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인간들은 슬프다, 당혹스럽다, 기쁘다, 절망했다, 등으로 자신의 기분을 단어로 설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스노우는 인간의 감정이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스노우의 눈앞에 있는 아델라의 감정만 보더라도 마치 여러 가지 감정을 믹서기로 갈아버린 듯 거칠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어릴 적 헤어졌던 부모님이 자신을 봐주고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 약간의 기쁨. 그리고 그런 긍정적 감정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거대한 절망이 도사리고 있었다.
자신의 명령으로 부모님을 부숴야 할까? 정말 그런 짓을 할 수 있을까? 스노우의 말이 거짓은 아닐까? 아델라는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아델라 님…….”
스노우는 그런 아델라를 보며 느긋하게 입을 뗐다.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아델라를 보며 스노우는 악마의 진면모를 보여주었다.
“루이스 님께서 볼테라를 택한 게 우연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만 떠들어! 상대방에게 영향을 줄 정도로 그렇게 떠드는 건 규칙을 어기는 짓 아니야?”
지팡이를 든 안젤라가 거칠게 소리쳤지만 스노우는 고개를 저었다.
“규칙을 어기다니요. 저는 그냥 아델라 님에게 진실을 말씀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진실?”
아델라가 멍한 눈으로 입을 뗐다. 얼핏 보면 무표정한 듯 보이지만 평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네. 진실 말입니다. 루이스 님이 볼테라를 택하신 건 우연이 아니니까요. 그곳에…… 아델라 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한 스노우는 안타까운 듯 고개를 숙였다. 스노우는 이것도 게임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체스는 체스 말로 상대에게 이기는 게임이었지만 스노우의 진정한 특기는 말로 상대의 마음을 죽이는 능력이었다.
“루이스 님은 아델라 님의 능력을 눈 여겨보셨답니다. 아델라 님이 볼테라에 계시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벌어질 이유도 없었겠죠.”
야금야금.
자신의 말로 균열을 만들며 스노우는 아델라의 마음을 파고 들어갔다. 이미 얼음 동상이 된 부모님의 출현으로 빈틈투성이인 아델라를 요리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말로 상대를 부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큰 한 방이다. 모래성의 균열 사이로 커다란 양동이의 물을 부어버리는 일이다.
“아무리 두 분께서 아델라 님을 사랑했어도 그런 끔찍한 일을 당했으니 이제는…… 아델라 님을 원망하고 있지 않을까요?”
그럼 그 균열은 거대해지고 감정은 흘러넘친다. 인간이란 연약하다. 그 정도로 엄청난 정신의 통증은 인간이 버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신 같은 불행의 씨앗은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고. 말이죠.”
움찔.
아델라는 몸을 떨었다. 아델라는 반대 손으로 한쪽 어깨를 감싸 안으며 마치 무너지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C3의 나이트를…… D5로 이동.”
“아, 비숍을 잡지 않으시는 겁니까? 분명 유리하신 고지를 점령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 저는 퀸으로 D5의 나이트를 잡겠습니다.”
지금까지 아델라의 전법은 과감하게 체스 말을 버리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왔다. 상대의 체스 말을 부수지 않고 안일하게 도망치는 방식으로 스노우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H2의 폰을 H3으로 이동…….”
“E7에 있는 비숍을 H3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델라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느꼈다. 스노우는 이미 체스를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아델라가 비숍을 공격할 수 없다는 가정 아래 게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델라의 호흡이 흐트러졌다.
집중은 이미 예전에 깨져버렸고 날카로웠던 공격들은 이제 무의미한 움직임으로 변해버렸다.
“그럼 전…….”
정신력이 깨진 탓일까. 아델라는 결국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F2에 있는 폰을 F3으로…… 한 칸 전진.”
터벅터벅-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거대한 체스판에 서 있던 얼음병사가 앞으로 전진했다.
깍지를 낀 스노우는 그런 아델라의 모습을 음미하듯 가만히 지켜보았다.
“……이게 당신이 도망친 대가입니다. 아델라 님께선 그릇된 판단으로 본인은 물론 자신의 동료까지 위험에 빠트린 겁니다.”
한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던 이 체스의 마침표를 찍었다.
“E5에 있는 나이트를 D3으로 이동. 킹이 위험하다는 사실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아시겠죠?”
스노우의 말처럼 나이트의 공격을 피해야 했지만 지금 아델라의 양쪽은 가로막혀 있었다.
그렇다고 바로 앞칸으로 나아가면 아델라는 이미 자리를 잡아둔 비숍의 먹이가 된다.
지금 남은 건 퀸인 안젤라를 통해 나이트를 잡는다는 선택지뿐.
하지만 그럼 나이트라는 벽이 사라지며 안젤라는 상대 쪽 퀸의 먹이가 된다.
즉, 지금 상황을 피하기 위해선 안젤라와 아델라 중 하나의 체스 말을 포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안젤라는 손을 불끈 쥐어 보였다.
마치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결단을 내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도 아시겠죠. 체스는 끝까지 킹을 지키는 게임입니다.”
아델라는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희생을 치르며 나아갔다. 안젤라는 너무나 담담한 표정으로 자세를 낮췄다.
“아무리 중요한 체스 말인 퀸이라 하여도 킹이 위험하다면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건 이미…….”
그래, 이건 이미 끝난 게임이었다. 모든 수를 읽히고 퀸까지 잃은 아델라가 체스에서 승리할 길은 이미 없었다. 스노우는 아직도 상황파악을 하지 못했냐며 그런 안젤라를 보며 경멸했다.
