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5화
하늘에서 눈이 내린다.
산악 도시인 볼테라에서 확 트인 시야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세상의 만물은 차갑고도 시린 하얀 눈발에 뒤덮여 있었다.
아델라는 언젠가 본 듯 익숙한 풍경 속을 한참 동안이나 걸었다.
뼛속까지 시린 추위 속에서 그때와 같은 장소를 거닐고 있으니 아델라는 어쩔 수 없이 그날이 떠올랐다.
“……기다림에 지쳐 집을 나온 날. 저는 부모님을 찾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때의 아델라는 짧은 다리를 바삐 움직이며 부모님을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건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루이스의 추위가 무서운 이유는 단순히 대기의 온도를 떨어트리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
추위에 노출된 사람들의 피폐해진 정신을 파고들어 마나를 앗아가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결계 안의 인간을 자신의 연료로 삼아 마나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니 루이스는 소중한 연료를 절대 죽이지 않는다. 겨울의 여왕인 그녀는 영원한 추위 속에 국민들을 가두고 ‘정신과 마나’라는 가혹한 세금을 징수한다.
“바깥엔 눈보라가 몰아쳤고.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따뜻한 스프가 그리웠습니다. 너무나 외로워서 누구라도 좋으니…… 말을 걸어주길 바랐습니다.”
아델라가 걸음을 멈춘 장소는 자신의 집이었다. 여긴 아델라가 볼테라에 갇힌 시간 중 대부분을 보낸 장소로 트라우마의 결정체라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아델라는 아무런 동요 없이 너무나 담담하게 말했다.
“루이스가 아니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겠죠.”
“아델라…….”
신유성의 반응에 아델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 저는 괜찮습니다. 저희는 그와 같은 비극이 벌어지는 걸 막기 위해 온 것이니까요. 사사로운 감정은 잊으려 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델라는 평소답지 않게 다음 말을 꺼내는 걸 주저했다. 오직 신유성의 앞에서만 솔직해질 수 있었지만 공략을 앞둔 지금. 아델라는 신유성을 자신의 감정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신유성은 그런 아델라의 태도에 무언가를 느낀 듯 자상한 어투로 응원해주었다.
“말해도 괜찮아.”
아델라는 신기함을 느꼈다.
자신조차 스스로의 복잡한 감정을 이해하는 게 어렵건만 신유성은 어떻게 이리도 자신의 고민을 잘 알고 있는 걸까?
마치 속마음을 읽히는 기분이었지만 아델라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저…… 벨벳을 만난 후, 들게 된 공상입니다. 부모님을 잃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는 어떤 사람일까…… 하고……. 분명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겠죠.”
아델라는 추억이 담긴 집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눈에 파묻힌 앞마당에선 부모님과 함께 아름다운 데이지를 길렀다. 꽃잎이 필 때면 마당 전체가 봄의 향기로 뒤덮이는 게 참으로 좋았다.
아델라는 오직 눈만 쌓여 있는 앞마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 분을 다시 보고 싶지?”
자신의 손을 꽉 잡은 신유성의 물음에 아델라는 이전과는 달리 너무나 솔직하게 답했다.
“네. 무척.”
만약 두 사람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아델라의 소원은 항상 같았다. 그저 5살의 자신처럼 부모님의 품에 꼬옥 안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투정 부릴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꿈을 이루어질 수 없었고 아델라는 그 사실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아델라는 더욱 공략을 성공시키고 싶었다.
다시 부모님을 돌려받진 못하겠지만 이 추운 겨울을 볼테라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건 가능했다.
화사한 햇살 속에서 봄이 찾아왔을 때 자신의 앞마당에서 그때처럼 노란 데이지가 피게 만드는 건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제가 성장한 모습을…… 두 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아델라는 다짐했다.
추위 속에서 떠는 어린아이가 아닌, 당당한 헌터가 된 자신의 모습을 두 사람에게 보여주겠다고.
“혼자라면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당신과 함께라면 할 수 있습니다.”
다짐을 끝낸 아델라는 텅 빈 자신의 집을 두고 신유성과 함께 베이스캠프를 향해서 나아갔다. 자신의 집에 잠들어 있는 건 너무나 그리운 과거였지만 아델라는 두 번 다시 돌아보지 않았다.
* * *
루인성을 공략하기 위한 베이스캠프는 볼테라에 지어진 헌터 협회 소속 건물로 정해져 있었다.
비록 루이스의 부활로 건물의 관계자들은 전부 이탈했지만 시설 자체는 최첨단을 자랑하기에 베이스캠프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사람이 없는 거대한 건물은 지나치게 적막했다. 아무리 밝은 빛으로 내부를 밝혀도 그 을씨년스러운 적막함은 쉽사리 물리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사람이 없는 건물이란 생각보다 음산한 장소군요! 게다가 건물의 내부까지 이렇게 춥다니…….”
안젤라가 추위에 온몸을 떨자 로렐라이는 비교적 차분하게 답했다.
“루이스의 겨울은 물리적인 온도 변화가 아닌 대형 결계니까요.”
결계의 영향권 안에 있는 이상 아무리 건물의 내부라 하여도 완벽하게 추위를 피할 순 없었다.
“추위는 정말 괜찮으십니까? 정 힘드시면 역시 이럴 땐 몸을 맞대고 서로 온기를 나누는 게…….”
걱정하는 안젤라의 얼굴과 달리 그녀의 제안은 순전히 추위만이 아닌 듯 보였다.
‘존경하는 로렐라이 님과 이 기회를 통해 가까워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안젤라는 불경한 상상이라며 스스로를 꾸짖었지만 로렐라이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그건 바로 로렐라이 님의 머리를 쓰다듬어 보는 것…….’
