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0화
[기꺼이 하겠습니다. 협회장님이 원하시는 일이 정말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다만…….]
신유성은 세계를 구하는 ‘큰 뜻’에 동참하라는 강유찬의 제안을 승낙했다. 다만 그 뒤에는 한 가지 사족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저는 제가 선택을 내릴 것이고, 그 선택을 믿겠습니다.]
그 과정 중 모든 선택은 오롯이 신유성 자신이 내릴 것이며 스승의 의지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누가 감히 전설의 헌터이자 협회장인 강유찬을 상대로 이런 배짱을 낼 수 있을까.
“날 상대로 그렇게까지 말을 하다니 참 대단한 녀석이지.”
그러나 강유찬은 말뿐인 사람을 싫어했다. 강유찬이 진정으로 원하는 건 결과 하나뿐.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유성이가 이번 사건을 해결할 거라 보는가?”
허허- 하고 웃는 강유찬의 물음에 메이린은 잠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힘들거라고 생각합니다. 20층을 클리어 한 성장세를 보면 잠재력은 높다고 생각하지만. 역시 단독으로 체포하기엔 리벨리온은 너무 강한 상대입니다.”
메이린은 절대 신유성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 체포팀에 추천했다는 사실만 보아도 신유성을 높이 사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같이 추천된 다른 팀은 누구인가?
“가장 가능성이 높은 건 역시 신오가문의 가주와 선악의 헤일로라고 생각합니다.”
“신강윤과 유민서라……. 역시 그렇게 생각하나?”
“둘은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7급 헌터고 그중에서도 선악의 헤일로는 7급 헌터 중 대인 전에서 최강이라 평가받고 있으니까요.”
메이린의 말처럼 유민서와 신강윤은 무려 7급. 거기다 신강윤은 차기 협회장으로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강유찬은 메이린의 예상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네. 헌터들의 전투는 전투력이 전부가 아니지. 오히려 좀 더 악독한 놈들이 이기는 법이라네.”
강유찬이 말한 ‘악독한’이라는 단어에 메이린이 짐작이 가는 사람은 한명밖에 없었다. 다만 너무 의외의 예측이라 의아할 뿐이었다.
“……신하윤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녀는 최근 아카데미 생활에만 집중하며 별 다른 활약이…….”
“그래. 대외적으로는 그렇겠지.”
메이린은 재미있다는 듯 웃는 강유찬을 보며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 많고 쟁쟁한 팀들 중 하필 최근 활약도 없는 신하윤을 택하다니 좀처럼 동감할 수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곧 국외에도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강유찬의 직감이 지금까지 틀린 적은 없었기에 그저 지금은 메이린도 납득할 뿐이었다.
* * *
최근 로렐라이의 활약은 눈부셨다. 파티원들과 함께 최연소의 나이로 6급 던전 공략을 성공적으로 끝내며 영국의 희망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시계탑의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의 오라클(Oracle)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었다.
‘내 교장 생활 중 최고로 부담스러운 학생이야.’
똑똑-
시계탑의 교장인 벨로체 아펠리온이 정중하게 노크를 하자 서재에선 다급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공주님은 아마…… 또 책을 읽고 있었겠지.’
시계탑에서 오직 오라클에게만 허락되는 비밀의 서재. 하지만 벨로체도 이렇게까지 서재에서 살다시피 하는 오라클은 처음 보았다.
“……아 교장 선생님이시군요.”
문이 열리고 로렐라이가 서재에서 나오자 벨로체는 싱긋 웃어보였다.
“로렐라이 협회의 의뢰 건에 관해서 잠깐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로렐라이는 벨로체의 이야기에 곤란한 얼굴로 서재를 힐끔 들여다보았다.
“그게…… 지금은…….”
벨로체는 평소와 다른 로렐라이의 행동에서 대강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어질러둬서 그러나.’
