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숨을 쉬기도 버거운 차가운 냉기가 물러가고 따뜻한 온기가 얼어붙은 팔을 타고 퍼져나간다.
타닥타닥.
듣기 좋게 울려 퍼지는 모닥불 소리는 신유성에게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착각마저 느끼게 했다.
‘시간이. 멈췄다…….’
크로노아의 힘으로 세상은 굳어버렸다. 흑백 사진처럼 멈추어져 여신의 온기가 머무는 곳에만 본래의 색이 남겨져 있었다.
물론 신유성의 감각은 자유로웠다. 정상적인 사고도 가능했다. 하지만 움직일 순 없었다.
저벅저벅.
시간이 멈춘 세상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오직 여신 크로노아.
[제 본래 모습을 누군가에게 보이는 건 로렐라이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군요.]
다른 차원에선 여신으로 추앙받는 존재였지만 그녀의 힘을 위험도로 계산하면 과연 몇 급으로 분류될까?
여신에 대한 묘사는 탑의 기록마다 제 각각이지만 여신은 마녀와 대비되는 존재인 만큼 루이스와 같은 7급 정도가 평균적이었다.
하지만 신유성은 알고 있었다.
크로노아는 루이스처럼 차원을 넘어온 존재가 아니었기에 라플라스의 경우처럼 편린에 불과하다.
이만큼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면 분명 제약이 뒤따랐을 것이다.
‘……로렐라이를 위해 힘을 써주신 겁니까?’
신유성이 마음속으로 질문을 던지자 크로노아는 그저 미소를 지었다.
[네.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했답니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로렐라이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지도 모르겠군요.]
홀로 남는 지루함은 괜찮았다.
여신의 책무란 변하는 세상을 지켜보며 관망하고 조율하는 것. 그건 크로노아에게 너무나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무한한 존재인 자신과 달리 로렐라이는 유한한 존재다. 여신과 인간의 우정이란 종이 한 장만큼 얄팍할 수밖에 없었다.
[로렐라이와 함께 있던 시간은 참으로 재미있었습니다. 로렐라이는 여신에게 필적할 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시선은 어느 인간보다 순수하죠.]
그러나 로렐라이와 함께한 모든 순간이 크로노아에게는 최고였다.
인간이라곤 믿기 힘든 로렐라이의 지식을 통해 서로 담론을 나누며 그녀의 순수함이 깃든 견해를 전달받을 때면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뜬 기분이었다.
‘그럼 당신은 저에게 이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약간의 책망과 강한 책임감.
신유성의 감정을 느낀 크로노아는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여신은 인간이 아닙니다. 우린 무한한 시간 속에서 세상을 관망해야 하는 존재. 계약자가 아닌 벗을 만든다면 필시 잊지 못하겠죠. 그러니 이건 저를 위한 일입니다.]
이전에는 크로노아도 로렐라이가 자신의 신도가 되기를 바랐다. 계약을 통해 충성을 맹세한다면 자신의 시간을 나누어 주었을 테고 로렐라이와 더욱 긴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로렐라이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로렐라이가 저의 신도가 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분명 그건 저의 이기적인 생각이겠죠. 이런 외로움을 겪는 건 인간에겐 가혹한 일이니까요.]
크로노아는 신유성의 손을 잡아주었다. 동상으로 잃어버린 감각이 완전히 되돌아오며 손의 고통이 말끔히 나았다.
크로노아는 미래를 바꾸기 위해 현재를 멈추었다. 그러나 그 미래를 쟁취하는 건 어디까지나 인간의 손이어야 했다.
[흘러가는 시간이 이토록 원망스러웠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이걸로 계약은 끝.
크로노아가 숨을 뱉어내자 황금의 숨결은 얼어붙은 로렐라이에게 깃들었다. 그건 로렐라이가 힘을 빌리기 위해 바친 수명이었지만 지금의 크로노아에겐 의미 없는 대가였다.
[즐거웠습니다. 로렐라이.]
크로노아에게 로렐라이가 전해준 최고의 선물은 지루하기만 했던 일상을 인간의 시선으로 함께 지켜보게 해준 더할 나위 없는 유희.
[안녕. 나의 친구.]
크로노아는 로렐라이의 손에 자신의 황금빛 마나를 실어주었다.
