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3화
능력이 엔진이라면 마나는 연료와 같다. 아무리 뛰어난 엔진을 가지고 있어도 연료를 훨씬 벗어난 수준의 힘은 발휘할 수 없다.
냉기를 부리거나, 속력을 가속하거나, 자신의 집중력을 올리는 모든 행동에는 그에 적합한 연료가 들어간다.
그렇기에 산드라의 ‘제약의 눈’처럼 이렇게 광범위한 규모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건 상식을 벗어난 경우였다.
신유성은 확신하고 있었다.
“전투하기 전 마지막으로 묻고 싶습니다. ……이 힘을 위해 무엇을 바치셨습니까?”
하늘도 땅도 바다도 진홍색으로 붉어진 세상을 보며 신유성이 말했다. 이런 대규모 결계는 아티팩트의 도움이 없는 이상 6급 수준의 마나로 구현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당신은 무엇을 포기했습니까?”
이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그것이 계약의 형태가 되었든 술식의 형태가 되었든 능력을 위해 대가를 바친 경우였다.
“내가 포기한 것?”
검을 든 산드라는 신유성을 마주 보았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서늘한 눈빛은 신유성을 보고 있지만 신유성을 향한 게 아니었다.
“참 이상한 부분에 집착하는군. 너는 나의 복수를 망치러 온 게 아니더냐?”
산드라는 신유성이 자신의 복수를 끝까지 만류하려 했다는 걸 기억해냈다. 정체를 들킨다면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뜻을 굽히지 않은 걸 보면 신유성이 어떤 부류인지 알 수 있었다.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고.
직선을 그은 듯 올곧은 인간.
“널 본 순간 느꼈던 묘한 끌림은 아마 네가 나와 정반대의 부류기 때문이겠지. 그건 백조를 동경하는 까마귀처럼 나에게는 돌아갈 수 없는 길이니 말이야.”
한쪽 손바닥을 위로 향했다.
쏴아아아-
전쟁터를 가득 채웠던 핏물처럼 가득 쏟아지는 진홍빛 비를 바라보며 산드라는 조금씩 기억을 더듬었다.
“내게 검을 가르쳐 준 이는 명망 높은 기사였다. 내가 검을 잡기도 전에 먼저 기사도를 가르친 참된 스승이었지.”
꽈아악-!
눈을 번뜩인 산드라가 검을 쥐자 주변의 핏물이 깃들었다. 피에 깃든 마나를 끌어다 신체를 강화하는 형태였다.
“하지만-!”
부웅-!
검이 뿜어내는 엄청난 풍압에 신유성은 방어를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지만, 산드라의 붉은 검기는 피아식별 없이 전방을 통째로 휩쓸어버렸다.
콰아앙-!
그러나 여전히 당당하게 서 있는 신유성을 보며 산드라는 피식 웃어 보였다. 신체 강화를 사용한 공격을 이렇게 쉽게 막아내는 걸 보면 그가 이번 전쟁 최고의 걸림돌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스승은 수십 명의 기습에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정말 세이덴의 첩자일까?
그렇다면 왜 자신의 사정을 궁금해 하는 걸까? 대체 누구기에 군도의 제왕 중 하나인 자신의 공격을 막아낸 걸까?
산드라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누군가의 마음을 공감하고 꿰뚫어 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산드라는 그저 눈을 사용해 상대방을 간파하고 일방적인 관계를 맺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자존심도 버리고 자신의 부하였던 인간들에게 내 무죄를 주장해주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지.”
산드라는 강인한 스승이 자신의 눈앞에서 허무하게 죽어간 그 날을 떠올렸다.
“내가 처음으로 소원을 가진 순간이었다. 이 모든 상황을 해결할 힘을 가지고 싶다 몇 번이고 빌었지.”
그러나 소녀의 소원이 신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현실은 무엇도 바뀌지 않았고 죄인의 신분으로 산드라는 처형장에 끌려갔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기억이다.
산드라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자신을 바라보던 오빠의 눈을 기억했다. 타고난 성정 탓에 소동물조차 무서워하며 서재에 박혀 책만 읽던 그 사람이……. 무슨 일을 겪었기에 죽음 앞에서 그리 차분할 수 있었을까?
