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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터 아카데미의 최강투신-335화 (334/434)

제335화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빗물로 차가워진 몸을 데우는 뜨거운 온기에 산드라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어째서…….”

산드라는 궁금했다. 모든 게 끝이라 생각했건만 왜 상대는 팔이 부서져라 자신을 꽈악- 안아주고 있는 걸까.

신유성의 갑작스런 행동에 칼을 겨누던 용병들은 움직임을 멈췄고 산드라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며 의문만 표했다.

“넌 전쟁을 막으러 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주동자인 나를 죽이면 모든 게 끝이거늘…….”

검을 놓친 산드라는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바닥은 빗물로 진탕이 되어 있었지만 산드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어째서 나를…….”

그저 지금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건 한 가지 물음. 그러나 신유성은 오히려 대답 대신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그전에…… 당신에게 묻고 싶군요. 억울하지 않습니까?”

“……억울하냐고?”

산드라는 힘없이 풋-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 질문은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모든 걸 바친 복수마저 실패해버렸다. 분하고 억울해서 부릅뜬 눈에선 피눈물이 흐를 정도였다.

“이제 와……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지?”

산드라가 주먹을 움켜쥐며 분한 듯 고개를 떨어트리자 신유성은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당신을 알아주고 싶었을 뿐입니다. 누명으로 소중한 사람들을 잃고, 인생의 대부분을 전쟁터에 보내게 된 삶. 그건 분명 억울하고 분한 삶이겠죠.”

분명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신유성은 산드라의 모든 사정을 알고 있었고 산드라는 신유성의 올곧음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탓에 아름다운 이상향만 꿈꾸는 순결한 아가씨인 줄 알았건만 오늘 신유성이 보여준 모습은 누구보다 전사에 가까웠다.

저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 어떤 수련을 거듭했을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왔을까? 힘은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분명 뼈를 깎고 피를 토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산드라는 전쟁을 멈추겠다는 신유성의 말을 철없는 아가씨의 공상이라 생각했건만 상대를 알아보지 못했던 쪽은 자신이었다.

신유성은 강했다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이 있었고, 어떤 순간에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선택을 따르려는 강인함이 있었다.

“……동정심인가?”

모든 걸 단념한 산드라가 미소를 지으며 쓰게 웃자 신유성은 고개를 저었다.

“동정심이 아닙니다. 저는 당신에게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의 마지막을 선택할 기회.”

신유성은 여전히 전쟁 중인 성의 외벽을 가리키며 말했다. 신유성은 산드라를 제압할 순 있었지만 이 전쟁을 피해 없이 끝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오직 산드라만 가능한 일. 그렇기에 신유성은 산드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복수에 실패한 지금. 당신의 마지막 선택은 뭐죠? 당신을 믿고 따라온 여인섬의 사람들과 함께 이 해변에서 최후를 맞이하는 겁니까?”

신유성의 말들은 산드라가 가장 아파하는 곳을 찔러왔다. 전쟁을 이긴다는 명목도 없다면 이 전쟁은 산드라가 직접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불구덩이에 던지는 일밖에 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전 당신을 돕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신유성이 손을 뻗자 산드라는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시선을 올려다보았다.

“나를, 나를 돕겠다고? 피로 얼룩진 나를? 대체 어째서…….”

산드라와 여인섬의 용병들은 주변 국가의 골칫거리였다. 하이에나처럼 약자와 강자 사이를 옮겨 다니며 밥벌이를 했다.

“네 기준대로라면 나는 악인이다. 나를 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지?”

“제 목적은 산드라 당신의 처벌도 세이덴의 구원도 아닙니다.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전쟁을 막겠다고.”

신유성은 세이덴의 방식도 산드라의 방식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제와 두 진영을 선악이라는 모호한 단어로 나누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을 살며 누구라도 세이덴이 될 수 있고 누구라도 산드라가 될 수 있다.

“그러니 더이상 무의미한 희생자가 없도록 절망뿐인 이야기의 결말을 당신이 바꿔주십시오.”

스윽-

신유성이 손을 뻗은 그 순간.

산드라의 세상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했다. 붉게 물든 세상은 밝게 빛났고 차갑게 쏟아지던 비는 어느새 멎어 있었다.

자신도 저 밝은 빛에 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처음 전쟁터에 나간 날…… 십인장은 나를 칭찬하며 빵을 하나 쥐여주더군. 처음 전쟁터에 온 녀석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바쁜데…… 멀쩡하게 남아있는 건 나뿐이었다고…….”

산드라는 힘없이 후훗- 흣- 하고 소리 내어 웃더니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산드라라고 전쟁을 좋아한 건 아니었으며 피를 좋아하는 광인은 더더욱 아니었다.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면 두려움에 떨었고 잔혹한 전쟁 속에서 도망치고 싶은 날도 있었다.

“그는 나를 보고 나머지 겁쟁이들과 다르다고…… 정말 용감하다고 그렇게 말하더군…….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능력을 해제한 여파일까.

지금까지 사용한 마나가 역행하며 산드라는 점점 몸 안의 힘이 빠져나갔다. 빗물에 적셔진 머리는 당장이라도 땅에 처박힐 듯 무겁게 느껴졌다.

툭툭-

그럼에도 가볍게 머리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낸 산드라는 웃었다.

“바보 같은 말이지. 내가 도망치지 않은 건 용감해서가 아니야. 그저 도망치는 쪽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지…….”

산드라는 손으로 쏟아지는 빛을 가렸다. 드문드문 손가락 사이를 타고 흘러넘치는 빛에 너무나 눈이 부셨다.

“후훗……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군. 이 전쟁터에서 최후를 맞이한다면……. 나는 어디로 갈까? 어쩌면 가족들의 곁에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산드라는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흘렸다. 20년 만에 흘려본 눈물은 군도의 바닷물처럼 차가울 줄 알았건만 과분할 정도로 따뜻했다.

