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겨울의 마녀 루이스가 봉인석에서 깨어난 지 3일. 볼테라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바로 앞이 안 보일 정도로 하얀 눈발이 거세게 휘몰아쳤고 생기가 넘치던 도시는 모든 주민을 잃은 눈의 왕국이 되었다.
로렐라이를 옆에 둔 안젤라는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헌터 협회는 아직 루이스가 힘을 회복하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이 풍경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걸 힘을 잃은 여왕으로 취급하기에는 그 영항력이 너무 강력하지 않은가?
“어쩌면 협회의 판단이 틀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6급 수준의 헌터가 출동해도 6인으로 루이스를 공략하는 건 마녀를 과소평가한 게 아닐지…….”
눈이 뒤덮인 산을 바라보는 안젤라의 걱정에 두꺼운 옷을 입은 로렐라이는 허공에 숨을 불어보았다.
후우-
볼테라를 뒤덮은 거센 눈발은 로렐라이의 하얀 입김에서 순식간에 온기를 앗아갔다.
“안젤라. 저는 당신의 걱정을 이해합니다. 결계의 구조로 보아…… 외각에서 벌써 이 정도 추위라면 루인성 근처는 더욱 추위가 심하겠죠.”
안젤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공략을 거부하여도 로렐라이를 탓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이탈리아는 지금 최근 여러 도시에서 게이트가 열리며 헌터들이 너무나 부족한 상황입니다. 저희가 거절을 한다면 새로운 헌터를 찾느라 며칠에서 몇 주는 공략이 미뤄지겠죠.”
로렐라이는 뿌연 시야에 가늘게 뜬 눈으로 루인성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루이스는 그 시간 동안 빠른 속도로 강해질 겁니다. 그 시간 동안 도시를 탈출한 사람들은 일상을 잃어버린 채 고통받겠죠.”
로렐라이는 고개를 저었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지식을 쌓고 헌터가 된 의미가 없겠죠.”
인류를 위한 축복으로 강한 능력을 타고난 헌터가 시민들을 구원한다. 그건 모든 헌터들이 협회를 가입할 때 외우는 오계명 중 하나이자 어찌 보면 사회를 지속하게 만드는 약속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약간의 위험 때문에 공략을 포기할 생각을 하다니…….”
안젤라는 감격했다.
자신의 파티장은 어찌 이리도 강인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작은 몸으로 어찌 한 국가의 기대와 압력을 당당히 버틸 수 있을까?
“이 안젤라……. 목숨을 걸고 로렐라이 님을 보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파티장을 향한 안젤라의 존경심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와중에 로렐라이는 답지 않게 주춤거리며 질문을 했다.
“그…… 안젤라. 가온의 파티가 오는 건 내일이라고 했습니까?”
‘역시 로렐라이 님! 벌써 공략에 나서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신가 보군…….’
안젤라는 로렐라이의 물음에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온은 물론이고 유명 길드의 소속원인 유월이라는 헌터도 자신의 조수와 함께 내일까지 도착한다고 합니다.”
가온의 파티가 온다는 건 결국 파티장인 신유성도 온다는 이야기.
‘기사님이 볼테라로…….’
고개를 숙인 로렐라이는 기대감으로 동그란 눈을 빛냈다. 시계탑의 결전 이후 계속 떠오르는 신유성의 잔재 때문에 로렐라이는 한동안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혹여 깊이 잠이 들면 꼭 장밋빛으로 가득한 꿈이 그녀를 반겼다.
엄청난 양의 다독으로 다져진 창의력 덕분일까? 이야기의 레퍼토리도 너무나 다양했다.
흔하지만 왕도에 가까운 기사와 공주라던가. 가문의 반대를 받는 적대진영의 귀족이라던가. 아니면 더욱 극적인 요소와 애절함을 더해 적국에서 태어난 왕족인 경우도 있었다.
‘기사님과 함께, 나쁜 여왕을 무찌른다. 그리고 둘은…….’
생각만으로 정말 멋진 이야기.
로렐라이는 신유성을 만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어 고생이었다.
물론 가온의 파티원에 관심이 있는 건 로렐라이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가온이면 역시 김은아도…… 오겠지?’
국가대항전 이후 잠을 이루지 못한 건 안젤라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때려눕힌 강렬한 타격과 눈이 부실 정도의 미모.
‘게다가 잔뜩 놀려주고 싶은 성격까지…….’
김은아가 가온이 아니라 시계탑 아카데미의 학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젤라는 김은아와 헤어진 이후 아쉬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우연하게도 가온과 협력을 맺게 된 이번 공략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빨리, 보고 싶은걸…….’
* * *
추운 겨울이라 그런 걸까?
‘뭐지, 이 오싹한 느낌은…….’
김은아는 밀려오는 한기와 온몸이 섬뜩해지는 이상한 감각에 잠을 깨고 말았다.
‘뭐, 미리 준비하고 잘 됐지.’
아직 해조차 뜨지 않은 이른 시각이었지만 김은아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부실의 방문을 조심스레 연 김은아는 자고 있는 벨벳과 아델라를 확인했다.
‘이 녀석을 본 지도 1년이네……. 참 길고도 짧은 시간이었지.’
처음은 그저 단순한 라이벌에 불과했다. 어린 나이부터 1위를 줄기차게 해온 김은아에게 아델라는 처음 만난 거대한 벽이었다.
빠른 발동 속도.
막강한 마나 효율.
게다가 전기를 차단하는 아델라의 얼음 능력은 김은아에게 천적과 같았다.
김은아에게 아델라는 그저 강한 존재였다. 언젠가 꼭 이겨서 콧대를 눌러주고 싶었다.