“광장에 모인 이들은 나의 가족을 죄인이라 모욕했지만 내게 그들은 근엄한 아버지와 인자한 어머니, 소심한 오빠였지.”
그들이 그런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에 이유는 없었다. 누명을 쓴 자는 약했고 명령을 내린 왕족은 강했다. 이유는 그게 전부.
“난 나의 모든 걸 이미 잃었다. 그러니 포기할 것도 없었지. 내가 한 건 그저 간절한 소망이었다.”
복수하고 싶다.
힘을 가지고 싶다.
오직 승자와 패자만으로 갈리는 이 약육강식의 세상에서 살아남고 싶다.
뜨거운 쇳덩이가 죄의 낙인을 찍는 그 순간에도 산드라는 소원했다.
“그들에게 되갚아줄 힘을 가질 수만 있다면 복수가 끝나는 날. 나의 생명이 꺼지더라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산드라가 믿던 신은 산드라를 구원해주지 못했지만 제약의 힘은 그 소원을 들어주었다. 산드라에게 힘을 내리고 복수를 위한 모든 걸 준비해주었다.
“그 복수가 당신의 끝이라 하여도 정말 상관없습니까?”
신유성의 물음에 산드라는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상관없다. 비루하게 이어갈 목숨을 이런 결말이 되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지.”
산드라는 더이상 어떤 말도 필요 없다는 듯 양손으로 검을 쥐며 자세를 잡았다.
“그러니…… 목숨이 아깝다면!”
쿠웅-!
산드라가 발로 땅을 박찬 순간.
빗물이 튀긴 자리가 움푹 파여 들며 붉은 마나가 모여들었다.
“비켜!”
신유성에게 지금까지 이런 부류의 공격은 흔치 않았다.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것도 아니며, 류진처럼 따라가기 힘든 가속으로 시야의 사각을 노리는 것도 아니었다.
산드라의 무기는 오직 힘.
넘쳐흐르는 마나를 몇 겹이나 강화에 둘러 무식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같은 방식으로 어울려줄 필요는 없겠지.’
힘에 힘으로 부딪힐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투신류 1장 낙월각(落月脚)
신유성은 반월을 그린 발차기로 검의 옆면을 차내며 유연하게 산드라의 공격을 흘려냈다.
‘중요한 건 그다음.’
공격과 공격 사이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생긴다. 공격을 실패한 산드라는 힘의 축이 뒤틀려 아직도 검을 회수하지 못했지만.
촤아악-!
신유성은 반월을 그린 다리가 다시 자신의 앞에 오는 것까지가 하나의 동작이었다.
그러나 신유성은 더욱 나아갔다.
발을 회수하는 동작조차 허투루 쓰지 않겠다는 듯 몸의 반동을 이용해 정권을 내질렀다.
쿵!
두꺼운 갑옷에 주먹이 닿으며 전달되는 묵직한 타격감.
“큭-!”
산드라는 물러나지 않으려 검을 땅에 꽂으며 버텼지만 이번 충격은 녹록지 않았다.
마나의 파동을 다루는 신유성에게 강철 갑옷은 무의미했다. 물체를 타고 전달된 타격은 그대로 산드라에게 전달됐다.
신체를 마비시키고.
정신을 헤집는 고통.
단 1합으로 서로의 실력은 판가름이 끝났다. 산드라의 위험도는 6급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약의 눈’이 적용되었을 때의 이야기였다.
여자의 몸이 되어 신유성이 제약의 대상에서 벗어난 지금. 전투력만을 두고 본다면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대체, 대체 왜…… 이제 와 내 앞길을 막는단 말이더냐? 남은 건 딱 한 걸음인데!”
패배를 확신한 산드라가 느낀 감정은 완벽한 절망.
“너만 없으면 이 모든 대업이 끝이거늘!”
산드라는 울부짖으며 마나를 한계까지 끌어올려 검을 휘둘렀다. 붉은 비는 용암처럼 끓어오르며 산드라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퍼억! 소리를 내며 신유성을 덮쳤다.
“이번에도…… 이번에도! 힘이 부족한 것이더냐!? 그렇다면 왜! 나는 모든 걸 버렸는데 대체 왜-!”