“내가 무패를 기록한 건 모두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죽기를 바랐으니…… 질 수가 없지…….”

엉망이 된 산드라는 무엇이 즐거운지 흐느끼며 웃었다.

“난 그저……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야. 행복했던 과거로…….”

산드라의 능력의 개화로 붉어진 눈은 평소의 벽안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나 강인한 전사가 처음 보여준 나약한 일면에 가까이서 그녀를 지켜본 용병단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눈물을 흘렸다.

“산드라 님…….”

“산드라 님의 대업이 이토록 허무하게! 흐흑…….”

신유성은 여전히 손을 뻗은 채 산드라를 기다렸다. 처음 터진 흐느낌과 눈물은 멈출 새가 없었지만 그래도 느긋하게 그녀를 기다렸다. 산드라에게 처음으로 찾아온 기회를 후회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충분히 지켜봐 주었다.

“남은 건 당신의 선택입니다. 산드라. 당신이 전쟁을 포기한다면 나는 당신을 돕겠습니다. 만약 세이덴이 당신을 막아선다면 어떻게든 지켜내겠습니다.”

남은 건 산드라의 몫.

뚝뚝-

산드라는 엉망이 된 얼굴로 눈물을 닦으며 주변을 보았다. 산드라가 능력 전개를 멈추자 세이덴의 기사들 또한 신유성의 뜻을 따라 선택을 기다려주었고, 정신이 돌아온 기사들은 검을 놓고 주저앉아 있었다.

“난, 나는…….”

산드라가 말끝을 흐렸다.

20년. 무려 20년의 맹세다.

그건 단 하루 만에 바뀔 수 있는 가치관이 아니었다. 이제 와서 복수를 포기하면 자신을 찾아올 기억들이 사무치게 두려웠다.

자신은 용감해질 수 있을까?

그림자를 벗어나 밝은 빛을 향해 발을 뻗을 수 있을까?

그 무게를… 버텨낼 수 있을까?

“두렵다……. 세이덴을 향한 복수심은 나의 전부였으니 당연하겠지. 목표가 사라진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어떤 삶이 기다릴지도 알지 못한다…….”

고개를 떨어트린 산드라는 눈을 감고 읊조렸다. 용병으로서의 삶도 군도의 지위도 모두 놓아버린 자신에게 남게 된 건 무엇일까?

“……나는 또다시 홀로 남게 되겠지.”

그렇게 남은 결과라곤 또 20년 전과 같은 자신이 아닐까? 그런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이젠 모든 걸 포기해버리고만 싶던 그때.

비틀비틀- 턱-

“그렇게 된다고 하여도 산드라 님의 곁에는…… 제가 있습니다.”

스미레의 부축을 받은 페리아는 힘겹게 몸을 겨누며 산드라를 위로했다.

“산드라 님은…… 마탑의 모두가 꿈같은 이야기라 비웃던 제 연구를 지원해주신 분입니다. 제가 여인섬에 오게 된 건 순전히 산드라 님이 주신 믿음 덕분……. 산드라 님이 어떤 길을 걷게 되더라도 저는…… 산드라 님의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산드라를 따르겠다는 판단을 내린 건 페리아만이 아니었다. 전기를 직격당해 머리카락이 쭈뼛 선 베니안을 포함해 여인섬의 용병 대부분은 산드라의 곁에 남기를 소망했다.

“……산드라 님은 저희들의 지도자입니다. 갈 곳 없이 방황하던 저희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툭-

검을 바닥에 지탱한 채 베니안도 마찬가지라며 웃자 산드라는 미소를 지으며 눈을 감았다.

자신은 겁쟁이다.

복수를 포기할 정도로 용감하지 못한 인간이었으며 설령 죽더라도 가족들을 다시 보고 싶은 어리광쟁이였다.

그럼에도 산드라는 새롭게 태어나야 했다. 어둑한 그림자를 벗어나 따스한 빛 속에서 새롭게 살아가야 했다.

그건 자신을 위한 일이었고.

자신을 믿어준 이들을 위한 일이었으며, 이미 스러진 가족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선택의 순간이군.”

빙긋- 눈을 뜬 산드라가 웃으며 신유성을 보았다.

“네 이름을 말해줄 수 있겠나?”

기억을 잃고 여인섬을 찾아온 정체불명의 소녀. 자신을 간단하게 막아설 정도로 엄청난 실력을 가진 소녀.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소녀.

산드라는 모든 것이 의문이었지만.

“신유성.”

영원히 그 이름을 잊지 않길 바랐다.

“신유성이라……. 그렇군.”

산드라는 신유성이 내민 손을 잡았다. 쏟아지는 환한 빛에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내 선택은 모두와 함께 다시금 새로이 시작하는 것이다. 네 덕분이다. ……복수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고 싶어졌거든.”

마지막 산드라의 말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이 될지 아니면 진실이 될지는 신도 알 수 없는 어려운 문제였다.

파앗-!

[히든 퀘스트를 통해 20층 공략에 성공하셨습니다.]

[히든 퀘스트: 산드라의 빛]

[상세 - 당신은 산드라의 다친 마음을 열어 양쪽 진영 간 큰 피해 없이 전쟁을 막아냈습니다. 여인섬의 용병들은 영원토록 당신을 기억하고 세이덴의 음유시인은 당신의 업적을 노래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절망뿐인 끝이 아닌 이와 같은 결말도 인정했다. 이건 강함은 물론 어떤 헌터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신유성이었기에 도달할 수 있는 결말.

‘탑은 이 결말을 인정했다.’

그렇기에 신유성은 누구보다 ‘탑의 진실’에 가까운 헌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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