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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아카데미의 최강투신-349화 (348/434)

제349화

동굴 안으로 들어온 아델라와 안젤라의 눈앞에는 장관이 펼쳐졌다.

네모난 판.

서로를 마주 본 2개의 진영.

8명의 얼음 병사와 그 뒤에 서 있는 6명의 모험가를 본 순간 안젤라는 익숙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건…… 체스판?”

네모난 칸의 규격에 맞춰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병사들을 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이건 얼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체스판의 모습이었다.

얼마나 오래 기다린 걸까.

체스판 중 킹의 자리에서 둘을 기다리던 하얀 올빼미는 푸드덕 소리와 함께 백발의 소년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가장 현명한 자의 길. 태양의 길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제 이름은 스노우 스톨라스. 편하게 스노우라고 불러주십시오.”

신사처럼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한 스노우는 아델라를 보며 마치 알고지낸 사이처럼 친근하게 이름을 불렀다. 아델라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스노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루이스 님이 얼마나 아델라 님을 애타게 찾으셨는지 모를 겁니다.”

너무나 의미심장한 이야기와 함께 스노우는 고개를 들었다. 결국 참지 못한 아델라는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서고 말았다.

“루이스가…… 나를?”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무서운 기세를 뿜어내는 아델라의 모습. 결국 안젤라는 흥분한 아델라를 붙잡아 말렸다.

“일단, 지금은 진정하십시오!”

안젤라는 흥분한 아델라를 진정시키려 했다. 냉정한 정신으로도 힘든 공략을 섣부르게 접근 할 수 없다는 생각이었지만 그건 다른 의미로 정답이었다.

“맞습니다. 여긴 현명한 자를 가리는 태양의 길. 전투로 제게 물리력을 가하시려 한다면 당신은 규칙을 어기시는 겁니다.”

활짝-!

스노우는 인간의 모습으로 하얀 두 날개를 펼쳤다. 그와 동시에 벽을 장식했던 얼음 거신상은 아델라와 안젤라에게 창을 겨누었다.

“명심하십시오. 태양의 길에서 규칙을 어긴 자는 심판자의 손에 죽습니다. 그건 이 공간의 룰이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법칙입니다.”

스노우는 얼음 기둥에 모셔진 왕관을 썼다. 태양이 새겨진 왕관은 스노우의 머리에 씌워지자 환한 빛을 내뿜었다.

철그덕!

스노우가 왕관을 쓰자 얼음으로 만들어진 병사들은 상대 진영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태양의 길은 현명함을 시험하는 장소. 공정성을 위해 당신들에게도 익숙한 게임을 골랐습니다. 인간들의 게임을 배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킹의 자리에 올라선 스노우가 한숨을 쉬며 푸념을 하자 안젤라는 허공에 손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공정하다고!? 난 체스 같은 건 해본 적도 없어!”

스노우는 고개를 저으며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묘한 얼굴로 웃었다.

“그건 상관없습니다. 체스에 왕이 2명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스노우는 턱 끝으로 아델라를 가리켰다. 그리곤 오래도록 지켜본 사이처럼 느긋한 목소리로 아델라의 어린 시절을 읊어놓았다.

“킹은 아델라 님이 맡아주시면 되니까요. 참 자상한 부모님이셨죠. 어린 시절에는 아델라 님과 함께 체스를 두셨답니다.”

스노우는 그리운 듯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할짝- 혀로 자신의 입술을 훑었다.

“아, 군침이 도네요. 기억도 마나도…… 참 맛있는 분이셨죠. 루이스 님께서 참으로 만족하셨답니다.”

스노우의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아델라는 흥분을 가라앉히려 숨을 몰아 쉬었지만 동공이 커진 붉은 눈은 어느 때보다 강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다.

“……하겠습니다. 체스.”

안젤라는 그런 아델라의 모습에 걱정 어린 한숨을 쉬었다.

