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몸이 녹아드는 노곤한 감각.
그리웠던 소파에 누운 신유성은 눈을 감은 채 기억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왜 어렵게 생각했을까. 탑을 공략하고 결말에 도달하는 건 마치 물의 흐름과 같았다.
하늘에서 내린 비가 목마른 산을 적시고 강을 타고 흐르듯 흐름에 몸을 맡긴다.
‘차이가 있다면…….’
물은 끝없이 순환하지만 공략에는 언제나 끝이 있다. 물은 어떻게 흐르든 어디에 도달하든 신경 쓰는 이가 없지만 공략의 과정과 결과는 분명히 다르다.
그건 마치 첫 단추를 꿰는 일과 같아서 시작부터 쉽지가 않다.
‘이 공략의 가장 중요한 기점은 산드라의 호의를 사는 것이었어.’
누군가의 마음을 사는 건 힘으로 상대를 억압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신유성은 그 어려운 과정을 참 쉽게 해냈다.
‘산드라는 대체 왜 내게 호의를 느꼈던 걸까?’
신유성은 맥없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남자의 몸으로 돌아왔으나 여전히 긴 머리카락은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다가올 미래를, 무언가를 직감한 걸까?’
어쩌면 그건 흔히들 말하는 운명일지도 몰랐다. 만약 그런 우연한 일들이 없었다면 결과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난 산드라의 비밀을 알아내지도 못했을 거고, 그럼 탑의 축복을 사용했을 거야.’
운명이 신유성을 돕지 않았다면.
운명의 날 신유성은 남자의 몸으로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날 제약의 눈은 여자가 아닌 남자.
‘그렇다면…… 나는 반드시 패배했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더라도 희생은 피할 수 없었어.’
분명 신유성은 이번 공략을 통해 복수로 점철된 악귀. 산드라의 운명을 바꾸었다. 그러나 그건 동시에 자신의 운명을 구원한 일이기도 했다.
“……나.”
모두가 기다린 긴 침묵. 그 끝에 생각을 정리한 신유성이 입을 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사실 헌터에게 필…….”
“캬으으- 버섯을 못 찾다니! 벨벳은 바보야! 달맞이 나무랑 거짓말 버섯만 찾았으면 벨벳이 1등이었는데!”
분한 일이 있었는지 갑작스럽게 끼어든 벨벳이 말을 끊자 눈치를 보던 스미레는 입술에 검지를 올리며 주의를 줬다.
“벨벳……. 쉿-”
짝!
스미레는 마치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듯 박수를 치더니 신유성에 대한 찬사까지 잊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운을 띄워주었다.
“유성 씨의 활약 덕분에 이번 공략은 정말 모두에게 최고의 결과를 가져왔죠!”
덕분에 말이 끊겼던 신유성은 방금 전 벌어진 일들을 떠올리며 다시 감정을 끌어올렸다.
탑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 실타래처럼 얽혀버린 사건들 속에서 운명처럼 도달한 결말.
“……아니야 스미레. 모두의 활약 덕분이었지. 세이덴의 국왕이었던 레이오나도 산드라의 침공을 용서했고, 산드라도 세이덴을 용서할 수 있었으니까.”
수없이 많은 과정과 그보다 더 많은 결말이 있다고 한들 이보다 좋은 결말이 있을까?
[나 레이오나. 복수만큼 잊지 않는 것이 은혜다. 나를 박해한 친족들을 참수하고 그 자리에 전쟁터의 친우를 세운 건 나의 흠이 아닌 자랑이지.]
은혜를 잊지 않는다. 호언장담했던 그 말처럼 레이오나는 정말 아델라와 신유성의 파티에게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았다.
[……신유르시온이라고 했나? 그러니 침략자의 처우는 너에게 맡기마. 그리고 선택은 강자의 권리다. 우리 왕국에서 너보다 강자는 없으니 네 뜻을 따라야지.]
그 덕분에 여인섬의 용병들은 저마다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첫째로 여인섬의 군주인 산드라는 복수심을 내려놓고 어느 때보다 진심을 담아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내 마음에 불안이 찾아 올때면 언제나 너를 떠올리도록 하지. 그래. 어느 곳에 가더라도 너의 이름은 잊지 않겠다. 잊으려 해도 평생 잊을 수 없겠지.]
물론 뚫어져라 뜨거운 눈빛을 날리는 게 부담스럽긴 했지만 산드라는 확연히 바뀌어 있었다. 그건 전쟁과 패배를 통해 뜨겁게 자신을 내던지고 불태웠기에 산드라가 도달할 수 있었던 결론이었다.