“머리가 나쁘시군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 겁니까? 이미 이건 끝난 게임이라는 사실을!”
안젤라는 턱 끝으로 스노우가 쓰고 있는 왕관을 가리켰다. 태양의 길이라는 이름처럼 아름답게 새겨진 태양의 문양은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저희가 체스라는 게임에 임했던 건 그쪽이 더 승산이 높은 게임이었기 때문입니다. 게임을 끝낼 방법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죠. 그리고 그 길은…….”
아델라에게 미소를 지은 안젤라는 스노우를 바라보며 자세를 낮췄다. 레슬러에게 태클은 언제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승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찰나의 시간으로 결정됐다. 하지만 지금까지 인생을 통틀어 이보다 긴장되는 태클이 있었을까?
“제 희생으로 만들겠습니다.”
탕-!
땅을 박찬 안젤라가 엄청난 속도로 스노우를 향해 달려 나갔다. 병사들이 무기인 검과 창을 겨누며 방해하려 했지만 안젤라는 마나를 철갑처럼 두르며 계속 전진했다.
콰악-!
그중 무기 하나가 배리어를 뚫고 안젤라의 팔에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안젤라는 더욱 속도를 올렸다. 양팔을 가드처럼 내세우며 멈추지 않고 전진했다.
“당신들! 게임의 규칙을-! 잊은 겁니까!”
“규칙을 어긴 건 네 쪽이야!”
안젤라는 자신은 역시 이쪽이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공포에 질린 스노우의 얼굴을 보니 상처의 통증이 씻은 듯 사라졌다.
“원망이니, 뭐니, 타인의 상처를 잘도 건드리는 녀석들은…… 똑같이 갚아주는 게 상책이지!”
안젤라는 스노우의 코앞까지 돌진했다. 옷은 찢겨 나갔고 피로 물든 수녀복이 뒤로 흩날렸다.
“바보 같은 짓을! 당신들은 거신상에게 심판 받을 겁니다-!”
펄럭!
스노우는 안젤라에게 도망치려 하얀 날개를 퍼덕이더니 하늘위로 날아오르려 했다.
툭!
그러나 스노우의 다리는 이미 바닥에 얼어붙어 있었다.
“대, 대체 언제…….”
안젤라는 절망에 가득 찬 스노우의 허리춤을 끌어안았다. 거신상이 쥔 거대한 얼음검이 움직였다. 규칙을 어긴 자를 벌하는 거신상의 공격은 물리력으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 이게 최선이겠지.’
“당장! 이거, 놔! 죽으려면 혼자 죽으라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거대한 검날을 스노우의 몸으로 막아내며 안젤라는 눈을 감았다.
“커억억, 거억-!”
쩌억-!
스노우에게 가해진 게 얼마나 큰 충격인지 거대한 얼음 체스판에 균열이 생겼다. 안젤라는 그 충격을 두 다리로 버텨냈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쩍, 쩌저적-!
물리력은 막아냈지만 거신상의 대검에 둘러진 냉기의 여파로 안젤라는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안젤라는 굳어가는 몸으로 아델라를 보았다.
“뒤를 부탁…….”
안젤라는 차마 그 뒤의 말을 잇지 못한 채 얼음 동상이 되어버렸다.
쩌적 쩌엉-!
그와 동시에 거신상의 냉기로 깨져버리는 스노우의 왕관.
그르륵- 쿵!
왕관에서 뿜어져 나오던 환한 빛이 멎자 거신상은 무너지고 체스 말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아델라는 얼음이 된 안젤라의 앞에서 괴로운 얼굴로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아델라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렇게나 몇 번이고 다짐했으면서, 결국 동료를 휘말리게 만들었고 차가운 얼음 속에 갇히도록 만들었다. 정말 스노우의 말처럼 안젤라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기를 바라며 아델라는 약속했다.
“……제가 당신의 몫까지, 해내겠습니다. 당신도 동료들도 모두, 제가…… 구해내겠습니다…….”
아델라는 안젤라의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루이스가 가진 마나의 특이점을 생각한다면 안젤라가 마나와 생기를 잃기 전에 공략을 끝내 안젤라를 원래 몸으로 돌려보낼 수 있었다.
“맹세하겠습니다. 꼭…….”
고개를 숙인 아델라가 계속해서 다짐하는 그 순간.
저벅- 저벅-
어두운 얼음 동굴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도 들려왔다.
“아델라…….”
10년을 넘게 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아델라는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얼음 동상이 되었던 부모님들은 아델라를 떠나기 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 아델라……. 많이 늦었지? 참, 긴 시간 동안 혼자 애써 주었구나…….”
자신을 보며 웃는 아버지.
“아델라. 널, 꽉 한 번…… 끌어안아 보아도 되겠니?”
눈물을 흘리며 양팔을 펼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아델라는 굳어버렸다.
“……돌아, 오신 겁니까?”
아델라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서서히 부모님을 향해 걸었다. 그토록 원하던 부모님의 따뜻한 품이 바로 손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래. 아델라…… 줄곧 지켜보았단다.”
너무나 그리웠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그 품에 안긴 순간 아델라는 깨달았다.
이건 부모님이 아니라는 걸.
이건 인간이라기에는 너무나 차갑고, 너무나 시리고, 너무나 냉혹했다.
“……아?”
아델라는 단말마와 함께 고개를 들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건 너무나 붉은 눈에 너무나 창백한 피부를 지닌 마녀였다.
“참, 어리석게도…….”
루이스의 말과 함께 아델라는 추위에 휩싸였다. 정신이 아득해지고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