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마녀가 생각한 권왕은 역사상 최고의 헌터였지만 이성으로서는 전혀 아니었다.
기분파인 탓에 연락도 없이 행방불명이 되는 건 예삿일이었고 여자의 마음은 손톱만큼도 몰라주는 데다 기념일 같은 단어와는 담을 쌓은 무심한 나쁜 남자였다.
“그러니 고생을 하는 건 나로 족하다고! 근데 내 귀여운 제자까지 이렇게 만들어 놔?”
마녀는 자신의 제자인 불쌍한 로렐라이를 떠올렸다.
독서광인 로렐라이는 좋아하는 기사나 이야기를 스크랩하는 버릇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로렐라이의 스크랩은 단 한 가지 주제뿐이었다.
[대회에서 우승하신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탑의 20층에 도전하시다니……. 그분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신유성 그리고 신유성.
마녀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신유성은 제 스승을 닮아 심각할 정도로 여자에게 무감한데다 둔감함으로는 곰과 비교해도 무색하다는 걸.
“불쌍한 우리 아이를 상사병에 걸리게 만들어? 얼굴 좀 반반하다고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해줄 거야. 그 총명하던 아이가 아주 바보가 됐어.”
날이 밝자마자 찾아와서 하는 말이 사랑 투정이라니 유원학은 시큰둥한 얼굴로 귀를 긁으며 마녀를 흘겨보았다.
“겨우 그런 이야기를 하러 이곳까지 찾아왔던 거냐? ……너도 참 할 일이 없나 보군.”
여긴 천림산(天林山)의 정상.
하늘과 맞닿았다는 이야기처럼 주변의 전경은 구름이 보일 만큼 높았고 산소조차 희박했다. 거기다 천림산 주변을 날아다니는 고래만 한 크기의 괴조들은 맹수는 물론 헌터마저 사냥하는 몬스터였다.
“하도 강유찬 그놈이 부탁을 하는 통에 오랜만에 채집을 왔더니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원하는 게 뭐냐?”
유원학이 질린다는 얼굴로 쯧- 혀를 차자 마녀는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이번에 강유찬이 계획 중인 일에 네가 우리 아이도 넣어줘.”
마녀의 부탁은 헌터 일을 빌미로 로렐라이를 신유성과 같이 있게 해달라는 이야기였다.
“그런 부탁이라면 그 녀석한테 직접 가서 말할 것이지.”
“그래도 꺼려지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상성이 좋지 않은걸.”
투덜거리며 말은 했지만 유원학도 강유찬과 마녀. 둘 간의 사이가 멀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아직도 그 일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냐? 뭐 그럴 만도 하겠지. 너흰 탑을 등반하는 내내 부딪혔으니…….”
“아무리 동료지만 그 녀석의 방식은 용납할 수 없어.”
동료들의 관계를 둘로 나누고 싶진 않았지만 유원학이 보기에 강유찬과 검신이 강경파라면 마녀와 아덴은 온건파였다.
강경파는 탑을 공략하기 위해선 무슨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게 비인륜적인 방법이라 하여도 어차피 탑이 구현한 가짜 세상일 뿐이니 상관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반면 마녀와 아덴은 탑을 공략하며 퀘스트를 진행함에 있어서 최대한 좋은 끝을 맞이하고 싶어 했다.
정답은 없다.
이건 본디 사람이 타고난 성정과 같은 것. 그렇기에 유원학은 동료들 간의 관계에서 언제나 중립을 지켰다.
“탑을 등반하기 시작한 직후라면 모르겠지만. 너도 알고 있잖아. 탑에서 벌어지는 일도 결국…….”
이야기가 그렇게 탑에서 끝났다면 좋았겠지만 반으로 갈려버린 두 진영의 차이는 현실에서도 이어졌다.
마녀는 소수의 희생을 치르더라도 효율을 중시하는 검신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류진과 리벨리온의 사건이 터졌을 땐 터질 만한 일이 이제야 터졌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렇게 말해도 너도 알고 있을 거다.”
이렇게 파티가 해체된 이후에도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걸 보면 상극은 상극인 모양. 유원학은 기절한 괴조의 털을 뽑으며 마녀를 달래주었다.
“좋은 결말은 우리의 마음대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때의 우리는 아직 미숙했고 자격이 없었다.”
그런 면에서 아덴과 마녀가 인정하지 않아도 강유찬과 검신은 뛰어났다. 퀘스트의 내용에 한해서 어떤 악행을 저지르는 한이 있어도 공략을 성공시켰고 결말에 닿게 만들었다.
엘프들의 보물을 훔치는 퀘스트를 위해 세계수에 불을 지르고, 어인들의 왕인 해신과 싸울 땐 그들의 군집을 침범해 부화 중인 알들을 빌미로 협박을 했다.
그렇게 어떤 수를 쓰더라도 공략의 성공률을 1%라도 올리는 게 검신과 강유찬의 방식이었고, 반면 아덴과 마녀는 정반대의 부류.
유원학은 동료들의 분쟁 사이에서 언제나 팀의 균형이 깨지지 않도록 중간 역할을 해주었다.
“그렇겠지. 그게 우리가 탑을 오른 이유니까.”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탑에서 성장한 헌터들은 수많은 위험에서 세상을 구해냈고, 탑에서 얻어낸 아티팩트와 정보들은 세상을 이롭게 만들어냈다. 탑은 세계의 진실에 가까워지는 계단이었다.