‘저런 상태로 체스를 둘 수나 있을까.’

체스란 냉정의 게임이다. 흥분감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임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하지만 분노로 손을 떨고 있는 지금 아델라의 모습은 이성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좋습니다. 입구 바로 앞에 지팡이와 왕관이 있을 겁니다. 왕관은 게임을 지휘하는 킹. 지팡이는 가장 중요한 체스 말 중 하나인 퀸이죠. 분배가 끝나면 바로 자리에 착석해 주십시오.”

아델라는 심호흡을 하며 왕관을 머리에 썼다. 왕관에 새겨진 태양의 문양이 빛을 발하자 병사들은 상대 진영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그럼 저는 퀸이네요.”

지팡이를 든 안젤라는 왕관을 쓴 아델라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지금의 아델라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냉정을 찾기 힘들어 보였다.

“잊지 마세요. 당신도 저도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온 겁니다. 잃어버린 무언가 때문에 쥐고 있는 소중한 걸 놓진 말아요.”

그 말을 하며 퀸의 자리에선 안젤라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지금부터는 오직 아델라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쿠웅-!

발판들이 가라앉으며 게임이 시작됐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체스판은 가로칸에 A부터 H까지 알파벳이 새겨졌고 세로칸은 1부터 8까지 숫자가 새겨졌다.

“그럼 제가 선공하겠습니다.”

스노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입가에 만연한 웃음을 지은 채 명령을 내렸다.

“제 바로 앞에 있는 폰을 E4번으로 이동시키겠습니다.”

철그덕- 철그덕-

스노우의 명령에 얼음 병사는 두 칸 앞으로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델라는 고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D7번에 있는 폰을 D5번으로 두 칸 전진.”

아델라는 알고 있었다. 체스는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쟁취할지를 정하는 전략 싸움이었다.

아무런 희생 없이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욕심 많은 겁쟁이는 모든 걸 잃고 마는 게임이었다.

“하하하! 아델라 님은 보기보다 매정한 분이시군요. 퀸의 족쇄를 풀기 위해 폰을 먹이로 던져준 것입니까?”

스노우는 아델라의 폰을 희생시키는 전략에 크게 기뻐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좋습니다! 여기선 속아드려야겠군요! E4번에 있는 폰으로 D5에 있는 폰을 잡겠습니다!”

스노우의 얼음 병사는 검을 들어 대각선에 있는 적병의 몸을 내리쳤다.

쿠웅!

아델라의 얼음 병사가 산산조각이나 바닥으로 흩어지자 스노우는 크게 기뻐했다.

“재미있군요! 좋습니다! 희생없이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죠!”

그러나 스노우가 아무리 떠들어도 아델라의 집중력은 흔들리지 않았다.

“퀸으로 D5번의 폰을 공격.”

안젤라는 그런 아델라를 보며 만족한 듯 웃었다.

‘걱정은 기우였나.’

걱정을 떨치고 매섭게 질주한 안젤라는 순식간에 폰을 끌어안았다. 그리곤 가속을 이용한 수플렉스로 얼음 병사를 그대로 머리부터 땅에 처박아버렸다.

콰앙!

“B1에 있는 나이트를 C3으로 이동하겠습니다!”

“D5에 있는 퀸을 A5로 이동.”

“B1에 있는 폰을 B4로 이동시키겠습니다!”

“……A5에 있는 퀸으로 B4의 폰을 공격.”

이번에도 아델라는 점수를 따냈다. 이성을 되찾은 아델라는 냉정한 판단 속에서 오직 자신의 게임을 이어갔다.

교환과 교환.

계속해서 반복되는 전투.

하지만 체스에 대해 잘 모르는 안젤라조차 지금 자신들의 진영에 승리의 분위기가 감돌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체스 말의 적극적인 교환을 통해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는 아델라의 실력은 발군이었다.

‘이 흐름대로면 정말 이길 수도 있어.’