오늘은 세바스찬과 안젤라가 외출에 나섰으니 이해 할만도 했다. 이 공주님께서 직접 청소를 하는 모습은 벨로체도 좀처럼 연상이 되지 않았다.
“설마 서재를 정리하지 않아 그런 거면 괜찮단다. 교장 선생님도 그리 꼼꼼한 사람은 아니란다.”
벨로체가 최대한 밝게 웃으며 안심시키자 로렐라이는 장고 끝에 문을 열었다.
“……그럼 자리가 여의치 않으니 서재 안쪽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렐라이를 따라 서재로 들어간 벨로체는 왜 상대가 문을 열어주길 꺼려했는지 알 게 됐다.
[신유성! 20층 공략 성공!]
[헌터계의 신성! 가온의 루키! 아쿠아리움 방문!]
[파티원과 함께 장을 보는 가정적인 면모 드러나…….]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로렐라이는 아날로그 감성을 사랑하는지 홀로그램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기사들을 프린트를 해서 스크랩해두었다. 그것도 모두 신유성과 관련된 기사였다.
특히 벨로체를 움찔거리게 만드는 건 기사 속 신유성 모습을 확대해서 찍어둔 사진들이었다.
마녀의 제자.
역대 최고의 오라클.
영국의 희망.
온갖 호칭으로 불리며 영국 최대의 인기를 구가하는 로렐라이가 신유성에게 이 정도로 푹 빠져 있는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뭐라 생각할까?
‘이 정도면 스토커라 불러도 손색이 없겠는데.’
심지어 벨로체는 로렐라이가 펼쳐둔 [금발 공주님과 멋진 기사님]이라는 제목의 공책은 차마 들여다볼 엄두도 나지 않았다.
지금의 상황으로 보아 공책에는 신유성과 로렐라이를 모티브 삼은 온갖 상상이 빼곡히 적혀 있을 게 분명했다.
“어, 그…….”
서재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베테랑인 벨로체는 어울리지 않게 당혹감으로 말을 더듬었다.
소문으로는 신성그룹의 후계자인 김은아와 전설의 헌터 아덴의 손녀인 아델라조차 단단히 묶여버렸다던데 이제는 로렐라이가 그다음 차례인 걸까.
‘걔는 무슨 공주 콜렉터도 아니고…….’
분명 여럿 울리고 다닐 얼굴이긴 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로렐라이까지 손을 뻗쳤다는 게 벨로체는 신기할 지경이었다.
‘참 여러모로 재주도 좋…….’
“교장 선생님?”
생각에 빠져 있던 벨로체는 로렐라이의 부름에 정신을 차렸다. 아무리 충격적인 광경을 봤어도 지금은 로렐라이를 설득할 시간.
“이번 의뢰는 로렐라이에게도 어려운 부탁일 거야. 리벨리온 체포팀 중 하나로 참여할 수 있겠냐고 물었거든.”
리벨리온 체포팀이라는 무거운 의뢰에 로렐라이는 한동안 생각에 빠졌다. 빌런을 체포하는 건 헌터로서 사명 같은 것이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엔 자신은 영국에게 너무나 큰 존재였다.
같은 공략을 하러 가도 다른 헌터들과 로렐라이는 대우가 달랐다. 모두가 안전을 기원하고 일거수일투족이 화제가 되었다.
“리벨리온과 대립하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 제가 승낙한다면 세간의 화제가 되겠군요.”
로렐라이는 알고 있었다.
기대를 받는 자의 걸음은 너무나 무겁다는 걸. 그리고 그 영향력이 불러올 파장을 생각하면 이 결정은 혼자서 내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거절하길 바라. 협회에선 갖은 이유를 대고 있지만 만약 너에게 문제가 생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물론 교장인 벨로체는 같은 영국인으로서 로렐라이의 고민을 함께하고 있었다.
침묵의 1분.