산드라가 부리는 순도 높은 마나 덩어리는 닿는 모든 것을 녹이려 했지만 신유성의 움직임을 따라갈 순 없었다.
투신류 월영보법(月影步法)
그저 산드라는 흔들리는 잔영을 쫓으며 무의미한 칼질을 반복할 뿐이었다. 빠른 속도로 체내의 마나가 줄어들었지만 산드라는 멈출 수 없었다.
위를 베고 옆을 베고 앞을 베며 산드라는 계속 속도를 끌어올렸다.
“내겐 이것뿐이다! 이 복수가 나를 살려온 이유다-!”
그러나 산드라의 검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엄청난 힘을 다룬다 해도 흥분으로 눈이 가려진 산드라의 공격은 맹인의 그것과 다름없었다.
저런 건 거짓된 고양감이었다.
전투에 몰입하며 흐름과 기세를 잡은 게 아닌, 그저 실패의 두려움에 휩싸여 검을 휘두르며 공포를 억누를 뿐이었다.
츠즉!
흔들리는 잔상이 산드라의 뒤에서 나타났다. 상대가 이성을 잃고 검을 휘두른다면 신유성은 빈틈투성이인 몸에 주먹을 박아 넣을 뿐이었다.
쿵-!
이번에도 갑옷을 타고 흐르는 저릿한 마나의 파동에 산드라는 몸을 휘청거렸다.
“컥! 난 절대, 지지 않아…….”
산드라는 이성을 잃은 눈에 핏발을 세우며 토로했다. 눈가를 타고 흐르는 붉은 빗물은 산드라의 감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복수라는 목적 아래에 얼마나 많은 순간을 고통과 인내로 버티며 살아왔을까?
그러나 여기에 모인 모두는 결과는 알고 있었다.
“사, 산드라님 이…….”
“이렇게나 일방적으로…….”
산드라는 최악의 상황엔 빗속에서 벌이는 처절한 전투를 생각했겠지만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신유성은 호흡조차 흐트러짐이 없었고, 반면 산드라는 온몸이 만신창이였다.
“그렇게 말을 해도…… 이미 포기한 건 당신 아닙니까?”
전투의 결과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산드라의 쪽.
“나에게는…… 나에게 남은 건, 이것뿐이란 말이다. 나는 포기할 수 없다!”
산드라는 절망했다.
20년 전 하루아침에 일가족과 한쪽 눈을 잃은 어린 소녀는 전쟁터를 전전하며 군주가 되었다.
무엇을 위한 고통이었을까?
무엇을 위한 인내였을까?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산드라에게 닥친 결과는 같았다.
똑같이 무의미한 저항이었고, 더욱 강한 힘에게 짓눌려 좌절되고 말았다.
“설령 죽는다 하여도-!”
산드라는 체내의 모든 마나를 짜내 신유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갈망하고 소원한다 하여도 기적은 없었다. 능력의 대상이 아닌 신유성에게 산드라의 공격이 닿는 일은 없었다.
산드라의 검은 빗겨 나갔고, 검을 피한 신유성은 산드라를 향해 파고들었다. 산드라의 눈앞에 닥친 건 명백한 패배.
‘……이걸로 끝인가.’
자신을 괴롭혀온 20년의 기억도 지금까지 전쟁터를 전전하며 참아온 인내도 모두 끝이었다.
신유성의 손은 자신의 빈틈을 관통하며 이 저주받은 삶을. 이 모든 전쟁을 끝낼 것이 자명했다.
남은 건 절망과 허망함 뿐.
모든 걸 불태우고 잿더미가 된 산드라에게 분노는 사치스러운 감정이었다. 산드라는 이 모든 숙명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지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턱-
파노라마처럼 흩어지는 생에.
그 속에 비치는 건 고통과 후회만이 가득한 삶. 모든 게 끝이라 생각한 산드라는 눈을 감았다.
눈물을 흘릴 감정조차 메말라 버린 산드라를 대신해 눈가를 타고 흐르는 붉은 빗물.
쏴아아-
이야기의 끝이 왔다.
이제 길었던 막을 마무리하고 헌터는 보스를 처치하여 퀘스트를 클리어 할 결말만이 남았다.
척.
그러나 신유성이 그다음 벌인 행동은 이 전쟁터에 속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결과였다.