그러니 아델라의 약한 모습 같은 건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김은아는 아델라를 알게 되었고 자신이 모르던 많은 면들을 새로이 보게 되었다. 아델라가 자신보다 더 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잠깐이나마 오빠를 잃은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슬펐건만 아델라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아델라는 볼테라의 겨울에서 살아난 몇 없는 생존자였으며 그 지옥을 직접 본 증인이었다.
‘넌, 피하고 싶지 않았던 거야?’
하지만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도 김은아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었다. 이건 도망치고 싶다고 도망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아델라는 이제 더 이상 꼬마가 아니었다. 한 명의 어엿한 헌터였다. 겨울의 마녀 루이스는 마치 희롱하듯 그런 아델라의 앞에 다시금 깨어난 것이다.
그러니 피할 수 없다. 지금 아델라에게 필요한 건 용기였고 응원이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기나긴 한숨을 쉰 김은아는 방을 나왔다. 그리곤 하나씩 아델라의 포켓에 준비해둔 물건들을 집어넣었다.
부스럭-
김은아가 처음 선택한 물건은 핫팩이었다. 왜 하필 핫팩이냐 묻는다면 당연히 이유가 있었다.
[10번째 패배입니다. 이제 포기하세요.]
그날도 어느 때처럼 아델라에게 패배한 김은아는 분한 표정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사방을 전부 방어하는 저 얼음을 어떻게 해야 부실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김은아는 보고 말았다.
[호- 호-]
대련장을 벗어난 아델라가 핫팩을 꺼내 호호- 입김까지 불며 손을 녹이고 있는 장면을.
‘그 녀석. 얼음을 다루는 주제에 은근히 추위를 잘 타니까…….’
그렇게 추위를 잘 타면서 대체 어떻게 능력을 쓰는 건지. 그렇게 추위를 잘 타면서 그토록 추웠다는 볼테라의 겨울을 어떻게 버틴 건지.
‘……그러니까. 그 녀석이 좋아하는 핫팩을 잔뜩 넣자.’
핫팩은 잠깐이지만 뜨겁게 온기를 뿜어낼 테고 지친 아델라를 녹여줄 것이다.
스윽-
물론 핫팩은 시작에 불과했다.
김은아가 준비해둔 물건 중에는 스미레가 직접 짜준 털장갑도 있었고, 아날로그 카메라로 벨벳과 모두가 함께 찍은 사진을 넣어 만든 행운의 부적도 있었다.
게다가 특제 초콜릿부터 어마어마한 가격의 털 코트에 이르기까지 김은아가 준비한 잡동사니들은 끝없이 포켓에 들어갔다.
비록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건 김은아가 아델라에게 보내는 응원의 형태였다.
길었던 투병 생활 끝에 오빠가 일어나며 이제 자신은 트라우마를 벗어났기에 가능한 여유였다.
주섬주섬-
포켓에 물건을 집어넣느라 바쁘게 움직이던 김은아의 손이 멈췄다. 이젠 발걸음마저 익숙해진 탓일까. 김은아는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안 자고 있었나 보네?”
“응.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은 새벽에 산책을 다녀 오거든. 그럼 은아 너는…….”
생각지도 못한 신유성의 등장에 김은아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괜히 민망하네…….”
바닥에 자리까지 편 채 물건을 담아주는 김은아의 모습에 신유성은 미소를 지으며 그 곁에 앉았다.
“걱정하지 마, 은아야. 이제 아델라는 혼자가 아니니까.”
신유성의 말이 맞았다.
아델라는 더이상 추운 겨울 홀로 남았던 5살의 여자아이가 아니었고, 신유성도 부모에게 버림받았던 5살의 아이가 아니었다.
아델라가 볼테라를 찾아가는 이유는 헌터로서 마녀를 공략하기 위함이었다. 아델라는 더눈 길을 잃은 미아가 아니었다.
“걱정 안 해.”
그 덕분일까 김은아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하며 신유성을 보았다. 김은아에게 신유성은 언제나 해결사였다. 남들이 보기엔 불가능해 보인 일도 너무나 간단하게 해결해버리는 해결사.
“이번에도 우리 오빠를 구해준 것처럼…… 네가 아델라를 구해주겠지.”
자신이 걱정하는 건 그것뿐만이 아니건만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신유성이 고개를 끄덕이자 김은아는 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 자상하고 믿음직스럽다니 대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자신과 스미레는 물론이고 아델라에 이르기까지 왜 그렇게 네 녀석 주변에 여자가 많으냐 추궁하고 싶었지만. 김은아는 그럴 수가 없었다.
‘……그게 내가 이 녀석을 좋아하게 된 이유니까.’
그게 이 녀석이 타고난 팔자려니 하고 어쩔 수 없는 일로 치부하면 조금이나마 낫지 않을까?
“겨울 방학은 짧으니까. 꼭 이겨서 빨리 돌아와 알지?”
그러니 함께 있는 지금만이라도 둘의 관계에 충실해지기 위해 김은아는 신유성의 손에 당당하게 깍지를 꼈다.
“그리고…… 둘만 있다고 너무 친해지면 안 돼.”
게다가 김은아는 이전과 다르게 솔직함을 담아 질투를 드러내기까지 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김은아의 성격을 생각한다면 참으로 괄목할 변화였다.
“응.”
신유성은 즉답했다.
누군가 무엇을 지키기 위한 강함이었으며 무엇을 위한 강함인지 묻는다면 신유성은 당당하게 답할 수 있었다.
자신이 힘을 기른 건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며 이 순간을 위한 강함이었다고.
“금방 돌아올게.”
신유성의 맹세와 함께 하늘에선 하염없이 하얀 눈이 내렸다. 세기에 기록될 만큼 혹독한 겨울이 다시 찾아왔지만 두려울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