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3화
신유성의 손에서 아름다운 황금의 물결이 일렁이자 부서졌던 뼈가 다시 붙고, 찢어진 피부가 빠르게 이전의 형태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 계약자가 아닌 인간에게 제 힘을 빌려주게 되다니…… 모두 로렐라이를 위해서입니다.
지금 신유성의 귓가에 들려오는 여자의 소리는 로렐라이와 계약한 시간의 여신 크로노아의 목소리.
‘상처는 물론이고 잃어버렸던 체력까지 회복시켜주고 있어.’
시간의 여신 크로노아가 신유성을 돕고 있는 이상 전투가 장기전으로 흐른다면 시간은 신유성의 편이었다.
‘로렐라이의 도움을 받더라도…… 원래 스승님은 절대 이길 수 없는 상대지만…….’
이번 경우는 제법 희망이 있었다. 아무리 유원학과 비슷해 보여도 분신체의 한계는 신유성이 기억하고 있는 스승을 구현해낸다는 점.
신유성은 자신이 스승의 전력을 본 적 없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거기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유원학이 사용하는 공격은 모두 신유성이 본 적 있는 기술이었다.
쿠웅!
유원학이 땅을 박찼다. 힘을 이기지 못한 흙이 뒤로 튀었고 발의 형태로 땅이 움푹 파였다. 유원학이 흙에서 발을 뗌과 함께 펑-! 하고 들려오는 굉음.
순식간에 자신의 눈앞에서 나타나 회전력을 담아 주먹을 뻗는 유원학을 보며 신유성은 생각했다.
‘분명 본 적 있는 동작이다.’
주먹을 내지른다는 점에서 다른 권격과 비슷한 동작처럼 보이지만 신유성은 흔들리지 않았다.
설령 분신체라 하여도 자신의 스승. 지금 유원학은 자세와 숨결까지 모든 게 그날과 같았다.
[한평생을 수련에 바친 무술인도 쉽지 않은 일이건만. 유성아 너의 주먹에는 이미 아무런 상념이 없구나.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지금 신유성의 눈에는 오래전 자신을 가르쳐주시던 스승의 모습과 분신체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잘 보아라!]
쐐액!
빠르게 쇄도하는 유원학의 주먹에는 이전의 가르침처럼 어떤 고민도 상념도 담겨있지 않았다.
[감히 번뇌와 고민을 주먹에 담는다면 상대는 맞지 않는다. 망설임이 담긴 검으로는 무엇도 베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신유성은 스승의 가르침처럼 머릿속의 모든 상념을 지웠다. 오롯이 흐름에 몸을 맡기고 쇄도하는 주먹에 맞섰다.
‘보인다.’
붉은 실을 연결한 듯 곧게 뻗은 하나의 직선은 마치 날카로운 창 같았다.
[폭풍에 끝까지 버티는 건 나무들이 아니다. 오히려 단단하게 뻗은 뿌리를 자랑하며 버티면 버틸수록 먼저 쓰러지고 말지.]
신유성은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버텨내기 위해 정면으로 방패를 세운다면 방패는 부서지고 파괴되겠지만 힘의 축을 뒤틀어 비스듬히 흘려낸다면 이야기는 달랐다.
[매서운 폭풍에도 끝까지 버티는 건 바람에 몸을 맡기는 갈대 같은 놈들이야.]
신유성의 손이 유원학의 주먹과 맞닿았다. 직선으로 향하는 묵직한 힘은 조금만 실수하더라도 신유성의 팔을 분질러 버릴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신유성은 그 힘을 손바닥으로 감싸 그저 흘려보냈다.
하늘 같은 스승의 공격이지만 신유성은 이전에 보았던 스승의 모습과 가르침이 있었기에 흘려보낼 수 있었다.
쿠웅!
갈 곳 잃은 묵직한 힘이 땅으로 흐르자 신유성은 심호흡을 했다. 눈앞에서 자신과 싸우고 있는 건 신유성의 내면이 두려움으로 빚어진 존재다. 유원학을 상대로는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공포에서 빚어진 존재였다.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어. 내가 상대하는 건 스승님이 아닌 루이스의 술식이다.’
전투로는 한없이 강한 상대였지만 결국 그 본질은 일개 술식에 불과했다.
- 드디어 깨달았군요.
진실에 도달한 덕분일까, 신유성은 크로노아의 안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당신의 선택을 믿으세요. 로렐라이와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화악!
시간이 멈춘 듯 느릿해진 세상에서 황금의 풍경이 번져간다. 황금은 빛을 잃은 무채색을 몰아내며 주변을 잠식했다.
데엥-!
거대한 괘종시계의 소리.
째깍! 째깍! 째깍!
셀 수 없이 수많은 초침 소리.
“이게 마지막 남은 제 힘……. 그럼 부디…….”
로렐라이는 지금의 현상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운 듯 애처롭게 무언가를 움켜쥐고, 다른 한쪽 팔은 힘없이 늘어뜨린 채였다.
사아아-
신유성은 눈에 마나를 부여했다.
지금 신유성이 보는 세계는 자연물의 푸른빛과 루이스의 술식이 뿜어내는 붉은빛. 그리고 로렐라이의 황금빛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 신유성이 하는 일은 그 붉은 실타래를 현실에서 분리해내는 일이었으며 술식을 끊어내는 일이었다.
‘마나 공명으로 술식을 해제하려면 같은 파장과 동일한 마나를 필요로 한다.’
신유성은 느릿해진 세상에서 유원학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건 마치 정밀한 수술과 같았다.