벌써 2개의 말을 앞서는 와중에도 만족하지 못한 아델라는 말을 이동시켰다.

“C3의 나이트를 B5로 이동.”

“아, 설마 아델라 님. 비숍을 노리시는 겁니까?”

하지만 매섭게 포위망을 좁혀온 아델라의 공격에 비숍을 잃게 된 상황에서도 스노우는 너무나 여유롭게 행동했다.

“아깝네요. 이 컬렉션은…… 루이스 님이 꽤 아끼시던 건데…….”

아델라는 스노우의 행동과 말에 어떤 관심도 주지 않았다. 상대가 자신의 냉정을 잃게 하려 한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아델라 님에게도 익숙한 얼굴일 텐데요?”

하지만 비숍이 쓰고 있던 베일을 벗은 순간 아델라는 그만 참았던 숨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 모습은…….”

베일에 가려진 얼음동상의 얼굴은 아델라에게 너무나 익숙하고도 너무나 그리운 얼굴이었다.

“네, 맞습니다. 아델라 님의 어머님이시죠. 그럼 반대편의 비숍이 누구인지도…… 이미 알고 계시겠죠?”

얼어붙은 동상을.

그것도 부모님이었던 존재를 체스 말로 사용하다니 상대를 도발하기에 이보다 더한 폐륜이 있을까?

“공정한 게임이라며 이런 더러운 짓을!”

참다못한 안젤라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치자 스노우는 의아하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게임은 공정합니다. 16개의 체스 말을 사용해 상대방의 킹을 잡는 게 규칙이죠. 저는 게임의 룰을 무엇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눈을 번뜩인 스노우는 느긋했던 이전과 달리 속사포처럼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어떤 체스 말을 사용하든 무슨 문제입니까? 지금까지 잘도 체스 말을 희생시키며 여기까지 오지 않았습니까? 변한 건 없습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체스 말이고, 버려진 체스 말은 부서질 뿐이죠.”

아델라는 너무나 그리운 얼굴을 한 얼음동상과 한참 동안 눈을 마주쳤다. 자신을 보며 웃어주던 얼굴은 무표정하고 생기가 없었으며 곰인형을 쥐어주던 두 손에는 검이 쥐어져 있었다.

‘나는…….’

결단을 내린 아델라는 입을 떼려고 했다. 너무나 괴롭지만 아델라는 잃어버린 과거 때문에 미래를 포기할 바보는 아니었다.

하지만.

“……혹시 아델라 님. 저건 부모님이 아니다. 그저 얼음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계신 겁니까?”

올빼미처럼 고개를 기우뚱- 기괴하게 움직인 스노우는 확장된 사백안(四白眼)으로 아델라를 꿰뚫어 보았다.

“태양의 길은 가장 현명한 자를 찾는 길……. 눈앞까지 다가온 승리를 위해 얼음 동상을 부수는 선택지는 현명한 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쉬운 선택지는 재미가 없지 않습니까?”

인간들의 고통과 불행의 감정을 원료로 삼는 루이스가 그런 시시한 선택지를 줄 리가 없었다.

루이스가 원하는 건 명확한 최선이 아닌, 마음이 찢어질 듯 가슴 아픈 고통과 절망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택하는 차악(最惡)이었다.

“……루이스 님의 냉기에 얼어붙은 자들은 자아가 있답니다. 지금도 얼음 속에 자아가 갇힌 채, 당신을 지켜보고 있겠죠.”

스노우 스톨라스.

악마의 진명을 가진 그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스노우는 절망에 빠진 아델라를 보며 더할 나위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빙긋-

“아델라 님…… 괴로우시군요? 저는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달콤한 절망은 처음이니까요.”

이건 악마조차 울고 갈 고도의 절망, 고도의 불행. 스노우는 몸을 부르르 떨며 만족했다.

반면 마치 얼음 동상처럼 굳어버린 아델라는 묵묵히 자신의 부모님을 바라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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