흑백의 세상이 색을 되찾았다.
신유성은 자신을 덮치는 얼음 폭발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네 마음은 전해졌을 거야.”
폭발로 눈이 부시다. 하얀빛이 쇄도한다. 그럼에도 손을 뻗는다.
포기가 없었던 신유성의 의지는 닿았다. 로렐라이를 지키기 위해 여신은 그 의지에 힘을 실어주었다. 남은 건 이 손에 움켜쥔 힘을 뻗고.
화아악-!
미래를 쟁취하는 일.
콰앙!
백색 폭발과 황금의 물결이 서로 뒤엉킨다. 파장에 파장이 맞물렸고 삼켰고 부서졌다. 의지가 기적을 만들었다.
“너, 무슨 짓을-!”
루이스의 푸른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폭발의 순간에 마나의 성질을 해석했다고? 게다가 같은 파장을 방출해 폭발을 지워 버렸다고? 그런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길고 긴 마녀의 인생에서도 이건 처음 보는 기적.
사아아-
그러나 기적에는 그에 걸맞은 대가가 있는 법이다. 여신 크로노아의 몸은 황금빛 잔재가 되어 천천히 바람과 함께 흩날렸다.
“크로노아-!”
로렐라이가 손을 뻗으며 소리쳤지만 돌이킬 순 없었다. 크로노아는 그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너의 희생은 절대 헛되게 하지 않을게.”
기회는 주어졌다.
신유성이 마나의 파장을 해석했다는 건, 마나의 성질을 파악했다는 것이고 그건 상대가 어떤 무기를 사용하는지 알아낸 것과도 같았다.
반면 루이스는 크로노아가 신유성에게 전해준 힘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이 황금의 물결은 크로노아의 외로움이었다. 오래도록 세상을 홀로이 관망하며 축적해온 그녀의 짙은 마나였다.
‘느껴진다.’
크로노아가 건네준 힘은 로렐라이의 조각인 ‘강화’의 힘. 이 능력을 발화시키려면 로렐라이라는 불씨가 필요했다.
“로렐라이…….”
하지만 크로노아라는 파트너를 잃어버린 로렐라이가 곧바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바로 전투에 임할 수 있을까?
신유성은 로렐라이를 보았다.
로렐라이는 표정을 읽기 힘든 얼굴로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더니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마지막 인사조차 전하지 못했네요. 하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겠죠.”
만남과 이별은 필연적인 것.
“만남도 이별도 운명도 모두 이야기의 한 점. 저는 그녀의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로렐라이는 이별의 슬픔에 잠길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그녀는 영국의 자랑이자 시계탑의 오라클이었다.
“그러니…… 이야기의 뒷부분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를 대신해 부디 멋진 결말을.”
로렐라이는 갑작스러운 이별 속에서도 웃어보였다. 짧고도 오랜 친구에게 눈물의 인사가 아닌 고마움을 전하며 신유성에게 미래를 전했다.
“Αἰσχύλ.”
크로노아가 알려준 영창.
“Σοφοκλ.”
이건 그녀의 지식이자.
“Εὐριπίδ.”
의지.
“그녀가 떠나갔음에도 크로노아의 힘은 아직 제게 남아 있습니다. 이건 그녀의 조각이 세계에 머물러갔다는 증거.”
로렐라이가 손을 뻗자 여신의 가호가 신유성을 감쌌다. 일순간이지만 신유성이 가지게 된 건 크로노아의 시각.
신유성의 몸에서 꽃의 향기처럼 마나가 피어올랐다.
탁 트인 시야에 청량감마저 느껴졌고 몸에서 분리된 마나의 흐름이 한눈에 보였다.
투신류 황룡강신(黃龍强身)
바뀐 마나의 성질로 신유성의 눈이 금빛으로 물들었다. 흑(黑)색의 강기 거칠게 휘날리는 대신 금빛 강기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춤을 췄다.
“……음, 이제야 알겠구나. 여신이라는 자가 규율을 어기고, 인간을 위해 가호를 전해두었다라……. 마녀보다도 변덕이 심한 자로군.”
루이스는 이제야 상대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건지 아공간을 펼쳐 그녀의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이쪽에서도 최선을 다해주는 게 예의겠지.”
지팡이를 잡은 루이스는 얼음 바닥을 통- 하고 가볍게 두드렸다.