‘내 마음대로 술식을 재구성하기 위해 마나를 베어내고…… 동시에 불어넣는다.’
신유성은 로렐라이가 벌어준 길고도 짧은 시간 동안 하나의 손짓도 낭비해선 안 됐다.
원래 성질이 다른 두 마나는 물과 기름처럼 분리되어야 했다. 하지만 느릿해진 시간 속에서 신유성의 푸른 마나가 유원학의 몸을 감싼 붉은 마나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이건 신유성이 루이스의 술식과 같은 파장으로 마나를 흘려보냈다는 명확한 증거.
신유성은 유원학의 모든 걸 배운 제자였지만 마나공명을 이용한 지금의 기술은 스승인 유원학조차 모르는 방법이었다.
이건 헌터들의 상식을 부수는 일이었다. 특성인 집중력 강화로 초감각을 각성한 오직 신유성만이 가득한 방법이었다.
서억!
뒤엉킨 실타래 속에서 신유성은 붉은 선을 갈랐다. 자신의 손이 분신체의 두꺼운 근육을 파고드는 게 느껴졌다.
“모두 당신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스승님.”
신유성의 감사를 끝으로 느릿해진 시간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승부를 결정지은 마지막 찰나.
“……제법 성장했구나.”
분명 분신체에 불과한 유원학은 신유성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은 정말 자신의 스승과 같아서 신유성은 미소를 지었다.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술식은 깨졌다.
유원학의 몸에서 마치 피처럼 붉은 마나가 새어나갔다. 증발하듯 승천하던 마나는 어느새 붉은 카네이션의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이제 숲속에 남은 건 오직 로렐라이와 신유성 뿐.
그으으윽-!
술식이 깨진 탓일까, 굉음을 내며 숲의 대지가 갈라졌다.
“……정말, 정말로 해내셨군요.”
방금 전 배리어와 시간 정지로 모든 마나를 쏟아냈기 때문일까, 로렐라이는 몸을 가누기도 벅찬 듯 힘없이 빙긋 웃었다.
“로렐라이 너와 크로노아의 도움. 그리고 스승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거야.”
신유성은 그런 로렐라이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건 겸손이 아닌 사실이었다.
아무리 분신체라 하여도 로렐라이의 도움이 없었다면 엄청난 속도를 자랑하는 유원학을 상대로 마나 공명을 성공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위잉!
둘의 앞에 포탈이 생성됐다.
무너지는 숲을 뒤로한 채 신유성과 로렐라이는 천천히 출구로 걸어 나갔다.
* * *
로렐라이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포탈을 통과하고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루인성의 초입.
깡총!
안내자로 보이는 하얀 토끼는 신유성과 로렐라이를 향해 너무나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루인성에 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시험을 통과해 술식을 파괴한 건…… 오직 별의 길뿐이군요.”
별의 길에 도전한 6급 헌터 쇼이치와 엘리자, 태양의 길을 택한 아델라와 안젤라. 그 모두가 실패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에 로렐라이는 주변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입구의 초입부터 널브러진 얼음 동상들 사이에서 동료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하, 설마 동료분이라도 찾으시는 겁니까?”
안내자는 그런 로렐라이의 모습이 우스운 듯 킥킥 웃더니 레드카펫이 깔린 얼음복도를 가리켰다.
“걱정 마십시오. 동료분들이 얼어붙어 버린 건 사실이지만 루이스 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용감한 도전자를 이런 장소에 두진 않으시죠.”
로렐라이와 신유성에게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며 안내자는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얼른 오세요. 루이스 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신유성과 로렐라이는 혹여 트랩이 있을까, 긴장을 늦추지 않고 토끼의 뒤를 따라갔지만 복도에는 어떤 함정도 없었다.
“참고로 두 분께선 은발의 괴물 이후 첫 통과자시랍니다.”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루이스의 시험을 통과했다는 건 6급 헌터 이상의 실력을 증명했다는 것. 그건 허접한 트랩에 당할 실력이 아니었다.
“두 분 같은 실력 있는 도전자를 상대 할 수 있는 건…… 이 루인성에서 오직 루이스 님뿐이시겠죠.”
끼이익-
루인성의 깊은 곳에 도달한 안내자는 드디어 얼음으로 된 문을 열었다. 신유성의 눈에는 한 줄로 늘어진 얼음 병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입구부터 이어진 기다란 레드 카펫의 끝에 서 있는 건 하나의 거대한 왕좌.
터억-
그러나 왕좌에 앉아 있는 건 루이스가 아니었다.
“안녕?”
턱을 괸 채, 너무나 즐거운 듯 미소를 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아델라의 모습.
“……아델라?”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되묻는 신유성의 모습에 아델라는 얼음으로 만든 손거울로 자신의 몸을 꼼꼼히 살폈다.
얼굴은 물론이고 손등에서 팔. 발에서 다리에 이르기까지 무엇하나 빠트리지 않고 만족한 표정으로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인간 주제에 이 정도로…… 냉기에 적격한 힘을 가지고 있다니. 정말 마음에 들어……. 역시 눈여겨볼 가치가 있었어.”
분명 신유성의 눈앞에 있는 건 아델라의 몸이지만 그 안에 깃든 건 신유성이 알고 있던 아델라가 아니었다.
지금 아델라의 몸에 깃든 건, 겨울의 마녀 루이스. 그녀는 절망에 빠진 도전자를 바라보며.
“……고마워, 겁 없이 나에게 도전한 너희 덕분에 나는 새롭게 태어났다.”
빙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