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4화
“아, 아, 하아…….”
투명한 얼음 왕국, 차디찬 왕좌 위에서 겨울의 여왕은 벅찬 감정을 토해냈다.
“이제야 정말로 느껴지는 구나 이 감각, 이 감정, 아……. 너무나도 그리웠도다.”
루이스는 어딘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나무나 후련한 표정을 지었다.
“후흣…… 그래. 나는 인간의 이 불완전함이 너무나도 그리웠어.”
루이스는 벅찬 감정을 진정시키려 가슴에 손을 얹은 채 신유성을 내려다보았다.
“신유성이라고 하였지? 나의 그릇은…… 네게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한 모양이구나.”
아직 완전하게 정신을 잠식하지 못한 탓에 루이스는 아델라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루이스는 그 감정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감정이 너무나 달콤해서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흘릴 정도였다.
“잊을 수 없는 증오, 지루한 인내, 너무나 긴 고통……. 인간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얼마나 긴 시간을 보냈던지.”
인간을 초월한 경험이 마녀를 탄생시킨다. 그렇다면 ‘증오’라는 감정으로 평범한 소녀가 냉혹한 겨울의 마녀가 되기 위해선 어떤 경험이 필요할까?
루이스는 증오로 초월했다.
인간의 악의를 짊어진 채 마녀가 되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마음으로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증오로 녹아버린 심장이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이 기쁨은 그릇의 몸을 빌리지 못했다면 두 번 다시 느끼지 못했겠지. 다시 한 번 감사하마.”
루이스는 가볍게 고개를 낮춰 정중하게 인사했다. 루이스는 아델라의 몸을 통해 새롭게 태어났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너무나 익숙한 아델라의 모습으로 믿기 힘든 말을 뱉어대는 루이스의 모습은 신유성에게 새로운 종류의 절망이었다.
“아델라의 몸을…… 빼앗았다고?”
그 신유성조차 냉정을 잃고 동요의 기색을 보이자 루이스는 손바닥으로 입을 가린 채 슬며시 웃어보였다.
“그래. 타협인 셈이지. 나는 누구보다 인류를 증오하지만 인정하고 있다. 그 어떤 마녀조차 인류의 결속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그렇기에 루이스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그녀는 인류를 향한 무차별적인 증오를 가지고 있었지만 대의를 위해선 참을 수 있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인간의 감정을 느끼는 건 그녀에게 새로운 유희였다. 어찌 보면 루이스는 아델라의 몸을 빼앗음으로 계획했던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사라져줘야겠다. 도전자들은 마녀 루이스를 처치했지만… 그 과정에서 그릇을 제외한 모든 이가 죽음을 맞이했다. 후후훗, 이 정도 이야기라면 괜찮지 않겠느냐?”
루이스는 아델라를 통해 현대의 지식을 흡수 했으니 협회를 포함한 세간에 이야기를 퍼트리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루이스가 아델라의 입으로 자신을 죽이겠다는 섬뜩한 말을 내뱉자 신유성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델라였지?”
이제 막 5살이 된 아이.
세상의 축복을 받으며 한껏 행복을 누리며 보냈어야 할 시기를 루이스는 절망과 외로움으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죄도 없던 아이가 고통 받는 상황을 본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분노를 느끼거나, 측은한 마음이 들것이다.
하지만 루이스는 그런 상식을 비웃듯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즉답했다.
“이 몸이 그릇으로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주먹을 쥔 신유성의 눈빛에 경멸의 기색이 어리자 루이스는 다시 왕좌에 앉으며 왜인지 모를 아쉬움을 내비쳤다.
“나와 닮았다고 생각했건만 너 같은 인간을 곁에 두었다니. 나의 그릇은 참으로 운이 좋군.”
루이스는 마치 배신이라도 당한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이라는 놈은…….’
신유성을 포함한 파티원과 벨벳의 존재는 루이스가 아델라의 기억을 읽기 거북하게 만들었다.
루이스는 그 추억과 장면들에 깃든 감정을 느낄수록 정신을 잠식하고 있던 지배의 결속이 옅어지는 게 느껴졌다.
‘참으로 불공평하지.’
똑같은 절망이 찾아왔음에도 왜 아델라의 기억 속에 이토록 행복한 추억이 많은 걸까?
반면에 왜 자신에겐 그 어떤 구원도 내려주지 않았을까?
루이스에게 운명이란 언제나 원망의 대상이었다. 루이스가 인류를 증오하게 만들고 초월하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누구보다 구원을 바란 루이스에게 그 어떤 손도 뻗어주지 않았던 매몰찬 존재였다.
하지만 그건 모두 과거의 이야기.
루이스는 더 이상 구원을 바라지 않았다. 인간을 초월한 증오 끝에 그녀는 ‘겨울의 마녀’로서 새로이 선택받았다.
인류를 멸망시키고 차가운 증오를 흩뿌리기 위해 다시 태어났다.
반면 아델라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루이스와 달리 너무나 행복한 현재를 즐기고 있었다.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인가?