그것이 전조였다. 자연물에 불과했던 얼음 동굴에는 붉고 푸른 줄이 그어지며 거대한 마공학 기계처럼 가동을 시작했다.
“네가 여신의 힘을 빌려 쓴다면 나에게도 안배가 있다. 이 루인성 지하에는 볼테라의 인간들에게서 빼앗은 마나와 부정의 감정이 잠들어있지.”
루이스는 자신의 지팡이를 빨대 삼아 지하에 잠든 ‘부정의 힘’을 흡수했다.
인간의 고통과 괴로움 그 속에서 피어난 악의는 인류를 증오하는 겨울의 마녀에게 진정한 원료이자 힘이었다.
“이제 그만 잠들거라. 잎을 떨어트리고 꽃을 지게 만드는 건 생명에 대한 겨울의 자비니라.”
마녀가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빛을 머금었던 머리카락은 완벽한 은발이 되었고 루이스의 푸른 눈이 하얗게 물들었다. 그 모습은 마치 냉혹한 겨울과 같았다.
그럼에도 아델라와 같은 얼굴을 한 루이스는 언젠가 신유성이 들어보았던 기술을 읊조렸다.
“Aria(아리아).”
바람이 강해지고 잘게 부서진 얼음들은 믹서기의 칼날처럼 휘말리는 언데드들을 잘게 조각냈다.
“Aria(아리아).”
눈의 오페라에 클라이맥스.
가장 열띤 순간을 위해 찾아온 익숙한 적막과 고요.
쩌저저적-!
비틀어진 아공간이 신유성을 삼켰다. 루이스는 상대를 가두고 극도로 마나를 압축시킨 공간 안에 날카로운 얼음칼날을 생성했다.
“……나의 얼음 칼날은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하고 날카롭다. 인간의 몸으론 버틸 수 없겠지.”
루이스는 무감한 얼굴로 검지를 홍차를 젓듯 휘휘 돌렸다.
“아쉽게 되었구나. 너는 꽤 마음에 드는 인간이었다. 인형으로라도 삼고 싶었건만.”
신유성이 갇힌 아공간에선 차가운 얼음 칼날이 믹서기처럼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10초면 수정 골렘조차 갈가리 찢어버리는 공격에서 인간이 살아남는 게 가능할리 없었다.
그러나 아공간이 열리고 신유성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루이스는 진정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건, 대체…….”
흑색 도복을 입은 채 길게 머리를 늘어뜨린 신유성의 몸은 작은 생채기조차 없이 말끔했다.
아덴조차 버거워한 루이스의 공격을 아무런 피해 없이 막아낸 것이다.
“놀랄 필요 없어.”
그러나 신유성은 이 모든 일이 당연하다고 느꼈다.
“크로노아와 로렐라이는 이 순간을 위해 이별했고, 미래를 위해 나에게 의지를 전했어. ……그럼에도 넌 무엇 하나 희생하지 않았잖아?”
크로노아와 로렐라이가 보여준 숭고한 희생과 달리 루이스의 힘은 약자에게 갈취한 전유물에 불과하니까. 자신보다 약한 인간들을 괴롭히고 착취해낸 힘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래. 약자를 괴롭히며 힘을 쌓은 너보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끝까지 용기를 낸 아델라가 훨씬 강해.”
통-
신유성이 가볍게 발을 뗐다.
눈앞에 루이스의 얼굴이 보였다.
지금까지 내본 적 없는 한계를 벗어난 속도에 몸이 전율하는 게 느껴졌다. 모두의 용기와 희생은 이 순간을 위해서였겠지.
“이제…… 그만…….”
신유성이 손을 뻗었다.
고고했던 겨울의 마녀는 처음으로 절망에 찬 표정을 보였다.
“너어엇-!”
뒤늦게 투명한 방벽을 겹겹이 쌓았지만 황금색 물결을 두른 신유성의 손에 닿는 족족 부서졌다.
언젠가 느낀 적 있는 공포에 루이스는 신유성과 아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신유성은 마치 그 순간의 아덴처럼 멱살을 쥔 루이스를 노려보며.
[볼테라를]
“아델라를.”
[돌려줘.]
“돌려줘.”
여신의 축복을 감싼 손으로 루이스의 심장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