 지금의 저는 알 수 있습니다.”
눈을 뜨고 신유성을 본 순간, 자신을 찾아온 벨벳의 손을 잡은 순간 아델라는 깨달았다.
“무척, 기쁘고, 안도 되는 이 마음……. 당신도 같은가요?”
신유성은 아델라의 물음에 추위로 창백해진 하얀 손을 부드럽게 잡아주었다.
“무신산을 하산했을 땐, 나는 스스로를 용감하다고 생각했어.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스승님의 기대와 나의 목표를 위해선 설령 목숨이라 하여도……. 내줄 수 있다고 생각했어.”
솔직함은 마음을 여는 문이다.
신유성은 아무런 꾸밈없이 자신을 털어놓았다. 자신의 약함을 내비칠 수 있다는 건 상대를 신뢰하고 자신을 깨우치는 깨달음을 바탕으로 한다.
“하지만 역시 그러지 못했어. 나는 그렇게 강하지 않아. 나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멀쩡하게 지낼 수도, 나를 내던질 용기도 없었어.”
빙긋-
“……후후, 알 것 같습니다.”
어떻게 신유성의 마음은 이리도 자신과 닮았을까? 아델라는 신유성의 마음이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신의 파티에 들어온 후, 저는 많은 걸 배웠습니다.”
아델라는 신유성에게, 혹은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 목소리는 힘없이 늘어진 패잔병의 것이 아닌, 지나친 기억을 회상하는 노년의 평온함과 같았다.
“스미레가 만들어준 맛있는 케이크를 먹고……, 단순히 라이벌이라고만 생각했던 김은아……. 자존심만큼, 책임감도 강한 그녀를 의지하게 되었고, 에이미라는 재미있는 동료도 생겼습니다.”
몸 안에서 루이스가 빠져나간 탓일까, 아델라는 힘이 빠진 팔을 힘겹게 들어 신유성의 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저와 당신. 그리고 벨벳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단 한 번도 믿지 않았던 운명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델라는 자신의 결핍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지금 신유성이 느끼는 기분은 나약함에 근거한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제가 지금까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건…… 승부의 긴장감 같은 대단한 감정이 아닌……. 좀 더 단순한 이유인 모양입니다.”
아델라는 추위 속에서 부모님을 찾아 헤매던 자신을 떠나보냈다. 그 빈칸을 신유성과 벨벳. 그리고 동료라는 행복으로 가득 채웠다.
“네……. 제가 그토록 찾았던 건 행복입니다.”
무감했던 자신이라면 죽음의 기로 속에서도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아델라는 삶이란 이렇게나 많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걸 깨닫고 말았다.
“……그러니 당신의 마음을 이해 할 수 있습니다.”
아델라는 숨을 참았다.
그리곤 이젠 볼 수 없는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외로웠던 자신의 곁을 지켜준 상상 속 곰인형 친구에게, 힘겨운 과거를 이겨낸 자신에게, 추운 겨울 같았던 자신의 삶에 ‘행복’이란 봄을 되찾아준 신유성에게 모두 고마움을 전했다.
“아마도 당신과 저는……. 서로를 무척 사랑하나 봅니다.”
이전의 아델라는 승부의 긴장만을 좇았다. 강자와의 전투에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고, 그게 아델라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감정이었다. 그러나 이젠 감사를, 감동을, 기쁨을, 설렘을…… 그리고 사랑을 알았다.
자신만을 위한 힘이 아닌,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힘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빼꼼-
아델라가 벨벳의 이름은 빠트린 탓일까? 벨벳은 신유성의 어깨 옆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캬항! 벨벳도 아델라 엄마를 사랑해-!”
아델라는 해맑게 웃는 벨벳을 보며 함께 웃었다.
“아……. 벨벳.”
루인성에 갇힌 기운이 해방되며 아델라의 주위에 푸른 수국이 피어올랐다.
아델라는 눈을 감았다.
가혹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으니 이젠 그만 그 추위를 잊자 그 외로움을 잊자. 이젠 봄의 향기를 느끼자.
“후후…….”
아델라가 소리 내어 웃었다.
자그마치 12년 마음 속 오랜 고민을 해결했기 때문일까, 아델라는 아득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미소를 잊지 않았다.
오늘은 모처럼 아무런 꿈도 꾸지 않는 아주 깊고 개운한 잠에 들 것만 같았다.
* * *
쓰러진 아델라를 양손으로 들어 올린 채 벨벳과 함께 돌아가는 신유성의 모습을 로렐라이는 그저 지켜보았다.
신유성은 크로노아가 건 기대를 멋지게 이루어냈다. 공략대 모두를 구해냈고 볼테라를 겨울에서 해방시켰다.