갑자기 생긴 던전과 몬스터들은 무엇인지 어디서 온 존재들인지. 인간들은 탑을 통해 그 세상을 들여다보고 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 용납이 되는 일일까? 마녀는 효율이라는 단어 하나로 자신의 가치관과 모든 존엄을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 현상과 현실이 다를 게 뭐지? 차원이 다르고 시간이 다르고 공간이 다르다 하여도 나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 있어.”
마녀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결연한 목소리로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니 내가 죽는 그날까지도 그 녀석들의 방식은 절대 인정하지 않아.”
검신의 방식도.
강유찬의 방식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는 게 마녀의 입장이었다. 그건 신념의 문제였고, 그녀 자신의 존엄을 위한 일이기도 했다.
“너도 기억하고 있잖아? 우리가 처음으로 만족할 만한 결말에 도달한 날을.”
옆에 앉은 마녀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유원학에게 말을 걸었다.
“그건 자기만족 같은 게 아니야. 실패를 되풀이하지 말라는 명백한 메시지를 주는 거지.”
단순히 스킬을 늘리고 마나를 늘리는 게 배움일까? 헌터는 탑의 사건 속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원래의 자신이라면 만나지 못할 이를 만나고 인정하지 못할 사건을 겪으며 전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우린 알고 있잖아? 그런 방식으로 탑의 진실에는…… 절대 도달할 수 없다는 걸. 그게 우리가 공략을 포기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잖아?”
탑의 진실에 도달했음에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는 사실은 유원학에게 역린과 같은 것.
“난 알고 있어. 네가 제자를 받고 최강의 헌터에 집착하게 된 이유도 결국…….”
“그만.”
참다못한 유원학은 괴조의 털을 뽑던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까 부탁한 건은 내가 강유찬에게 전해주도록 하지. ……넌 이만 내려가도록 해라.”
마녀는 유원학의 달라진 분위기에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직감했다. 시간을 돌이킬 수 없듯, 뱉은 말은 되돌릴 수 없는 법.
“……그래. 미안. 방금 이야기는 잊어줘.”
마녀는 그 말을 끝으로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채 검은색 빗자루를 타고 고전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날았다.
방식이 옳다고만 주장하고 싶진 않았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검신이 탑의 저주를 받게 된 이유도 자신들이 공략을 포기하게 된 이유도 결국 공략의 결과만 중시한 잘못된 방식이 낳은 결과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득- 득- 드둑-
유원학은 오색의 깃털을 자랑하던 괴조가 생닭 같은 피부를 드러낼 때까지 말없이 털을 뽑으며 생각했다.
탑의 60층이라는 전대미문의 높이까지 도달하며 자신들이 지나친 옳은 결말이란 무엇일까.
어떤 헌터가 도달할 수 있을까?
‘아직은 이르지만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유성이는 분명…….’
지금 이 순간 유원학의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 * *
류진이 리벨리온에 가입한 한 달 동안 작전에 참가한 횟수는 무려 13번이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믿기 힘든 결과입니다. 한 달 만에 이 정도 활약이라니……. 좀 전에는 추적을 해온 6급도 2명이나 쓰러트렸다고 들었습니다. 거기다 마정석의 흡수율도 가장 높으니 이 속도라면…… 정말 7급 헌터가 될 수도 있겠군요.
안경을 치켜 올린 네임리스가 기뻐하며 말하자 류진은 그저 짧게 답했다.
“내 동생을 구해줬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치렀을 뿐이다.”
둘의 관계는 심플했다.
네임리스는 류밍을 구할 정보와 능력이 있었고 류진은 그 대가로 기꺼이 목숨을 걸었다.
물론 류밍까지 회복 능력을 개화하게 된 건 의외였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전투에 참여하게 된 건 아니기에 서로 간의 약속은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좋은 대답입니다. 약속을 했으면 응당 지켜야하며 거래를 했으면 그에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죠.”
네임리스가 기뻐하며 손짓을 하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클로는 작은 함을 들고 걸어 나왔다.
터억-
클로가 준비했던 함을 열자 그 안에 들어 있는 건 붉은 마정석이었다. 지금까지와 차이점이 있다면 지금까지와 차원이 다른 마나가 농축 되어 있었고, 마족의 기운을 상징하는 검은색 마나가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는 것.
“……이건?”
“탑의 기록에 수기된 72명의 마왕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마왕은 모든 마족들의 머리에 군림하는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마왕들 사이에도 힘의 서열은 있는 법. 마왕들은 서로의 세력과 힘으로 1위부터 72위까지 서열을 나누어 그 순위를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 중에서도 1위부터 7위에 해당하는 상위 마왕들은 7급 수준으로 재앙의 마녀들에게 버금가는 엄청난 위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건 그 중에서도 서열 6위의 마왕 발레포르의 마정석입니다. 당신의 힘을 지금보다 몇 배는 배가시켜줄 아티팩트죠.”
그렇다고 류진은 이런 위험한 선물을 곧이곧대로 받아들 바보는 아니었다. 마정석은 위험한 물건이다. 하급 마족들의 마정석조차 헌터들을 파멸시킬 힘이 있었다.
“……마왕의 마정석?”
그렇다면 마왕은 어떠할까.
헌터에게 허투루 주어지는 힘은 없었다. 거대한 힘에는 그만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었다. 과분한 힘을 다루려하면 정신은 물론 종래에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선물치고는 의도가 불순하군.”
“위험한 물건이라는 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힘이 필요한 순간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죠.”
마치 류진을 위하는 듯 들렸지만 네임리스의 의도는 간단했다. 위험한 순간이 오면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래. ……알겠다.”
하지만 네임리스는 대가를 치렀고 이젠 류진이 약속을 지킬 차례. 거절은 힘이 있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