그 끝에 남은 결말이 잿더미가 아니었던 건 모두 신유성의 도움 덕분이었다.
[정말이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 게 나의 신조거든. 신유르시온. 아니…… 신유성. 너의 이름은 나의 이 가슴에 새기도록 하마.]
물론 산드라가 용병 일을 포기한다고 말했음에도 주변인들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마탑의 엘리트가 이젠 뭘 먹고 살지 걱정하는 입장이 됐네요. 저는 산드라 님만 믿고 마탑을 나온 거 아시죠?]
산드라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든 페리아는 그 곁을 떠나지 않겠다며 끼어들었고.
[산드라 님이 앞으로 어떤 뜻을 품더라도 그 옆에서 묵묵히 주군을 보좌하는 게 기사의 임무……. 제가 산드라님의 곁에 남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장미기사단의 베니안도 군도를 벗어나겠다고 선포한 산드라의 곁을 지켰다.
“이런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힘을 믿은 게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했기 때문이었어. 만약 그렇지…….”
신유성은 힐끔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는 걸까. 모처럼 진지한 이야기를 하고 있건만 흥미롭게 듣고 있는 건 스미레 뿐이었다.
“네! 단순히 힘으로 공략에 임했다면 정말 위험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다면 나머지는 어디에 있을까? 신유성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벨벳과 아델라는 소파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때! 낫사마귀가 내 친구한테 낫을 휘둘러써-! 벨벳이 빠르게 움직여서 챠압! 하고 밀쳤는데 낫이 쓰그그그- 갈대를 베더니 캿! 하고 벨벳 위를 스쳐 지나가써-!”
손과 발은 물론이고 설명을 위해선 몸을 던지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벨벳의 이야기 솜씨는 신유성을 한참이나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와구와구-
어떻게 된건지 오르카가 인형 주제에 팝콘을 퍼먹으며 이야기에 빠진 순간. 벨벳은 집중하라는 듯 방금 전보다 훨씬 작아진 목소리로 모두를 조용히 시켰다.
“근데…… 벨벳 깨달아써…….”
낫사마귀가 덮쳐온 위기의 순간.
이 위기를 타파하기 벨벳이 깨달은 건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을 깨달았기에 첫 시험부터 엄청난 활약으로 에이타의 2위를 기록한 걸까?
“앉아서 풀숲에 숨으니까 낫사마귀는 벨벳이랑 아키오를 찾지 못해써……. 캬항! 이건 역전의 기회였어!”
벨벳의 말은 공략의 정론이었다.
낫사마귀는 2미터에 가까운 엄청난 크기를 자랑하는 2급 괴수다. 거대 포유류인 곰조차도 한 수 접고 갈 정도로 엄청난 전투력을 가지고 있지만 청각 기관이 퇴화해 버린 탓에 먹이 감지를 오직 시각에 의존한다.
덩치도 키도 작은 벨벳과 아키오가 풀숲에 숨어버렸다면 낫사마귀는 구분이 쉽지 않다. 같은 곤충들의 경우라면 페로몬으로 식별하지만 이 경우는 불가능했다.
“벨벳은 숨죽이고 생각해써! 캬오오오……. 기회는 한 번이다! 그럼 벨벳의 필살기는 무엇일까!”
정말 마나를 통해 유전자라도 물려받은 걸까? 위기의 순간 집중력을 발휘하는 벨벳의 발상은 몹시 신유성의 그것과 비슷했다.
통- 통통!
모두가 이야기에 집중한 가운데 벨벳은 보란 듯 자신의 통통한 배를 두드리며 너무나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벨벳은 사실 천재라서 알고 이써써…… 벨벳의 필살기가 뭔지! 하지만 숲에서 그 힘은 너무 위험하다는 것도 알고 있어써!”
벨벳은 이야기를 듣는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드래곤인 벨벳이 단 한 번에 낫사마귀를 처치할 만한 필살기는 무엇일까? 그토록 집안에서 쓸데없이 자랑했던 그 기술이 아닐까?
“서, 설마…….”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이 커진 아델라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그렇다면 벨벳…… 그 비장의 기술을 정말…….”
놀란 건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오르카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무려 숲에서! 날씨가 건조하니 안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모두의 상상력은 결국 정답에 도달한 듯 하나의 결과로 귀결되자 이야기를 멈추고 ‘여백의 시간’을 선물했던 벨벳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촤아악-!