기나긴 정적 끝에 로렐라이는 입을 열었다
“빌런은 특성이라는 축복을 악용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빌런을 체포하는 건 같은 힘을 가진 헌터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로렐라이가 말을 멈추자 벨로체는 이해한다는 듯 웃었다.
“그 뒤에 있을, 위험이나 파장을 생각하면 역시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지?”
끄덕.
시계탑의 오라클은 현명하다.
뜨거운 마음보다 차갑게 손익을 계산하고 시계탑의 비보인 지식의 보고를 누린 만큼 누가보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려야했다.
“네 저는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입니다.”
원하는 대답을 들은 벨로체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잘 생각했어. 협회도 참 아무리 손이 부족해도 현역이 할 일을 학생들에게까지 맡긴다니 대체 무슨 생각인지…….”
벨로체는 시계탑의 부흥을 위해 세간의 화제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학교의 상징인 오라클을 위험한 장소에 던질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로렐라이는 벨로체가 무심결에 말한 ‘학생들’이라는 단어에 꽂혀버렸다.
“교장 선생님. 학생들…… 이라면 이건 협회에서 저에게만 온 제안이 아닌 겁니까?”
껌벅-
로렐라이가 의아한 얼굴로 푸른 벽안을 깜빡이자 벨로체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그렇지…… 다른 파티에도 몇 번 제안이 간 걸로 알아. 뭐, 아일랜드나 일본의 쵸텐이나…….”
벨로체는 다른 아카데미의 이름을 대며 둘러댈 생각이었지만 로렐라이는 콕 짚어 하나를 물었다.
“그럼 가온 아카데미에게도 제안이 갔습니까?”
역시 생각대로 벨로체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말이 로렐라이의 입에서 나오자.
“그렇긴 한데…….”
화제를 돌리려는 벨로체.
그러나 이미 눈빛이 바뀐 로렐라이는 양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리더니 두 번 더 눈을 껌뻑였다.
이 제안에 참여한다면.
자신이 그토록 기다리던.
신유성과 언젠간 만날 가능성이 있다.
“참여…….”
시계탑의 오라클은 누구보다 합리성을 택해야 하지만.
“……참여하겠습니다!”
그게 사랑의 감정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 * *
이혁은 생각했다.
어떻게 꼬드겨야 스미레에게서 드래곤 하트를 빼앗을 수 있을까?
‘아마 신유성이 사령술사에게 드래곤 하트를 준 걸로 보아 언데드 소환의 촉매로 사용했을 테지.’
이혁이 스미레에게서 드래곤 하트를 뺏으려면 소환물을 역소환 시키거나 아니면 사령술사의 협조가 있어야 했다.
즉, 가장 좋은 건 스미레를 제안으로 꼬드겨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것. 이혁이 보고 있는 홀로그램에는 스미레가 전학을 올 때 기입했던 정보가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걸 토대로 조사한 결과.
‘세븐넘버라고 들었는데…….’
이혁은 스미레의 가족과 집안에 대한 정보를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스미레의 집안은 스미레가 세븐넘버가 되며 이전보다 사정이 나아졌지만 그렇다고 부유한 편은 절대 아니었다.
‘뭐, 조사 결과를 보니…… 생각보다 쉽게 끝나겠어.’
결과를 본 이혁은 안도했다.
돈으로 매수를 한다는 선택지는 가장 쉬우면서도 효과가 확실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스미레처럼 돈과 거리가 먼 사람에게는 돈의 힘이 더욱 빛을 발했다.
‘잘된 일이야.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가장 싸게 먹히는 거지.’
신하윤은 헌터부의 우두머리이자 가온의 학생회장. 그런 신하윤이 타고난 수완으로 헌터부를 통해 축적한 돈은 기업도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거기다 신하윤은 신오가문이라는 뒷배까지 있으니 세계 정복이라는 큰 꿈을 위해 수십억 정도는 기꺼이 투척할 수 있었다.
‘이제 남은 일은 신유성 몰래 그 스미레라는 아이와 접촉만 하면 되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