로렐라이에게 그런 신유성의 모습은 자신이 꿈꿨던 상상 속 왕자님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언제나 자신의 상상 속 공주는 로렐라이였지만 오늘 신유성의 공주님은 아델라였다.
스승님이 들으시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솔직히 로렐라이는 신유성에게 안긴 아델라를 보며 약간의 부러움마저 느꼈다.
그러나 로렐라이는 누구보다 이야기를 좋아했다, 자신이 엿듣게 된 둘의 대화는 참 괜찮은 이야기였다. 아델라와 신유성은 신뢰로 어우러진 동료였고, 그토록 강인해 보였던 신유성은 아델라를 구했다는 기쁨에 눈시울마저 적시고 있었다.
“이제 그만, 돌아갈까요. 안젤라?”
비록 자신이 공주는 아니어도 참 썩 괜찮은 이야기였다.
“정말 이걸로 괜찮으십니까?”
안젤라의 물음에 로렐라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의 힘으로 누군가를 믿고, 닫힌 마음을 연다. 멋진 이야기였어요.”
신유성을 향한 자신의 마음은 열렬했지만 그래도 그 아쉬움을 좋은 이야기를 들었다는 기쁨으로 무마하겠다고 로렐라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군요. 하지만 로렐라이 님. 정말 아쉬움은 없으시겠습니까?”
안젤라가 재차 묻자 로렐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고 하면…… 분명 거짓말이겠죠. 하지만 저는 악역이 될 용기는 없답니다.”
로렐라이는 일방적인 마음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생각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사랑의 힘으로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내지만 거기엔 ‘서로를 향한 마음’이라는 약속이 있었다.
이제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봤자 그저 신유성과 아델라를 가로 막는 시련에 불과한 것이다.
로렐라이에겐 그럴 용기가 없었다.
좋은 이야기를 들은 걸로,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게 된 걸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저벅-
대피소를 빠져 나가는 로렐라이의 발이 유독 무거웠다. 역시 이건 미련 때문이겠지. 좋은 이야기를 즐긴 후,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기분 좋은 아쉬움이겠지.
하지만 로렐라이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크로노아에게 약속했다. 자신도 신유성과 아델라에게 밀리지 않을 누구보다 멋진 이야기를 써내려가겠노라고.
* * *
삑, 삐비빅-
어두운 조명.
초록 홀로그램은 계속해서 메시지를 써내려갔다.
[공략 대상: 겨울의 마녀 루이스]
[난이도: 6급]
[지역: 볼테라]
[특이사항: 공략 완료 이후 데이터를 통한 감식 결과 최종 평가는 7급 보스로 상향 조정]
[특이사항2: 학생 참가자인 신유성과 로렐라이는 공략대원 중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임]
[공략 지원금 측정]
[2,600,000,000 won]
[……….]
6급 베테랑 헌터와 몇 명의 학생들이 7급 보스를 해결했다. 1인당 26억이라는 엄청난 지원금이 측정 되었지만 세간에 끼친 파장은 더욱 엄청났다.
이번 사건으로 전 세계의 헌터들은 물론 시민들에게까지 신유성과 로렐라이의 명성은 널리 퍼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보고서를 읽은 강유찬은 너무나 담담했다.
“역시 해낼 줄 알았지. 잘 읽었네. 그럼 나머지 스케줄도 예정대로 처리하도록.”
메이린은 그런 강유찬의 태도가 꺼림칙했다. 설마 강유찬은 루이스의 힘이 6급이 아닌 7급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그런 위험을 알면서 학생들을 사지로 내몬 것일까? 그렇다면 그 저의는 무엇일까.
하지만 메이린은 자신의 궁금증을 차마 입 밖으로 내지 않았다. 메이린은 감히 협회장인 강유찬을 상대로 의심의 기색을 드러낼 바보는 아니었다.
오히려 메이린의 마음을 읽은 듯 먼저 생각을 드러낸 건 강유찬 쪽이었다.
“……자네 생각은 이미 알고 있다네. 무모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우르르 7급들을 데리고 가면 유성이가 진면모를 드러내기 힘들 지 않겠나?”
마치 생각을 읽은 듯 날카로운 강유찬의 말에 메이린은 자신도 모르게 머리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저, 저는 그저…….”
강유찬은 그런 메이린을 보며 허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네. 만약 내 생각만큼 활약 해주지 못했다면 공략대가 위험했던 건 사실이니까.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이 전부라면…….”
소파에 앉은 강유찬을 인자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았다.
“어차피 우리들조차 이루지 못한 ‘진실’에 도달할 수는 없겠지.”
실리를 위해선 어떤 희생도 감수하는 것. 그게 강유찬이 협회장이 된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