그러나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었다. 설사 로렐라이가 허락하더라도 그건 너무나 불경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럴 순 없지. 로렐라이 님은 파티장이자 시계탑의 오라클……. 항상 존경을 가지고 로렐라이 님을 대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
덕분에 안젤라는 로렐라이의 곁에서 시중을 들며 머리를 빗겨주는 정도로 만족하고 있었다.
혹여 이번처럼 용기를 내어 다가기 위해 제안을 해도 로렐라이는 쉽사리 허락해주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보스를 공략하러 온 헌터가 추위 때문에 그런 추태를 보일 순 없죠.”
안젤라에게는 이 범접하기 힘든 로렐라이의 단호함도 오히려 매력처럼 느껴졌다.
‘이런 추위에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으시다니…… 역시 로렐라이 님!’
안젤라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입구를 바라보았다. 공략을 앞둔 헌터가 이런 일로 들떠선 안 될 일이지만 안젤라는 김은아와의 재회를 너무나 기대하고 있었다.
‘곧 만나게 되겠네.’
그래, 어떻게 잊을까?
운동으로 다져진 몸 선과 신의 설계처럼 깔끔하게 황금비율로 맞아떨어지는 이목구비. 하지만 그저 아름다움만으로는 재미가 없다는 듯 어딘가 모자란 행동으로 놀려주기 좋은 귀여움까지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분명…… 그 자존심 강한 성격은 놀려줄 때마다 괴롭히는 맛이 있겠지.’
안젤라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처럼 김은아를 그리고 있던 그 순간.
철컥!
베이스캠프의 철문이 열렸다.
‘드디어!’
안젤라는 기대하는 얼굴로 입구를 보았다. 하지만 신유성과 함께 베이스캠프로 입장하는 건 안젤라가 그토록 기다린 김은아가 아니었다.
“앗…….”
안젤라는 진한 아쉬움이 담긴 짧은 탄식을 뱉어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김은아를 향한 안젤라의 구애는 한결같았으나. 신유성의 곁에 있는 건 김은아가 아닌 아델라였다.
‘김은아가 아니었네…….’
하지만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안젤라는 차분히 아델라를 살펴보았다. 루비처럼 붉은빛을 띠는 두 눈과 무심한 표정으로 감출 수 없는 미모. 게다가 새하얀 눈처럼 순백의 피부는 신비로움마저 자아냈기에 안젤라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다.
‘김은아와는 다른 느낌이지만 확실히 엄청나…….’
김은아는 괴롭히고 놀려주고 싶다면 아델라의 경우는 케이스가 달랐다.
‘여왕님 같은 케이스군. 아니지, 겉만 봐선 몰라…… 오히려 그 반대일지도 모르겠어.’
안젤라는 특기인 상상력을 발휘해보았다. 입장부터 신비로움을 뿜어내는 아델라는 척 보기에도 친근해지거나 다가서기는 힘들어 보였다. 그건 곧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게 쉽지 않다는 이야기.
‘하지만 일단 친해지면 은근히 집착할 스타일이야…….’
정을 붙인 몇 없는 친구가 갑자기 떠나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고고하고 신비로운 아델라가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찾는 상상을 하자. 안젤라는 감격에 겨워 고개를 저었다.
‘……저런 파티원이 몇이나 곁에 있다니 가온의 파티장은 정말 부러운 녀석이군.’
안젤라가 나름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아델라와 친해질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 소중한 파티장인 로렐라이는 신유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볼을 붉히고 있었다.
‘기, 기사님!’
마침 자신을 인식한 신유성이 곁으로 다가오자 로렐라이는 심장이 빠르게 뛰며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직접 보게 된 신유성의 외모는 상상을 뛰어넘었고 동화책에서 보던 왕자님보다 몇백 배는 멋졌다.
“오랜만이야 로렐라이.”
심지어 자신을 보며 환하게 웃어주는 신유성의 미소에 로렐라이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어떻게든 가까스로 붙잡았다.
꼴깍.
신유성의 시선에 긴장한 로렐라이는 침묵했다. 이렇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상한 사람으로 비춰질 테니 빨리 대답해야 했다.
하지만 신유성과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로렐라이는 입을 떼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자신이 이상해져버린 걸까?
외모와 목소리는 물론이고 어떻게 손동작마저 멋있게 느껴질 수 있는 걸까?
“……멋있다.”
그 때문인지 로렐라이는 대답 대신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뱉어버렸다. 신유성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웃자.
“아!”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로렐라이는 당황한 듯 눈이 커졌다.
[로렐라이? 심장의 박동이 비정상적으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 여파는 얼마나 대단했는지 로렐라이 속에서 잠들어 있던 시간의 여신 크로노아가 깨어날 정도였다.
‘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로렐라이는 붉어진 얼굴로 울상이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버린 물이었다.
[그건 안 됩니다. 아무리 시간의 여신이라 하여도 시간을 되돌릴 순 없습니다.]
로렐라이는 단호한 크로노아의 대답에 더욱 얼굴이 붉어졌다. 신유성이 자신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불안해하던 찰나.
“로렐라이. 열이라도 나는 거야? 얼굴이 엄청 붉은데……. 역시 추위 때문인가?”
신유성은 열을 재기 위해 로렐라이의 이마에 손까지 올리며 걱정해주었다. 덕분에 얼굴이 붉어졌던 로렐라이는 아예 고장이 나버리고 말았다.
“네, 네에에…… 갠차나요오…….”
시계탑의 오라클을 다른 의미로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