루이스는 아델라의 행복을 지켜볼 수 없었다.
“……그래도 참으로 다행이구나. 조금만 더 시간을 주었다면 파고들 틈이 없을 뻔했어.”
아델라의 삶이 평온한 일상을 되찾고 제자리를 찾아갈수록 자신이 벌려둔 틈은 좁아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루이스의 계획 중 최고의 변수인 신유성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네 계획이 무엇이든 나는 아델라를 돌려받겠어.”
턱!
- 신…… 유성…….
루이스는 신유성이 이름을 부른 것만으로 인식의 저편에 잠들어있던 아델라가 슬며시 눈을 뜨는 게 느껴졌다.
‘……이 정도로 정신이 잠식됐음에도 반응하다니.’
이런 거대한 기폭제가 된다는 건 신유성의 존재가 중요한 기억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증거.
‘역시 이 녀석은 위험해. 당장 죽여야겠어.’
반대로 말하자면 신유성만 얼어붙게 만든다면 아델라의 기억 중 대부분은 루이스에게 잠식된다는 뜻이었다.
* * *
오리가 처음 본 상대를 자신의 부모로 인식하는 것처럼 드래곤도 비슷한 각인을 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시각에 의존하거나 후각에 의존하는 다른 동물들과 달리 드래곤은 자신의 부모를 마나로 각인을 한다.
덕분에 부모와 아무리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도 희미하게 마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캬, 캬항-!”
그 때문일까.
동화책을 읽던 벨벳은 처음 벌어진 상황에 벨벳은 충격 받은 얼굴로 돌처럼 굳고 말았다.
“에? 작은 주인님이 그렇게 놀라시고 무슨 일이십니까?”
덕분에 옆에서 [범고래의 생애]라는 그림책을 읽던 오르카는 의아한 듯 꼬리를 갸웃거렸다.
“크, 큰일나써-! 아델라 엄마의 마나가 안 느껴져!”
“으음, 그건…… 마님께서 너무 멀리 공략을 가셔서 그런 거 아니십니까?”
그러나 드래곤의 감각을 이해할 수 있는 건 오직 드래곤뿐. 오르카는 일의 심각성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캬, 캬으…… 아니야! 벨벳이랑 멀어지는 건 찌이이! 하는 느낌이야! 이건 뚝! 이야!”
결국 벨벳이 양손을 바삐 움직이며 필사적으로 설명을 하자 오르카는 머리를 끄덕였다.
“오, 뭔가 알 법도 하네요. 근데 갑자기 찾아간다고 하시면 마님들이 말리지 않으시겠습니까?”
오르카의 말처럼 걱정이 많은 스미레는 당연히 벨벳을 만류할 테고 김은아는 도움이 안 될 거라며 벨벳을 붙잡을 게 분명했다.
“캬으음…….”
벨벳은 고민했다.
평소처럼 스미레의 말을 잘 들으면 오늘 밤에도 칭찬 스티커를 하나 더 받을 수 있었지만 그건 아델라와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캬하앙…… 아무리 생각해도아델라 엄마를 구할 수 있는 건 벨벳뿐이야!”
“그럼 역시 몰래 가는 수밖에 없겠군요!”
끄덕!
합이 맞은 벨벳과 오르카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오르카가 문을 열자 벨벳은 조심스럽게 방을 빠져나와 소파에 앉은 김은아를 염탐했다.
그러나 빼꼼 고개를 내밀었어도 커다란 오르카의 덩치와 벨벳의 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결국 소파에 앉은 김은아가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흘기자 벨벳은 지레 겁을 먹어 고개를 저었다.
“캬, 캬항……. 베, 벨벳은 지금부터 얌전히 방에 있을 거라고 말하려고 와써!”
그러나 그런 벨벳의 행동은 괜히 김은아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둘 다 뭔가 꾸미고 있는 얼굴인데.”
결국 리모컨을 쥔 김은아가 눈을 가늘게 뜨자 후다닥- 도망간 벨벳은 이번엔 주방에 있는 스미레를 염탐했다.
“아델라 엄마한테 가려면 지금이야! 은아 엄마는 티비를 보고! 스미레 엄마는 주방에 이써…….”
속닥속닥.
벨벳이 조심스레 귓속말을 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오르카는 뭔가 걸리는 표정으로 고개와 꼬리를 갸웃거렸다.
“맞습니다! 아, 그런데 작은 주인님…… 아델라 마님이 어디 있는지는 알고 계십니까?”
무려 아델라와 신유성이 있는 곳은 이탈리아의 볼테라. 위치를 알더라도 자동차를 타든 배를 타든 비행기를 타든 어린 아이와 인형에 불과한 오르카가 감히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평범한 어린 아이에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모험의 당사자인 벨벳은 어린 아이가 아닌 어린 드래곤.
“응! 아빠한테 바로 갈 수 있게 준비해써!”
벨벳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검지로 허공을 긁자 무려 공간 이동 포탈이 생성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