벨벳은 아델라에게 선물 받았던 곰인형을 한 손에 잡은 채 바닥에서 슬라이딩을 했다.
“일단 벨벳은 아키오를 잡은 채로 낫사마귀의 뒤를 향해 빠르게 슬라이딩해써-!”
먹잇감을 놓친 낫사마귀는 뒤뚱거리며 한참을 헤맸을 것이다. 애꿎은 풀숲만 바라보며 뒤가 잡힌 줄은 생각조차 못했을 것이다.
“낫사마귀가 뒤뚱 거리는 순간! 벨벳은 크게 입을 벌려써-! 그 다음 배에 마나를 모으고! 평소보다 얇고 길게!”
화르르륵-
벨벳은 낫사마귀를 향해 불을 뿜어냈던 것처럼 너무나 화려한 불을 뿜어냈다.
숲을 지키기 위해서인지 창처럼 뾰족한 불길이 천장을 수놓자. 아델라는 감탄을 터트렸다.
“대단합니다. 벨벳……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도 다른 친구들을 생각하다니…….”
“아니! 진짜! 문제는 그다음부터 여써!”
그러나 벨벳은 이야기의 긴장감을 절대 놓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고통에 몸부림치는 낫사마귀처럼 양팔을 이리저리 거칠게 휘저으며 소리쳤다.
“크으으, 치에에엑-”
“나이스! 역시 작은 주인님! 낫사마귀에게 정통으로 불 뿜기를 맞추신 거군요!”
기쁜 얼굴로 오르카가 소리쳤지만 벨벳은 양팔을 낫처럼 사용해 도도도- 바닥을 질주했다.
“낫사마귀는 벨벳을 향해 달려와써! 물가를 향해 가는 게 아니라! 일단 벨벳이랑 아키오를 싹둑- 해버릴 생각이어써-!”
불에 당하면 일단 낫사마귀가 물가를 향해 도망 칠거라고 생각한 건 모두의 착각이었다. 오히려 낫사마귀는 자신이 불길에 휩싸여 죽더라도 벨벳에게 복수를 하기로 정했다.
“탸댜댜댜- 턋!”
낫사마귀의 낫에 담긴 건 오뉴월은 아니지만 곤충의 무시무시한 한이 서린 통한의 일격.
번쩍!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 이야기 속에서 벨벳이 양손을 교차해 높이 들었다.
그리곤 마치 낫사마귀에 빙의한 듯 상대를 무참히 베어버리려는 그 순간!
척-!
“그때 누군가 양팔로 낫사마귀의 낫을 막아써…….”
벨벳의 한마디에 아델라와 오르카는 멎었던 숨을 다시 쉬었다.
“대체 누가! 설마 이전에 에이타의 랭킹 1위였다는 유타!?”
흥분한 오르카가 나름의 추리를 뱉자 벨벳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낫사마귀를 막은 건 아키오여써! 캬우으…… 아키오는 방패로 낫사마귀를 막은 채 벨벳에게 말해써……. 아키오는 약하지만 그래도 벨벳을 지키고 시퍼…….”
열등생에 겁이 많다고 놀림 받던 아키오는 자신을 구해주고 믿어준 벨벳을 지켜주기 위해 처음으로 힘을 낸 것이다.
“어머, 아키오…….”
결국 스미레조차 벨벳의 이야기에 홀린 듯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안타까운 표정을 짓자.
벨벳은 양손을 들며 소리쳤다.
“벨벳은 바보여써! 낫사마귀는 아키오의 도움을 받는다면 손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상대여써-!”
이야기의 끝에서 벨벳은 동료를 믿는 게 곧 공략의 열쇠라는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벨벳을 진정한 헌터로 탈바꿈 시켰다.
화르르륵-!
다시 필살의 불 뿜기로 2급 괴수 낫사마귀에게 승리를 거둔 것이다. 두 아이들의 목숨을 건 혈투. 긴박하고도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너무나 완벽한 이야기에 박수가 쏟아졌다.
“대단해요 벨벳…….”
“작은 주인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벨벳에게 그런 친구가 생기다니. 역시 훌쩍……. 에이타로 보내길 잘했어요.”
소파에 앉아 모두가 감동에 빠진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신유성은 생각했다.
‘……벨벳은 참, 이야기를 재밌게 하구니.’
뒤늦게 벨벳에게 패배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